크리스천의 결혼 생활
조엘 R. 비키.제임스 라벨 지음, 정충하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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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복의 출발점인가? 아니면 불행의 전주곡인가? 한국은 미국, 오스트리아, 영국에 이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이혼율을 자랑한다. 결혼을 할 때 누구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부부생활과 가정을 꿈꾸지만 결혼 생활의 실제는 결코 녹녹하지 않다. 장밋빛 단꿈을 기대하며 결혼이라는 열차에 올라탄 수많은 부부들이 서로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생채기를 남긴 채 이혼이라는 정거장에 내리는 이유는 그들 안에 바른 결혼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움과 의문 속에서 만난 정말 보물 같은 저작 한 권이 있다. 특별히 개신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에게 있어서 성경적이고 바른 결혼관을 제시해 주는 너무나 탁월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미혼 시절부터 지금껏 결혼과 가정에 관한 다수의 책을 접했고 관련 교육까지 받았지만 이번에 만난 이 책만큼 결혼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책은 처음이다.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자로 정평이 나있는 믿고 보는 저자 '조엘 비키' 교수와 그의 동료 '제임스 라벨' 목사가 공저한 <크리스천의 결혼 생활>은 17세기 영국 29명 청교도들의 결혼에 관한 저작 속에서 발견한 성경적이며 청교도 개혁주의적 결혼관을 집대성한 탁월한 저작이다.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결혼의 제정과 존귀, 목적, 은택들을 다룬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셨고 그렇기에 결혼은 그것 자체로 존귀하다. 중반부에서는 좋은 결혼의 시작과 결혼의 존귀함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매우 실제적이면서도 상세한 고찰이 이어진다.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좋은 결혼의 시작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내가 좋은 배우자로서 준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혼 안에 참된 구원의 은혜와 경건이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요약된다. 이는 결혼에 앞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서 다른 책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매우 귀중한 조언 중 하나는 아내를 선택할 때 또는 남편을 선택할 때 고려되어야 할 요소 중 하나가 경건과 더불어 '적합함'이라는 내용이다. 신앙적으로 경건하지만 함께 인생이라는 멍에를 메야 하는 배우자가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하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인 부분이 많다면 그러한 결혼은 많은 문제를 만들어낸다. '웨이틀리'라는 청교도 목회자는 책에서 "당신에게 적합한 동반자를 선택하라. 적합함이야말로 결혼 생활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게 하는 최고의 도움이다."라고 말하다. 즉, 결혼 자체가 두 사람을 조화롭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너무나 중요한 조언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존귀한 결혼을 지켜나가기 위한 실제적 지침으로서 남편과 아내의 상호 의무, 아내의 의무, 남편의 의무를 매우 상세하게 기술한다.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계약이 아닌 언약 개념으로서의 결혼, 사랑과 순결, 도움과 화평의 상호 의무, 복종과 도움으로 대변되는 아내의 의무, 사랑과 권위로서의 남편의 의무 그리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과 이미 결혼한 사람들을 향한 깨알 조언이 양약과 같다. "결혼의 행복은 배우자의 행위가 아니라 당신의 행위에 달려 있다. 남편이 아내의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아내를 사랑하거나 혹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 여부와 상관없이 즐겁게 남편에게 순종한다면 결혼의 멍에는 쉽고 가벼울 것이다."p149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여주는 일시적인 것이 바로 결혼임을 '존 파이퍼'는 자신의 책 <결혼 신학>에서 이야기했다. 살아보니까 결혼은 실제다! '레이너'라는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오직 단맛만 있는 순정 꿀이 아니라 그 안에 어느 정도의 쓴맛이 섞여 있는 혼합 꿀이다." 결혼에 대한 기막힌 비유다. 