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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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특히 여름이면 TV를 통해 항상 납량특집 '전설의 고향' 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구미호, 처녀귀신, 덕대골 등등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도 그 끊을 수 없는 호기심에 실눈을 뜨고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보통 우리나라에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각 지방의 전설과 민담을 드라마로 각색하여 만든 연속 사극물이었는데 그 인기가 상당히 높아서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프로그램이었다. 오랜시간 입에서 입으로 또는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온 전설과 민담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전설과 민담이 가지는 그 신화적 요소 때문이다. 꼬리가 아홉개 달린 여우 귀신, 밤마다 나타나서 새롭게 부임한 고을 원님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한(恨)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 내 다리 내놓으라고 외치며 쫓아오는 산 송장까지 현실과는 동떨어지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운 신화적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전설과 민담, 신화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이러한 신화를 바탕으로 근 십여년 사이에 전 세계의 영화팬들을 열광시킨 한편의 시리즈물 영화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누구나 알고 있는 어벤져스 시리즈이다. 미국의 마블 코믹스에서 탄생시킨 애니메이션이 영화로 제작되어 매년 시리즈물로 개봉되면서 전 세계 영화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영화 시리즈는 캡틴 아메리카, 헐크, 아이언맨, 블랙위도우, 스파이더맨, 호크아이,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팬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 셀 수 없이 많은 슈퍼 히어로들이 등장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절대악과 싸워서 평화를 지킨다는 전형적인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그리는 액션 블록버스터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블 세계관이라 불리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공 히어로들이 활동하는 주 무대와 배경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의 시간과 공간적 배경 속에 중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처음부터 정주행해서 관람하지 않은 관객은 도대체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즉 하나의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지구와 우주, 신들의 천상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히어로들이 등장하여 씨줄과 날줄 형식으로 한편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간다.

이러한 마블 세계관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신들의 천상계 속에서 등장하는 히어로 중 한명인 토르와 오딘, 로키와 같은 신들의 원형적인 이야기는 다름아닌 북유럽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책 <북유럽 신화>이다. 마블 어벤져스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의 대다수는 아마 영화 '토르'의 배경이 북유럽 신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소위 말하는 스칸디나비아반도 주변, 넓게는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너무나 유명한 바이킹족의 후손들이다. 이 바이킹족을 통해 오랜 세월 그들의 정신과 사상의 기원이며 원류가 된 신화적 스토리는 또 다른 유럽의 신화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와 필적할 만한 탄탄한 설화적 구성을 갖는다. 그 안에서 북유럽 바이킹의 후예는 조상들의 얼과 용맹스런 기개를 배웠고, 삶의 지혜와 교훈을 전수받는다. 책을 펼쳐들고 독자는 우선 서론부에서 북유럽의 시공간적 배경, 그들의 우주관, 신들에 관한 이야기같은 사전 지식을 통해 북유럽 신화가 말하는 전체적이고 개괄적인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그들의 신화적 배경을 4개의 수평면적인 공간으로 나눈다. 신들이 거주하는 아스가르드, 인간들의 세상인 미드가르드, 거인들의 세상인 요툰하임 그리고 죽은자의 세상인 니플하임이 그곳이다. 이 안에서 신들과 거인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등의 마치 인간사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일상을 동일하게 선보인다. 천지창조와 최초의 신과 인간, 거인들이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한가지 어렴풋이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유럽의 지배적 종교로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 책의 내용 속에서 알게 모르게 희미한 광채로서 비춰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억측이며 끼워맞추기식 해석일 수 있기에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천국에 비견될 신들의 세상 아스가르드, 온 세상을 지탱하는 나무 이그드라실, 최초의 남녀 인간, 신 중의 최고 신 오딘과 그의 아들 토르, 사탄과 같은 존재인 비열한 신 루키, 지옥에 비견될만한 죽은 자의 세상 니플하임과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전사들인 에인헤르자르 그리고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과 비견되는 라그나로크까지 기독교적 세계관과 너무나 비슷하게 싱크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내내 더욱 더 흥미롭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독자는 단지 본서가 가지는 그 신화적이고 흥미를 유발하는 재미적 요소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전해내려오는 무형의 공통적인 가치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전설과 민담, 신화가 말하는 선과 악의 대립이며 선은 필연적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는 권선징악적 요소이며 교훈이다. 또한 다양한 신들은 어떤 때에는 믿고 협력하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배신과 반목을 거듭하며 뺏고 빼앗기며 속고 속이는 인간사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 추잡스럽고 탐욕스러운 애증의 행위들을 가감없이 시전한다. 더불어 배우자가 있음에도 다른 신들 또는 거인들과 통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음으로서 얼키고 설켜버린 가족관계는 신화가 가지는 그 도덕적 한계없음의 끝을 보여줌으로서 실제 인간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그 복잡 미묘한 관계와 사회적 규범의 무력함을 풍자하기도 한다.

