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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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위용을 뽐냈던 위대한 제국 로마의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 가운데 <리비우스 로마사>는 단연 독보적인 저작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역사서가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책을 기록한 사가의 삶과 역사적 사건의 시간 간극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유만 두고 보더라도 기원 전후 로마라는 동시대를 살았던 저자 '티투스 리비우스'가 써 내려간 본서는 현장성에 있어 여타 현대에 기록된 로마사 저작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총 4권으로 기획된 본서의 전작 1, 2권을 완독했던 터라 3권을 내심 기대했다. 천년 로마의 시작, 왕정과 공화정이라는 정치 체제의 변화를 다룬 1권에 이어서 로마를 둘러싼 다양한 도시 국가들과의 크고 작은 분쟁을 통한 부침 속에서 어떻게 로마가 국가로서의 면모를 확립해 갔는지에 대한 사실들이 흥미롭게 기록된 2권을 끝내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게 된 3권은 네 권의 시리즈 중 가히 백미라 칭할 수 있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등장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다.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의 대부분 아니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한니발 전쟁기는 책의 분량만큼 방대한 스케일을 다룬 블록버스터와 같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박진감 넘치는 전쟁 묘사와 더불어 수려하지만 절제된 문장의 아름다움이 리비우스라는 로마의 탁월한 역사가에 의해서 빼곡히 수놓아져 있다.

3권이 두 권의 전작과 확연히 다른 점 한 가지는 플롯 자체가 복잡하지 않고 간결하다는 점이다. 카르타고와 로마라는 당대 최강국 간의 다툼 속에서 한니발이라는 명불허전의 맹장과 스키피오라는 불세출 영웅으로 대변되는 인물 간의 대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 하다. 또한 3권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내용의 묘사가 상당히 회화적이라는 데 있다. 눈 덮인 알프스산맥의 협곡을 넘는 카르타고 군의 모습이나 유럽인들에게는 생소했을 코끼리가 전장을 누비며 로마의 전열을 흐트러 놓는 장면 등은 마치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 독자의 상상력과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반면 내러티브의 주를 이루는 전쟁에 관한 묘사는 잔인하고 참혹하다. 죽고 죽이는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죽어간다. 적군에 의해서 학살과 강간, 약탈이 공식처럼 적용되는 점령된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핏물이 강을 이루는 아비규환 아수라장의 상황은 극도로 절제된 리비우스만의 문장으로 정련된다. 그러나 적나라한 전쟁의 묘사만으로 책 한 권을 채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자 흥미로운 특징은 저자 리비우스가 독자들을 위해 끔찍하고 처참한 전쟁의 내러티브 속 사이마다 마치 하나의 단서와 같이 코드화된 교훈들을 숨겨놓았다는 점이다.

당대 파비우스라는 장군은 한니발과의 전면전을 회피하며 지연전술을 펼침으로써 다수의 로마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나 역사는 파죽지세로 몰고 들어오는 한니발을 맞아 전면전보다는 시간을 벌어 로마가 향후 전쟁을 대비할 수 있도록 했던 파비우스의 선견지명과 전략을 옳게 평가했다. 그러나 당시 파비우스의 후임 장군이었던 바로와 파울루스는 전면전을 피하라고 조언하는 파비우스의 말을 흘려들은 채 겁쟁이라는 오명보다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을 맞아 전면전을 치른다. 그리고 결과는 사령관 파울루스 포함 로마군 5만 명 전멸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성적표였고, 이 전투가 바로 오명으로 회자되는 칸나이 대참패이다. 젊은 혈기로 영광을 탐하며 전면전을 고수했던 후배 장군들에게 파비우스는 아래와 같은 금언을 남겼다. 진정한 영광은 영광을 경멸하는 자의 것이야... p181

B.C. 214년 전쟁이 장기화되고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까지 발발하며 전선이 두 개로 확대되고 고착화되면서 로마의 재정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도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닥을 드러낸 국고를 바라보며 로마 시민들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은 가히 놀랍기만 하다. 노예 병사들에 대한 몸값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받지 않겠다는 노예의 원주인들, 로마시에 건물과 말 등을 수주하던 상인들의 계약금 미청구, 기사나 백인대장과 같은 장교들의 급여 미수령 등이 그것이다. 시민 개인의 차원에서 시작된 이런 관대한 행동은 전장의 군인에게도 퍼져 나갔다. 기사나 백인대장 중에 급여를 받는 사람은 없었고, 혹시 있다면 용병이라 불리며 경멸당했다. p343

노블레스 오블리쥬, 귀족들 또한 나라의 어려운 재정 상황을 모른체하지 않았다.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의 사유 재산인 금, 은, 동화, 본인과 아내, 아이들의 반지며 각종 악세사리를 기꺼이 국고에 내놓음으로써 전쟁 자금을 마련했다. 나라가 건재하면 개인의 재산을 쉽게 지켜낼 것입니다. 하지만 공익을 저버리려고 한다면 자기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도 헛된 일이 될 겁니다. p552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 본서는 분명 카르타고의 맹장 한니발과 로마의 덕장 스키피오의 대결 구도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나는 1000페이가 넘는 벽돌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본서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봤다. 위대한 전쟁과 전투 뒤에는 이름도 빛도 없이 그것이 생명이든 재물이든 자신의 것을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기꺼이 내던진 수많은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방대한 스케일의 전쟁 대서사시 속에서 위에 언급한 사소한 에피소드를 언급하고 있는 저자 리비우스 사관의 독특성을 볼 때 그가 이러한 부분을 간과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7년간의 죽고 죽이는 살상의 역사 속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면 그야말로 우문이다. 인간사의 모든 희로애락이 이 한 권의 책 속에 걸쭉한 진액과 같이 농축되어 있다. 재물과 명예, 권력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영광을 갈망하는 세속적 야망이 한데 어우러져 악취를 풍긴다.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무장하지 않은 여자들과 아이들마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광기의 현장을 기술한 페이지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서로 간에 속고 속이는 전략적 두뇌 플레이의 장면 속에서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인간 간교함의 끝을 보게 된다. 어쩜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을 수가 있을까? 책을 읽으며 기록된 내용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2000년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로마사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사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젠틀하고 나이스하게 시대의 옷을 갈아입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탐욕의 가면을 쓰고 서로를 미워하며 상대방의 것을 뺏기 위해서 죽고 죽이는 야만과 광기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네거티브함 속에서 우리는 파비우스가 보여준 영광보다는 공의를 위한 겸손, 귀족들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 스키피오라는 탁월한 장군이 가진 고양된 인덕과 고결한 인품, 한니발이라는 잔혹하지만 용맹스러운 장군이 가진 불굴의 용기와 같은 미덕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2018년 3월 리비우스 로마사 1권을 읽고 한 인터넷서점에 아래와 같은 기대평을 남긴 적이 있다.

로마의 역사를 교과서와 같은 건조함의 틀 속에서 건져내어 준 고마운 저작. 내러티브를 통한 통전적 관점에서 기술되어진 본서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로마라는 유럽 문명의 한 획을 그은 무게감 있는 역사의 주체를 결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다!

인간 군상의 모든 허와 실을 파헤친 리비우스 로마사의 마지막 권을 기대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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