결혼에 관한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을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제시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저자들이 29명 청교도 목회자들의 결혼에 대한 저작을 연구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들을 제시한 후 본인들의 논지를 확장시키고 부연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본서가 기존 교계에서 출간된 수많은 결혼에 대한 저작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점은 성경적이면서 청교도 개혁주의 유산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 청교도들은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시키며 삶의 정황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기를 즐거워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펼치는 결혼에 대한 생각들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더 나아가 개혁주의적이다. 유튜브를 통해 신자들의 이혼을 너무나 쉽게 용인하는 어느 목회자의 강연에 열광하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듣기에 매우 나이스하고 달콤하다. 그 목사님의 말씀은 너무나 관용이 넘치며 잘못된 결혼을 통해서 아파하며 이혼을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온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 결혼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기에 영합한 인본주의적 견해가 아닌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철저하게 성경에서 도출된 결혼에 관한 보석 같은 진리가 가득한 보물 상자와 같다. 바른 신자로서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기뻐함으로 진리를 위해 살다 죽기 원하는가? 지금처럼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현대 문화 속에서 결혼만큼 격렬한 공격을 받는 주제도 없다. 이제 결혼과 가정이라는 전통적 가치는 현대인들에게 한물 간 유물과 같다. 이처럼 결혼의 의미가 세속화되고 퇴색되어만 가는 시대 속에서 신자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성경은 결혼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이다. 매 페이지에 수록된 모든 내용들이 그야말로 영롱한 보석과 같아서 나의 마음과 지성에 전부 쓸어 담고 싶은 욕심으로 적잖이 밑줄을 그으며 완독했다. 제한된 서평 속에 주옥같은 내용들을 전부 소개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그렇기에 성경이라는 진리의 우물 속에서 길어올린 맑고 청명한 청교도 개혁주의 유산이 가리키는 결혼에 대한 진리의 정수를 결혼을 준비하는 청년 신자들과 지금도 결혼과 가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경작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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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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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위용을 뽐냈던 위대한 제국 로마의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 가운데 <리비우스 로마사>는 단연 독보적인 저작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서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책을 기록한 사가의 삶과 역사적 사건의 시간 간극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유만 두고 보더라도 기원 전후 로마라는 동시대를 살았던 저자 '티투스 리비우스'가 써 내려간 본서는 현장성에 있어 여타 현대에 기록된 로마사 저작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총 4권으로 기획된 본서의 전작 1, 2권을 완독했던 터라 3권을 내심 기대했다. 천년 로마의 시작, 왕정과 공화정이라는 정치 체제의 변화를 다룬 1권에 이어서 로마를 둘러싼 다양한 도시 국가들과의 크고 작은 분쟁을 통한 부침 속에서 어떻게 로마가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해 갔는지에 대한 사실들이 흥미롭게 기록된 2권을 끝내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된 3권은 네 권의 시리즈 중 가히 백미라 칭할 수 있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등장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다.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의 대부분 아니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한니발 전쟁기는 책의 분량만큼 방대한 스케일을 다룬 블록버스터와 같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 묘사와 더불어 수려하지만 절제된 문장의 아름다움이 리비우스라는 로마의 탁월한 역사가에 의해서 빼곡히 수놓아져 있다.