신화와 전설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억울한 피해자들이 들끓었던 시대에는 원한에 사무친 원귀들이 구천을 떠돌며 자신을 해한 권력자들에게 원수를 갚는다거나 아니면 지극한 효심으로 늙은 부모를 공양한 효부들이 많던 시대에는 효심 가득한 이들에게 하늘이 감동하여 천혜의 선물을 내려준다는 전설과 민담이 전해내려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강력한 신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그보다 못한 인간들을 비롯해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인족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싸워나간다는 설화적 스토리텔링이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녹아져 정형화 된 북유럽 신화 또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와 같은 바이킹족이 중남부 유럽을 점령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민족적 정기와 정체성, 약탈 민족의 기개와 용기 등을 신화 속에서 찾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벤져스, 그중에서도 토르 시리즈를 통해 접한 마블 세계관의 원형이 되는 본서를 읽으며 이 후 등장하게 될 마블 시리즈의 개봉작들이 더욱 더 궁금해진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항상 느꼈던 점 한가지는 어벤져스 시리즈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구상하고 얼개를 구성한 마블의 기획력에 다시금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시공간이 다양하게 중첩된 세계관의 설정 자체는 천재적이며 얼핏보면 결코 연관성 없어 보이는 다양한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시리즈물을 하나의 완벽한 플롯으로 끌고가는 마블의 뒷심 가득한 저력, 거기에 덧붙여서 전 세계 영화팬들의 팬심을 사로잡는 그들의 판타스틱한 마케팅력까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디즈니 사단만이 가지는 브랜드 파워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모르긴 몰라도 마블의 세계관을 구성한 기획자는 분명 역사와 인문학 분야의 해박한 전문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토르 3 : 라그나로크>에 이어 토르 4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마치 학생이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 예습을 하듯이 마블의 팬이라면 토르 4편을 기다리며 먼저 본서 <북유럽 신화>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더 흥미롭게 마블 시리즈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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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회사다 : 진리의 보고 - 초대교회사 편 이것이 교회사다 시리즈
라은성 지음 / 페텔(PTL)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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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가장 좋아했던 과목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함 없이 역사 과목인 국사와 세계사를 꼽는다. 역사 과목을 너무나 좋아해서 어린시절 한때 장래희망이 대학의 사학과에 들어가서 역사학자가 되는 야무진 꿈도 꾸었다. 또한 중학교 때는 방학 과제물로 고조선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주요한 역사적 사료들을 잡지와 신문 등에서 찾아내어 스프링노트 한권에 스크랩하고 빈칸에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코멘트로 기술하여 과제로 제출하는 등의 역사 과목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보면 기겁할만한 그런 일들을 즐겨 시전하곤 했다. 왜냐하면 역사를 공부하고 만날때마다 그 안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의 생각과 삶의 모습 속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 이후 살다갈 후손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기에 역사는 내게 항상 설레임과 떨림의 대상이었다. 역사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길을 찾는다. 지금도 유적지등을 방문하면 남들은 무심히 지나치는 사적지 안내판의 깨알같은 글씨를 눈이 빠져라 정독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함께 간 일행은 멈춰 선 나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러한 역사 마니아 요즘 아이들의 시쳇말로 역사충이라 불릴법한 나의 이러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개신교 신자로서 만나게 되는 교회사에 대한 관심으로 고스란히 옮겨간다. 오랜시간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마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자들은 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전무할 것이다. 역사라는 학문 자체가 가져다주는 그 주제의 건조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대다수의 교회는 교회사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교리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절 성도들에게 교회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사와 교리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바른 경건생활과 신앙교육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교회들은 성도들의 입맛에 맞춰 갖가지 흥미로운 프로그램과 세미나 등에만 집중한다.

