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 기쁨의 하얀 길 편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 대원앤북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초등학교 시절 오후 5시 30분 언저리의 시간만 되면 우리 모두를 조그마한 TV 앞으로 불러모았던 한편의 오래된 애니메이션 주제가이다. 만화영화의 흥겨운 주제가를 따라부르며 우리는 지난번 이야기에 이어 새롭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 초집중하며 만화를 시청했고, 30분의 시간이 아쉽게도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 지 만화가 끝난 후의 여운과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직 땅거미가 내려앉지 않은 동네 골목으로 신발을 꺽어신고 뛰어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러한 우리네 아이들의 동심을 물들였던 그 추억의 애니메이션은 다름아닌 '루시 모드 몽고메리' 원작의 <빨강머리 앤>이다. 원래는 원작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제작된 만화 영화로서 볼거리가 귀했던 당시 어린이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 하나다. 주근깨 투성이의 빨강머리를 가진 '앤 셜리'라는 고아 여자아이가 실수로 독신 남매의 집으로 오게 되면서 펼쳐지는 일종의 성장 스토리를 다룬 작품이다. 빨강머리를 가진 앤은 주제가의 가사처럼 예쁘지도 않고, 그저 그런 평범한 소녀이다. 그러나 앤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더 많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장점을 통해 다른 이들과는 확연한 삶의 차이를 보이는 매우 특이(?)하지만 사랑스러운 매력 덩어리 소녀이다.

앤의 장점 중 하나는 남들은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찻장 속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른 소녀의 이름을 지어주며 친구를 맺을 정도로 어찌보면 망상으로 여겨질 정도의 톡톡튀는 그녀의 상상력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행복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또한 앤은 그 탁월한 상상력을 토대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과 자연 속에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창의성을 발휘한다. 앤의 눈에 들어 온 아름다운 초록색 지붕의 집과 가로수길, 아름다운 호수와 오솔길 등은 앤에 의해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너무나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 사물과 장소들은 그 이름에 걸맞는 생명력과 품위를 부여받는다. 자신의 주변을 깊은 관심과 사랑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결코 이러한 상상력과 그에 연관된 이름들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상 너무나 잘 안다. 앤에게는 바로 이러한 독특한 창의성과 상상력이라는 은사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본서는 이미 출판사에서 시리즈물로 기획된 책 중 한권으로서 앤 셜리가 고아원에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줌마가 사는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오게 되는 처음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본서의 부제는 바로 이제 자신이 살아갈 이 초록색 지붕의 집으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숲의 길을 바라보며 앤이 붙여 준 사랑스러운 이름이다. 바로 '기쁨의 하얀 길', 어쩌면 앤은 자신의 인생이 고아라는 어둡고 비참한 삶의 현실 속에 내동댕이 쳐졌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기쁨의 하얀길을 걷는 행복한 인생으로 바뀔 것임을 스스로가 기대하고 상상한 것이 아닐까?

끊임없이 공상과 상상에 힘입은 이야기를 조잘거리듯이 떠들어대는 앤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수다스럽고 경박스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쁨과 감정을 숨김없이 정직하게 대면하며 그것을 치장하지 않고 표현해 낼 줄 아는 앤의 모습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는 이 무감각함과 무감정의 메마른 세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작지만 큰 파향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감정을 내면 깊이 묻어둔 채 가면을 쓴 포커페이스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시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앤 셜리야말로 우리의 왜곡되어지고 비뚤어진 감정과 삭막한 정서를 어루만지는 명약과 같은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본서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어린 시절 TV를 통해 만난 빨강머리 앤의 애니메이션 원작의 명장면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컬러판 문고답게 앤의 모습 하나하나는 결코 변한게 없었다. 그녀의 홍당무와 같은 머리색깔하며 항상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어두운 회색 계열의 단벌 원피스는 앤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화려하지 않고 예쁘지도 않은 한 소녀로 인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는 사물과 자연들이 행복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TV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앤 셜리가 가진 힘을 느낀다. 앤 자체는 보잘것 없는 존재였지만 그녀가 가진 내면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행복 바이러스를 전하는 행복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이끈다.

작은 책 한권으로 어린 시절 추억이 소환된다. 문고판 작은 책 한권이 가진 힘이 대단하다. 그리고 그 책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힘은 더 경이롭다. 세상이 더 이상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자신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해버리는 작금의 세태, 내가 더 누려야만 하기에 다른 이들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게 여기며 살아가는 인간 말종의 시대 속에 결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과 인간 정신을 가진 평범한 소녀의 삶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서 상처받은 이 시대를 위로하고 살아갈 힘과 용기를 공급하는 데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TV 종방 후 거의 4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왜 아직까지도 빨강머리 앤이 수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숨쉬고 있고, 그녀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상존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앤이 가진 그 삶을 향한 무한긍정의 태도, 자신을 둘러 싼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고아라는 그 암울한 운명을 원망하며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직면하여 대면함으로서 그 운명의 굴레에 갇혀 있기를 거절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기쁨의 하얀 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새하얀 도화지에 아름답게 채색하도록 이끈 앤 셜리 그녀가 가진 꺼지지 않는 삶을 향한 사랑과 애정, 용기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되는 더위와 이어지는 여름 휴가의 계획 속에서 40여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여 기쁨과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단연 본서는 올 여름 우리의 휴가 도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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