3권이 두 권의 전작과 확연히 다른 점 한 가지는 플롯 자체가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라는 당대 최강국 간의 다툼 속에서 한니발이라는 명불허전의 맹장과 스키피오라는 불세출 영웅으로 대변되는 인물 간의 대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 하다. 또한 3권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내용의 묘사가 상당히 회화적이라는 데 있다. 눈 덮인 알프스산맥의 협곡을 넘는 카르타고 군의 모습이나 유럽인들에게는 생소했을 코끼리가 전장을 누비며 로마의 전열을 흐트러 놓는 장면 등은 마치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 독자의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내러티브의 주를 이루는 전쟁에 관한 묘사는 잔인하고 참혹하다. 죽고 죽이는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죽어간다. 적군에 의해서 학살과 강간, 약탈이 공식처럼 적용되는 점령된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핏물이 강을 이루는 아비규환 아수라장의 상황은 극도로 절제된 리비우스만의 문장으로 정련된다. 그러나 적나라한 전쟁의 묘사만으로 책 한 권을 채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흥미로운 특징은 저자 리비우스가 독자들을 위해 끔찍하고 처참한 전쟁의 내러티브 속 사이마다 마치 하나의 단서와 같이 코드화된 교훈들을 숨겨놓았다는 점이다.

당대 파비우스라는 장군은 한니발과의 전면전을 회피하며 지연전술을 펼침으로써 다수의 로마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나 역사는 파죽지세로 몰고 들어오는 한니발을 맞아 전면전보다는 시간을 벌어 로마가 향후 전쟁을 대비할 수 있도록 했던 파비우스의 선견지명과 전략을 옳게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파비우스의 후임 장군이었던 바로와 파울루스는 전면전을 피하라고 조언하는 파비우스의 말을 흘려들은 채 겁쟁이라는 오명보다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맞아 전면전을 치른다. 그리고 결과는 사령관 파울루스 포함 로마군 5만 명 전멸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성적표였고, 이 전투가 바로 오명으로 회자되는 칸나이 대참패이다. 젊은 혈기로 영광을 탐하며 전면전을 고수했던 후배 장군들에게 파비우스는 아래와 같은 금언을 남겼다. 진정한 영광은 영광을 경멸하는 자의 것이야... p181

B.C. 214년 전쟁이 장기화되고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까지 발발하며 전선이 두 개로 확대되고 고착화되면서 로마의 재정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닥을 드러낸 국고를 바라보며 로마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노예 병사들에 대한 몸값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받지 않겠다는 노예의 원주인들, 로마시에 건물과 말 등을 수주하던 상인들의 계약금 미청구, 기사나 백인대장과 같은 장교들의 급여 미수령 등이 그것이다. 시민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된 이런 관대한 행동은 전장의 군인에게도 퍼져 나갔다. 기사나 백인대장 중에 급여를 받는 사람은 없었고, 혹시 있다면 용병이라 불리며 경멸당했다. p343

노블레스 오블리쥬, 귀족들 또한 나라의 어려운 재정 상황을 모른체하지 않았다.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사유 재산인 금, 은, 동화, 본인과 아내, 아이들의 반지며 각종 악세사리를 기꺼이 국고에 내놓음으로써 전쟁 자금을 마련했다. 나라가 건재하면 개인의 재산을 쉽게 지켜낼 것입니다. 하지만 공익을 저버리려고 한다면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도 헛된 일이 될 겁니다. p552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 본서는 분명 카르타고의 맹장 한니발과 로마의 덕장 스키피오의 대결 구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나는 1000페이가 넘는 벽돌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본서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봤다. 위대한 전쟁과 전투 뒤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그것이 생명이든 재물이든 자신의 것을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기꺼이 내던진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방대한 스케일의 전쟁 대서사시 속에서 위에 언급한 사소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는 저자 리비우스 사관의 독특성을 볼 때 그가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7년간의 죽고 죽이는 살상의 역사 속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면 그야말로 우문이다.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걸쭉한 진액과 같이 농축되어 있다. 재물과 명예,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영광을 갈망하는 세속적 야망이 한데 어우러져 악취를 풍긴다.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무장하지 않은 여자들과 아이들마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광기의 현장을 기술한 페이지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서로 간에 속고 속이는 전략적 두뇌 플레이의 장면 속에서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인간 간교함의 끝을 보게 된다. 어쩜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을 수가 있을까? 책을 읽으며 기록된 내용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2000년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로마사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사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젠틀하고 나이스하게 시대의 옷을 갈아입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탐욕의 가면을 쓰고 서로를 미워하며 상대방의 것을 뺏기 위해서 죽고 죽이는 야만과 광기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네거티브함 속에서 우리는 파비우스가 보여준 영광보다는 공의를 위한 겸손, 귀족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 스키피오라는 탁월한 장군이 가진 고양된 인덕과 고결한 인품, 한니발이라는 잔혹하지만 용맹스러운 장군이 가진 불굴의 용기와 같은 미덕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2018년 3월 리비우스 로마사 1권을 읽고 한 인터넷서점에 아래와 같은 기대평을 남긴 적이 있다.