언급했듯이 교회사라고 하면 무엇인가 고리타분한 느낌이 들고, 신학 공부를 하는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서는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역사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려주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다. 특별히 이 책은 총신대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라은성 교수의 '이것이 교회사다' 시리즈 중 AD 1~5C까지 초대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파헤친 내용으로 가득한데 '진리의 보고' 라는 책의 부제와 같이 그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귀중한 역사적 사실과 진리가 가득 담긴 보물상자와 같다.

저자는 초대교회의 역사는 4가지의 큰 기둥으로 이루어져있고, 이 큰 틀을 살펴보는 것이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의 역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임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로마제국, 핍박, 교부들, 이단에 관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로마제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강대국과 얽혀 있으며 그 안에서 수 많은 순교자들이 온 몸으로 받아낸 핍박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이러한 핍박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며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훼손시키는 각종 이단들에 대해서 변증하고 싸워갔던 믿음의 선배들 즉 교부들의 삶과 신앙, 그들의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한다. 또한 영지주의를 비롯한 각종 이단들의 발생, 그들의 주장과 정통신앙과의 차이와 바른 진리에 대한 견해는 초대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너무나 귀한 보석같은 진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빼곡한 본서를 펼쳐들고 가슴떨리는 행복감을 느꼈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복음전파를 위해 남겨진 12명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순교한 직후인 1세기어간 이제 막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의 직속(?)가르침을 받았던 12사도의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 속사도(사도적 교부)들의 시대는 로마시대와 맞물린다. 로마제국 다수의 미치광이 황제들의 잔인하고 잔혹한 기독교 박해를 통해 초대교회는 끔찍한 핍박을 온몸으로 받아내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 진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한 교부들인 변증가들이 등장한다.

이후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 공포됨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길고 지난한 박해가 종식되어지고,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지만 고난이 사라진 교회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 기독교에 대한 여러 이단들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진리와 순수성을 오염시키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는 영지주의 이단이 있다. 이러한 이단에 맞서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아타나시오스같은 교부들은 자신의 전 삶을 다해 싸워 마침내 초대교회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정통신앙을 지켜낸다. 이후 핍박이 사라진 교회는 정교유착과 세속화로 말미암아 빠르게 타락해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피해 개인의 신앙과 경건을 지켜내기 위해 발생한 것이 바로 본서의 마지막 주제이며 중세교회사의 다리가 되어지는 수도원운동이다.

저자는 성도들이 교회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남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뽑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사를 통해 바른 기독교적 역사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흘러온 교회의 역사와 그 안에서 정립되어져 갔던 성경에 기반한 바른 교리적 지식을 올바른 시각으로 접하고 배우게 될 때에만이 신자의 신앙과 삶은 어떠한 주변의 상황과 고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흔들림없이 믿음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을 수 있으며 더불어 지금의 한국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수 많은 난제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 또한 성경과 함께 교회 역사 속에서 찾아갈 수 있다.