로마의 역사를 교과서와 같은 건조함의 틀 속에서 건져내어 준 고마운 저작. 내러티브를 통한 통전적 관점에서 기술되어진 본서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로마라는 유럽 문명의 한 획을 그은 무게감 있는 역사의 주체를 결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다!

인간 군상의 모든 허와 실을 파헤친 리비우스 로마사의 마지막 권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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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 세계기독교고전 5
우골리노 지음, 박명곤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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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이하 생략)

 

이 거룩하고 성스러움이 묻어나는 문장은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법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드린 <평화의 기도>다. 중세 기독교 영성의 진수라 불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수사는 1182년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정규 교육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은 유복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이후 로마를 순례하는 도중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자신에게 주어질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한채 본격적인 수도사의 삶으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순결, 청빈을 삶의 가장 지고한 목표로 삼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끊임없이 고난과 고행 속에 던졌던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행적과 그를 따랐던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제자들의 삶의 흔적들은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문서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우골리노'형제가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의 신앙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기록한 책이 바로 본서 <성 프란체스코의 작은 꽃들>이다.

책은 서론을 제외하고 크게 총 6부로 나누어져있다. 성 프란체스코와 그의 첫 제자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주를 이루는 전반부와 프란체스코가 천사로부터 오상을 받는 장면, 주니퍼, 길레스 형제들의 행적 등이 기록된 중반부와 후반부의 구성이다. 자발적 헌신을 통한 믿음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동경했던 이들 수도사들은 청빈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깨끗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자신보다는 이웃의 삶을 염려하며 돌보는 모습을 통해서 진정한 성경적 이웃 사랑의 실천을 본인들의 삶의 지평 속에 풀어놓았다. 끊임없는 기도와 금욕, 고행은 이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무이자 신앙의 기쁨으로 드러났고, 이들의 이러한 깨끗하고 투명한 삶의 모습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들의 삶이 대중들에게 환영받고 숭앙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벌거벗음과 누추함의 모습은 이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대중들에게 항상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었으며 갖은 욕설과 비아냥의 희생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렇게 무지한 대중들에게 받는 손가락질과 업신여김은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하늘의 기쁨이었으며 행복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리뷰의 서두에서 <평화의 기도>를 짤막하게나마 소개한 이유는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세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리고 싶어서였다. 야만과 광기로 얼룩진 중세 암흑의 시대를 살아내었던 이들에게 반목과 투쟁이 아닌 화합과 상생을 위한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자신들의 삶이 그러한 고귀한 사명을 위해 도구로서 쓰이기를 갈망했다는 것은 세상의 부유함과 안락함을 버릴 수 있었던 이들 삶의 근본적 동기였으며 원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던 깊은 신앙과 경건 가운데서 샘솟았다.

프란체스코는 당시 문둥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어느 날 문둥 병자 중에서 유독 화를 잘 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수사들을 공격하고 모욕하며 욕지거리를 행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기에 마침내는 프란체스코가 그를 만났다. 그가 갖은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지만 프란체스코가 아랑곳 않고 약초를 넣은 물을 끓여서 이 배은망덕한 문둥 병자의 몸을 조용히 닦아주자 기적이 일어났다. 문둥 병자의 피부는 깨끗해졌으며 자신의 몸이 치유된 것을 확인한 병자는 프란체스코 앞에서 회개와 참회의 눈물을 쏟고 새사람이 되었다. 이렇듯 아무도 돌보기를 원치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프란체스코 수사는 영혼에 대한 연민을 가진 신자였다.