로마황제들에 의해 아무 죄도 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표현하기 힘든 고문과 끔찍한 방법을 통해 죽임을 당하면서도 신앙과 믿음을 고백했던 수 많은 신자들의 삶과 각종 이단들로부터 기독교 진리의 체계를 세우고 파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초개와 같이 던졌던 많은 교부들의 신앙과 삶을 보면서 마음 속 깊은 감동과 함께 숙연해진다. 더불어 믿음의 선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 가운데서 그들이 목숨 걸고 지켜냈던 기독교 진리와 신앙을 누리고 있는 나의 안일한 태도를 점검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기껏해야 고민하는 문제라는 것이 고작 부동산 시세 폭락, 주식이 곤두박질쳐서 반토막 난 것, 자녀가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지원할 수능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과 같은 싸구려 고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가정, 교회, 직장,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서 만나게 되는 얽히고 설킨 수 많은 인간관계와 재정의 문제들과 같은 시련의 바람이 한번 몰아닥치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추풍낙엽과 같이 믿음 안에서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평안했을 때는 그토록 열심히 주님을 사랑한다 외쳤던 그 신앙의 고백과 믿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채 말이다.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아파하지 말고 무관심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이야기 또한 아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고통과 고난 앞에서 아파하고 낙심할 수 있다. 십수년간 신앙생활했지만 여전히 작은 관계의 갈등 속에서 재정의 문제 속에서 자녀의 문제 속에서 배우자와의 문제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어 허우적 대는 신자들의 그 기반 없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의미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눈 앞에서 한껏 굶주린 맹견들에게 갈가리 찢겨 죽는 어린 자녀들의 처참한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다. 또한 원형경기장에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한 후 맹수들에게 뼈마디까지 씹혀 먹히는 극렬한 고통의 순간을 담담히 받아냈다. 이처럼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고수했던 초대교회 신앙 선배들의 그 결연한 모습 앞에 위에 언급한 우리의 죽을 것만 같은 고민들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고 초라하기만 한지...

믿음의 시련 앞에서 결코 물러섬이나 후패함이 없는 굳건하고 견고하여 안정감있는 신자의 삶은 우리의 귀에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부드러운 말씀이나 흥미를 유발하는 프로그램 위주의 훈련이나 세미나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교리적 가르침과 성령님의 은혜, 무엇보다 신자가 바른 기독교 역사관을 견지할 때 신자는 정통신앙 안에서 건강하고 강인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사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반추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기능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훌륭한 이정표의 역할까지 톡톡히 감당한다.

숨을 고르고 이제 그 진리의 보고들이 어떻게 묻어둔 진리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본서의 후속편인 중세교회사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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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 : 소크라테스부터 피터 싱어까지 -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다
나이절 워버턴 지음, 정미화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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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태동하고 수 많은 인간들이 사회 속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감으로서 인류는 단 하루도 평안함이 없는 애욕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이는 마치 결코 끝날 것만 같지 않은 영겁의 연속이다. 이러한 탐욕과 혼돈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짐승군상' 들을 만나게 된다. 최근 불거진 한일 양국 갈등의 회오리 바람을 타고 마치 노이즈 마케팅과 같은 천박함을 통해 자신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버린 짐승의 민낯을 본다. 학자적 노력과 숙고의 결과로 써 내려갔다 하지만 그가 진정 깊이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듯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단 하나의 명확한 기준은 바로 그 주체가 생각하는 존재이냐 아니냐의 한끝 차이다. 인류의 역사는 생각하는 자들과 생각하지 않는 자들로 대변되어졌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생각하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지배받아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각은 이렇게 중요하다. 생각하는 주체로서 내가 누구이고 나를 둘러싼 이 세계는 무엇이며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와 같은 생각의 끝을 부여잡지 않는다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먹고 싸는 것에 있어 별반 다름이 없다. 영국의 대중철학자 '나이절 워버턴'의 <철학의 역사>는 이러한 생각의 문제를 기반으로 하는 철학에 대한 지적 담론이다.

철학의 문외한인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철학은 뭔가 머나먼 이국의 언어라는 이질적 정서로 다가온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던 우리의 부모세대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 삐긋하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기에 미친듯이 내달리는 이 동물의 왕국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철학이 말하는 주제는 정서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서평의 서두에서도 잠간 언급했듯이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가장 큰 기준은 바로 주체로서 생각을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었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사고의 의미를 다룬 철학은 어찌보면 그 먹고 사는 문제와 약육강식으로 점철된 이 야만의 세상 속에서 선행되었어야 할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되는 가치이다.