이외에도 프란체스코 수사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신앙적 미담은 본서에 가득하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기독교의 시대를 살다 갔던 사람이기에 당연히 프란체스코는 카톨릭의 성인으로 시성 된 인물이다. 그리고 이 책 또한 개신교보다는 카톨릭적인 색채가 강한 저작이다. 책의 내용 중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옥 교리와 마리아 몽천설, 오상, 자연스러운 카톨릭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 책의 시대적이며 종교적인 배경을 드러내준다. 나는 한 명의 평범한 개신교 신자로서 이 책을 펼쳐들고 읽으며 단순히 개신교와 카톨릭의 종교적 구분이나 교리적 차이가 아닌 프란체스코라는 비범한 역사적 인물과 그를 따랐던 제자들의 신앙의 모습이 보여주는 교훈에 집중했다.

피폐해진 인간성과 고갈된 인간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작금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던져 이웃의 삶을 보듬을 수 있었던 이 위대한 인물들의 삶은 지금을 살아가는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선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개신교와 카톨릭의 구분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현대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가장 높고 고결한 신앙적 덕목이 아닐 수 없다. 항상 그렇듯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19라는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감내하며 육체적 아픔을 견디고 있다. 자기 부인과 겸손, 타자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필요한 시대,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듯 지난하기만 한 지금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이때,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프란체스코와 그의 제자들의 삶은 독자들의 영혼의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충분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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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라틴어 원전 완역본) - 최상의 공화국 형태와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섬에 관하여 현대지성 클래식 33
토머스 모어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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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새로운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도권 전세난이 심각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셋값에 집 없는 서민들의 애간장이 끓는다. 정부는 맞춤형 공공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공언했지만 널뛰듯 뛰어오르는 집값을 붙잡기에는 역부족 같다. 집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동산 천국이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쓰디쓴 현실을 뉴스 너머로 접하며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는데 책 제목이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유토피아>

나는 우습게도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모어'를 개신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서로 육두문자까지 날리며 설전을 벌였다는 야사(野史)로 먼저 접했다. 15세기 중후반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인문학자 '토머스 모어'의 저작 <유토피아>는 당시 중세 유럽의 정치와 경제, 종교, 문화 등을 풍자와 해학으로 고발한 허구적 소설이다. 마치 이후 출간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본서가 풍자와 해학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적절히 믹스시켜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저자인 모어는 본서에서 극중 화자인 '라파엘'이라는 탐험가를 만나 그를 통해 유토피아라는 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중세 영국과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국방, 종교의 일반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매우 독특한 유토피아 나라의 문물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별천지이며 결코 존재하기 어려운 그런 나라의 모습이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모어가 라파엘 씨를 만나서 그와 대화하며 현재 영국과 유럽의 정치와 경제, 사회 시스템이 가진 부조리와 불합리함에 대해 고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단편적인 예로 당시 소수의 귀족들은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고 소작농의 피땀으로 거둬들인 생산물을 가지고 놀고먹는 유한계급을 형성했다. 이후 양모 값이 폭등하자 귀족들은 농작물을 재배하던 농지를 전부 양을 키우는 목초지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소작농으로서 근근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던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대거 사회의 최빈곤층으로 전락해버리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런 합법적 불의라고 불리는 역설적 단어가 판을 쳤던 시대가 다름 아닌 저자인 모어가 살던 중세 영국과 유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시스템의 붕괴로 부랑자와 거지가 되어버린 수많은 농민들은 이윽고 생사의 코너로 몰리게 되고 급기야는 절도범이 되어 범죄를 저지르다가 붙잡혀서 교수형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모어는 1권에서 이렇게 당시 영국과 유럽에서 자행되었던 사회적 불의에 대해 일갈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2부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토피아에 대해서 서술하기 시작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얼토당토 할 만큼 파격적이다. 우선적으로 이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유재산의 부정이다. 모든 국민들에게 있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은 없다.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경제 시스템이 이 나라를 이끄는 근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재산을 갖기 위해서 머리 터져라 싸울 필요도 없고 열심히 일해서 거둬들인 수확은 모든 국민이 동일하게 분배하고 사용하기에 어느 사회에서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빈부의 격차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정치인들은 시민들 가운데서 선발되는데 정치인들의 기본적 인성이 너무나 고결하고 빼어나 국민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 결코 불의와 부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청렴결백함과 공의와 공정함으로 행한다.