본서 <철학의 역사>는 이렇게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서양철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총 40개의 chapter로 나누어서 시대순으로 나열하여 기술한 말 그대로 철학의 역사를 다룬 저작이다. 저자는 고대 서양철학의 3인방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고대와 중세의 가교와 같았던 위대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보에티우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같은 중세철학자들과 학창시절 도덕 시간에 익히 들어왔던 중세와 근대의 가교와 같았던 데카르트, 스피노자, 파스칼, 루소, 로크, 볼테르 그리고 칸트, 헤겔, 벤담, 밀, 쇼펜하우어, 다윈, 키에르케고르, 니체, 막스,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수 많은 근대철학자들, 더불어 20세기의 사르트르, 아렌트, 쿤, 롤스, 싱어에 이르는 현대철학자까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본서가 가지는 특징은 그동안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철학 관련 책은 어렵다는 인식을 한방에 불식시켜주는 평이한 내용 전개이다. 시대 순으로 독자들이 꼭 알고 숙지할 필요가 있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을 선별했고, 그들의 주장과 사상을 철학의 문외한인 독자들이 알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최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상세하지만 난해하지 않도록 풀어 쓴 저자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흥미로운 일화를 곁들임과 동시에 어려운 철학적 용어들을 최대한 배제하였고, 가능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 쓰고자 애쓴 저자의 노력이 군데군데 엿보이기에 본서가 가지는 그 친절함에 흐믓한 미소를 짓게 된다.

소크라테스 이후 그의 제자 플라톤은 현상을 넘어 그 이면의 실재의 본질을 찾기 위한 철학적 사유를 진행했다. 그에게는 눈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고, 현상 너머 초월적 존재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과는 사상과 견해가 달랐다. 그는 인간 이성을 중요시 했으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자신의 스승들보다는 좀 더 객관적이었고, 실재적이었다. 이후 당대 최고의 지성인 스토아 학파는 인간 감정보다는 인간 이성의 힘을 강조하는 강인한 철학적 사조로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위대한 인물은 그들과 달리 신 존재에 대한 그의 강한 믿음을 천재적 지성의 능력을 바탕으로 서양사상사의 큰 수문을 열어젖히는 기염을 토한다. 중세 암흑기를 거쳐 다시 인간 이성의 탁월함을 강조하게 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발흥과 16세기 초 종교개혁, 17~18세기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 공리주의까지 인간 이성과 지성에 기반한 철학적 사유가 꽃을 피우게 된다.

이후 19세기 실존주의와 실용주의등을 통해서 인간 실존과 무의식의 문제 등을 발견하기 시작했는데 17세기 이후 근현대 철학의 큰 주류는 중세시대 신(神) 중심 철학, 기독교 신앙 중심의 사상과 결별 후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19세기 '종의 기원' 이라는 혁명적 이론의 등장을 거치며 과학기술과 인간 이성, 지성의 무한 신뢰라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시대 조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제 인류의 사고안에는 신의 도움은 필요없고, 인간 이성과 지성의 탁월한 능력만으로도 유토피아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제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인류적 재앙을 통해 인간 이성과 지성의 총아였던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살상무기들이 같은 인간을 그처럼 잔인하게 살해하는 도구들로 쓰여지는 장면을 눈 앞에서 목도한 인간들의 정신과 사고는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인류의 정신세계는 그야말로 정신적 공항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인류는 다시 한번 인간 실존의 문제를 직시하게 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자유와 인간 가치 실현의 정의적 문제들로 이어지는 20세기 시대 정신의 흐름으로 연결되었고, 그 흐름은 이제 21세기 최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대한 내용이 자꾸 나의 눈길을 책장 속에 멈추게 만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작을 통해서도 알려진 제 2차 세계대전 독일 나치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의 이야기를 통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주장한 아렌트의 경험이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다. 너무나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남성이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주범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조차 질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독일 패전후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하여 생활하다가 이스라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붙잡혀 예루살렘 법정에 선 그가 계속 되뇌였던 말은 "나는 오로지 상관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죄가 없다"라는 마치 앵무새와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악의 축으로서의 전체주의 국가가 한 사람의 사고기능과 영혼을 완전히 앗아감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거나 반추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믿기 힘든 사실에 대한 보고를 통해 결코 괴물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괴물로 전락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사고할 때만이 짐승과 구별된다. 어디가서 얼마짜리 음식을 먹고, 얼마나 크고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얼마짜리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가의 여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의 끈을 놓치 않고 자신이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내가 지금 하는 이 행위가 나와 타인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 지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생각의 퍼즐들을 맞추어갈 수 있을 정도의 사고의 능력과 가치를 일상에서 실행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과 사고를 독려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며 본서의 저자는 그러한 철학의 역사를 한 눈에 기술했다.

생각하지 않을 때 인간은 짐승이 된다. 사고와 사유를 멈출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너무나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았던 아이히만이 600만이라는 상상하기 어려운 생명의 숨통을 멎게한 괴물이 되었듯이 이 책을 읽는 우리 또한 생각하지 않을 때 동일한 짐승과 괴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렇기에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명제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직접 당하지 않았기에 샤머니즘적 사고체계 운운하며 망발을 책이랍시고 엮어 낸 생각하지 않는 짐승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아침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끝자락에 우리를 생각의 역사 속으로 초대하여 그 심오한 지적 향연 속에서 위대한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본서 <철학의 역사>를 만나게 될 때 더위에 지친 독자들의 지성은 한없이 고양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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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 대원앤북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초등학교 시절 오후 5시 30분 언저리의 시간만 되면 우리 모두를 조그마한 TV 앞으로 불러모았던 한편의 오래된 애니메이션 주제가이다. 만화영화의 흥겨운 주제가를 따라부르며 우리는 지난번 이야기에 이어 새롭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초집중하며 만화를 시청했고, 30분의 시간이 아쉽게도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 지 만화가 끝난 후의 여운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직 땅거미가 내려앉지 않은 동네 골목으로 신발을 꺽어신고 뛰어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우리네 아이들의 동심을 물들였던 그 추억의 애니메이션은 다름아닌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의 <빨강머리 앤>이다. 원래는 원작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영화로서 볼거리가 귀했던 당시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 하나다. 주근깨 투성이의 빨강머리를 가진 '앤 셜리'라는 고아 여자아이가 실수로 독신 남매의 집으로 오게 되면서 펼쳐지는 일종의 성장 스토리를 다룬 작품이다. 빨강머리를 가진 앤은 주제가의 가사처럼 예쁘지도 않고, 그저 그런 평범한 소녀이다. 그러나 앤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더 많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장점을 통해 다른 이들과는 확연한 삶의 차이를 보이는 매우 특이(?)하지만 사랑스러운 매력 덩어리 소녀이다.

앤의 장점 중 하나는 남들은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찻장 속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소녀의 이름을 지어주며 친구를 맺을 정도로 어찌보면 망상으로 여겨질 정도의 톡톡튀는 그녀의 상상력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앤은 그 탁월한 상상력을 토대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과 자연 속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창의성을 발휘한다. 앤의 눈에 들어 온 아름다운 초록색 지붕의 집과 가로수길, 아름다운 호수와 오솔길 등은 앤에 의해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너무나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 사물과 장소들은 그 이름에 걸맞는 생명력과 품위를 부여받는다. 자신의 주변을 깊은 관심과 사랑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코 이러한 상상력과 그에 연관된 이름들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상 너무나 잘 안다. 앤에게는 바로 이러한 독특한 창의성과 상상력이라는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본서는 이미 출판사에서 시리즈물로 기획된 책 중 한권으로서 앤 셜리가 고아원에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가 사는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오게 되는 처음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본서의 부제는 바로 이제 자신이 살아갈 이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숲의 길을 바라보며 앤이 붙여 준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바로 '기쁨의 하얀 길', 어쩌면 앤은 자신의 인생이 고아라는 어둡고 비참한 삶의 현실 속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기쁨의 하얀길을 걷는 행복한 인생으로 바뀔 것임을 스스로가 기대하고 상상한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공상과 상상에 힘입은 이야기를 조잘거리듯이 떠들어대는 앤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수다스럽고 경박스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쁨과 감정을 숨김없이 정직하게 대면하며 그것을 치장하지 않고 표현해 낼 줄 아는 앤의 모습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는 이 무감각함과 무감정의 메마른 세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지만 큰 파향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감정을 내면 깊이 묻어둔 채 가면을 쓴 포커페이스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앤 셜리야말로 우리의 왜곡되어지고 비뚤어진 감정과 삭막한 정서를 어루만지는 명약과 같은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본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어린 시절 TV를 통해 만난 빨강머리 앤의 애니메이션 원작의 명장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컬러판 문고답게 앤의 모습 하나하나는 결코 변한게 없었다. 그녀의 홍당무와 같은 머리색깔하며 항상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어두운 회색 계열의 단벌 원피스는 앤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화려하지 않고 예쁘지도 않은 한 소녀로 인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는 사물과 자연들이 행복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TV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앤 셜리가 가진 힘을 느낀다. 앤 자체는 보잘것 없는 존재였지만 그녀가 가진 내면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행복 바이러스를 전하는 행복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이끈다.