 

 

 

1부와 2부의 내용을 극명하게 대조시킴으로서 현실 정치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공정함, 불의한 모습을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만든 모어의 문학적 탁월함이 엿보인다. 더불어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 집행관 대리라는 그의 직업적 이력이 돋보이는 저작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발견할 수 있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유토피아'라는 책의 제목이 가지는 어휘의 의미인데 헬라어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허구성이다. 사유재산 없이 공동분배를 행하며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가족처럼 돌보고 관용과 사랑이 넘쳐나는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나라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느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나라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팩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서 인간 이성에 대한 동경과 무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어는 이러한 나라를 꿈꾼 것 같다. 넘쳐나는 부랑자와 거지, 극명하게 갈린 빈부의 격차, 허영심과 오만의 팽배, 극단적인 법의 집행과 국가 권력의 남용 등을 바라보며 이처럼 모든 불의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이 개혁되기를 바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모어 자신도 책의 말미에 자신의 바람과 이야기가 결코 현실 세계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기독교가 가진 성경적 가치를 어느 정도 녹여내려 한 흔적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결국은 유토피아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인간 본성의 타락이라는 원죄의 문제로 귀결된다.

 

책의 내용 중 모어는 작중 화자인 라파엘 씨의 입을 빌려 왜 유토피아가 불가능한 지에 관한 가장 근본적 이유를 내비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탐욕, 그중에서도 '과시욕'에 대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를 따지는 소유욕의 문제보다 더 부각되는 것은 바로 남이 나보다 얼마나 덜 가졌느냐를 통한 비교우위로 인한 자기 자랑이라는 극도의 쾌감을 만끽하고자 하는 타락한 본성, 탐욕의 끝판왕 '과시욕', 남과의 무한 비교를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그 마성의 본성적 쾌락은 바로 사유 재산이라는 연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며 그렇기에 사유재산 부정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유토피아는 이름 그대로 결코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어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희망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는 자신의 바람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서두에서 꺼낸 가중되는 전세난과 더욱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점점 깊어지는 사회 계층 간의 골, 따뜻한 인정 대신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며 반목하는 사회 정서 등을 볼 때 나 또한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와 같은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 찬 본서가 가진 의의는 플라톤의 <국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며 이후 세대에게 있어서 바른 정치와 사회 구조에 대한 일종의 로드맵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지향하며 나아가야 할 행복은 중세 기독교적 가치가 가르쳤던 내세에서의 행복과 더불어 이 땅에서의 행복 또한 포함한다. 온전한 이상향, 완벽한 유토피아는 결코 이룰 수 없지만 500여 년 전 절대왕정 시대의 기로에서 최상의 공화국 형태를 꿈꾸며 인간애와 관용, 공정하고 공평한 바른 사회적 공익 실현을 독려한 본서의 가치는 21세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바른 지침이 되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귀하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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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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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 채 남대서양의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이들이 탄 구명보트에는 순무 통조림 두 개뿐 마실 물도 없었다. 선장과 일등 항해사, 일반 선원 그리고 배의 급사로서 잡무를 보던 열일곱 살 소년 한 명으로 구성된 난파자들은 순무 통조림과 운 좋게 잡은 바다거북 한 마리를 가지고 연명하며 구조를 기다렸다. 이후 여드레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잡무를 보던 소년은 주위의 충고를 무시한 채 바닷물을 먹고 병에 걸려 구명보트 한켠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19일의 시간이 지나가던 어느 날 선장은 일등 항해사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후 날카로운 주머니칼로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있는 열일곱 살 소년의 경정맥 급소를 찔렀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의 남자들은 나흘간 소년의 살과 피로 연명했다. 난파 24일째 되는 날 드디어 배가 나타났고, 이들 세 명은 모두 구조되었으며 영국으로 송환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사 직전에 있었던 세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한 명의 목숨을 빼앗아 인육으로 연명한 이들에 대해서 당신이 판사라면 어떠한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위의 이야기는 10년 전 출간되어 우리나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최대다수의 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 챕터에 나오는 실화이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바로 우리가 학창 시절 도덕, 윤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었을 법한 용어인 공리주의를 다룬 일종의 윤리 철학서다. 공리주의하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너무나 익숙한 명제가 떠오른다. 이는 보통 행복을 양적으로 평가하고 이해한 '제러미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를 대표하는 말이다. 개인과 소수의 권리와 이익을 대변하기에는 사실 부족함이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와는 달리 수정된 공리주의로서 질적 공리주의를 표방한 사람이 벤담의 제자이며 이 책 <공리주의>의 저자인 영국의 철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다.