작은 책 한권으로 어린 시절 추억이 소환된다. 문고판 작은 책 한권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 책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힘은 더 경이롭다. 세상이 더 이상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자신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해버리는 작금의 세태, 내가 더 누려야만 하기에 다른 이들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게 여기며 살아가는 인간 말종의 시대 속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과 인간 정신을 가진 평범한 소녀의 삶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서 상처받은 이 시대를 위로하고 살아갈 힘과 용기를 공급하는 데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TV 종방 후 거의 4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왜 아직까지도 빨강머리 앤이 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고, 그녀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상존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앤이 가진 그 삶을 향한 무한긍정의 태도,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아라는 그 암울한 운명을 원망하며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직면하여 대면함으로서 그 운명의 굴레에 갇혀 있기를 거절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기쁨의 하얀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새하얀 도화지에 아름답게 채색하도록 이끈 앤 셜리 그녀가 가진 꺼지지 않는 삶을 향한 사랑과 애정, 용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되는 더위와 이어지는 여름 휴가의 계획 속에서 40여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여 기쁨과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단연 본서는 올 여름 우리의 휴가 도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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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이트 - 천일야화 현대지성 클래식 8
작자 미상 지음, 르네 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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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에는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 정서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해서 북유럽 신화, 이솝우화, 안데르센 동화, 탈무드, 우리나라의 흥부와놀부전 그리고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아라비안 나이트>까지 문화와 관습, 사람들의 삶의 모양은 다르지만 그 안에 인간 사회의 희노애락과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과 가르침을 담은 고전의 인문학적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아라비안 나이트하면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신밧드의 모험 등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린시절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렇게 가장 대표적이고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TV에서 방영되었던 것을 본 경험이 전부였던 내게 이번에 만나게 된 현대지성의 <아라비안 나이트>는 대표적이고 유명한 이야기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에게는 좀 덜 알려진 아라비안 나이트 원작의 다른 이야기들이 다수 수록되어있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책은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위에서도 잠간 언급한 것과 같이 유명한 이야기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이야기들은 모두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스토리들로서 읽는 내내 재미와 교훈을 선사하는데 있어서 결코 어느 책에도 뒤지지 않는 탁월함이 엿보이는 이야기책이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흔히 '천일야화'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1001일 밤에 들려진 이야기' 라는 의미로서 아리비안 나이트의 서막이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게끔 하는데에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키워드이다.

고대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황제인 샤리야르는 자신의 아내에게 배신을 당하고 난 이후 아내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자기만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새롭게 아내를 맞이하면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죽여버리는 악행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왕국의 수 많은 처녀들이 그렇게 하룻밤 왕비가 된 후 이튿날 아침에는 싸늘한 주검으로 궁전에서 나오게 되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그 나라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자청하여 황제의 아내가 되기로 결정한다. 황제의 아내가 된 첫날 밤 셰에라자드는 황제에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는 아내가 들려주는 너무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듣다가 가장 궁금해 할 대목에서 이야기가 다음날로 이어지게 되는 마치 주말연속극 클라이막스에서 "다음 이야기는 다음 주 이 시간에..."와 같은 감칠맛을 곁들인 아쉬움 한 스푼을 시전받게 된다. 이러니 황제가 어떻게 자신의 아내를 다음날 아침에 죽여버릴 수 있겠는가? 다음 이야기의 내용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 왕은 계속적으로 아내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내를 살려주게 되고, 그 이야기가 1001일밤 동안 계속되었다고 해서 본서는 <천일야화>라고 불린다.

그 천일야화 속 다양한 이야기들 중 몇가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신밧드의 모험, 알라딘과 요술램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들과 같은 이야기들로서 이들이 마치 옴니버스식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구성적으로 보아도 매우 흥미롭다. 마치 한편의 액자소설을 보는 것과 같다. 본서의 서문격인 셰에라자드 왕비의 이야기를 큰 틀로 그 안에 11개의 독립된 이야기들이 들어간다. 그러나 3장과 6장, 7장, 8장, 10장의 이야기들은 그 안에 또 세부적인 이야기들로 나눠진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존재하듯이 본서는 그 구성에 있어서도 남다르다.

어린 시절 TV앞에서 알라딘이 램프를 문질러서 램프의 요정 지니를 불러내어 소원을 말하는 장면이나 열려라! 참깨! 를 외치는 알리바바의 모습 속에서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동심의 시절 느끼지 못했던 원작을 통한 새로운 사실들과 교훈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만큼 이제 내가 사리를 분별하고, 세상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동심의 상상력을 세상의 사리판단과 맞바꿀 정도로 이미 세상의 온갖 때가 많이 묻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서를 읽는 독자가 만일 어린 시절 TV속으로 빠져들어갈 정도로 몰입하며 보았던 그 재미와 흥미로움 속에만 머물기를 원한다면 어쩌겠는가? 독자의 선택이니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본서를 통해 인간사의 숨겨진 의미와 교훈을 발견하는 것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한다면 독자는 우리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아라비안 나이트가 독자들에게 주는 새로운 가르침의 향연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인간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 한권의 책에는 인간의 희노애락과 권선징악, 흥망성쇠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 착한 행실과 깨끗한 마음, 끝없는 욕심과 탐욕이 공존하며 은혜와 배신이 대립각을 이룬다.

특별히 9장 아메드 왕자와 페리 바누 요정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욕심과 의심의 추잡한 마음에 대한 교훈을 발견한다. 자신의 착한 아들마저 자신의 왕권을 찬탈할 수 있는 잠재적 원수로 여기며 의심하는 아버지 왕의 그 타락되어져 가는 내면의 모습 속에서 인간 영혼의 그늘을 보게된다. 또한 10장 하룬 알 라시드 왕의 모험 이야기 속 이야기로 등장하는 바바 압달라는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 준 은인에게 사례를 한 재물마저도 아까워서 탐욕을 부리며 급기야는 그 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맹인이 되는 길을 선택함으로서 시력과 수 많은 부를 한꺼번에 잃고 맹인 거지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 바바 압달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바바 압달라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수 많은 탐욕스런 인간들 중에서 자신의 삶을 파멸에 이르도록 만드는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탐욕과 욕심의 끝판왕이라 칭할 만하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책의 전면에는 재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유혹과 탐심을 지닌 인간들이 수 없이 등장한다. 자족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탐욕은 징그럽기만하다. 남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의 인간들이 넘쳐난다.

책을 읽으며 어느 하나의 책이 가진 향기가 전해져 온다. 몇해전 읽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가 그것이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참배를 위한 일단의 참배객들이 노상에서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각자 흥미로운 짧막한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것이 책의 주요 줄거리이다. 본서와의 동일한 느낌은 바로 여과없는 인간군상의 민낯을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랑과 배신, 유혹과 탐욕, 믿음과 의심이라는 인간사에 있어 세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흐르는 주요 화두들은 두 책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제이다.

책을 덮으며 선행과 믿음, 신뢰, 자족할 줄 아는 마음과 같은 제대로 된 정상적인 인간들이 탑재하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인간성의 본질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린 시절 시간만 되면 우리를 TV 앞으로 이끌었던 아라비안 나이트의 대표적인 스토리 '알라딘과 요술램프' 가 영화로 제작되어 요즘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벌서 1000만 관객을 넘었을 정도로 평이 좋은가보다. 물론 나는 아직 못보았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원작의 인기 또한 상승해보길 기대한다. 원작 속 26편의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가지 물고기를 함께 잡아볼 수 있는 여유있는 여름 휴가 시즌을 보내는 것도 분명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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