공리주의는 utility(효용, 유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의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는 개인의 쾌락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사상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중요한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데 행복은 쾌락을 증진시키며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공리주의는 쾌락을 계량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나뉜다. 양적 공리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소수의 의견이나 권익이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반면 수정된 공리주의로서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밀은 행복을 나만의 행복으로 국한시키지 않았기에 나의 행복과 당신의 행복 모두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고려했다. 그렇기에 밀에게 있어서 스승인 벤담이 주장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도덕 행위자 자신만의 행복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가 느낄 수 있는 최대행복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전체의 행복인 일반 행복이 바로 모든 인간 행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몇 해 전 현대지성에서 밀의 <자유론>이 출간되어 완독한 경험이 있다. 개인의 자유는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떠한 제약도 없이 최대한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영미권 최고의 고전을 접하며 마음속 깊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이 각인되었었다.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서 밀의 또 다른 대표작 <공리주의>를 읽으며 다시금 밀의 시대를 읽는 혜안과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19세기 영국이라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당시 시대상에 비춰볼 때 개개인의 동등한 행복보다는 산업화로 인해서 부를 획득한 소위 유한계급들만의 행복이 추구되었을 시대에 밀의 공리주의는 매우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다시 말해서 소수의 가진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대한 추구를 말 그대로 최대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동등하게 누리는 것만이 진정한 공리이며 고상한 도덕적 규범임을 설파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밀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급진적 성향의 선구자와 같은 인물이었을지도 짐작하게 된다.

밀은 행복과 만족을 구분했고 행복이 만족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말속에는 바로 이러한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행복과 만족의 상관관계가 함축되어 있다. 더불어 밀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우월하며 고상하다고 말했다. 나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있어서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통한 행복과 만족의 결과는 고작 금요일 심야에 안락한 소파에 반쯤 기대고 누워서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볼 것인가(육체적 쾌락) 아니면 내 방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 쌓여 있는 책들을 완독해 갈 것인가(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와 같은 하찮은 것들이다. 그렇기에 밀이 이 책에서 말하는 공리주의는 사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쉽사리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 속에서 지각과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무를 가진다면 본서는 반드시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 고전이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서평의 서두에서 말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난파된 세 명의 남자가 한 명의 소년을 죽이고 그의 살과 피로 연명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을 논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이 판사라면 당신은 어떠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배의 급사로 일한 소년은 고아이다. 그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은 없으며 그는 당시 바닷물을 마시고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선원들은 모두 다 영국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굶어죽게 된다면 많은 가족들이 절망과 슬픔 속에 한평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밀은 책에서 사회적 공리와 개인적 공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자유론>까지 집필했던 밀은 자유와 공리의 상관관계를 항상 염두에 둔 듯하다. 그는 허용될 수 있는 불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사회적 공리와 개인적 공리가 충돌할 때 개인이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음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제한과 한계를 전제하며 전체적인 밀의 의도는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지향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먼저 알게 된 공리주의를 밀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한 일주일의 시간이었다. 논란도 많고 반론도 팽배했던 도덕 철학 사상의 알쏭달쏭함이 한 주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찌 되었든 한번 읽고 꽂아두기에는 나의 이해력이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서가에 안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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