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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평점 :

오늘 아침 N번방 사건 공범인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되었다. 아직 교복이 어울릴만한 애띤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한 18세 청소년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자들의 질문 공세 속에서 도대체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사태의 심각성이나마 제대로 파악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다수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유린한 이 짐승같은 존재들의 민낯을 보며 인간 존재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상존하는 인간성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되는 아침이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런 끔찍한 괴물들로 만들었을까?
이러한 질문 앞에서 활자 크기 10포인트 800여페이지의 분량만으로도 독자들의 기를 죽이는 어마무시한 철학서 한권을 만난다. 철학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교수를 지낸 '프랭크 틸리' 교수에 의해 1914년 초판 발행된 <틸리 서양철학사>이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일단 고대 동양 철학과 사상은 사유 체계가 명확하게 성립되지 않았기에 배제하고, 개인과 국가, 사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철학과 사상의 흐름을 각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을 바탕으로 나열했음을 밝힌다.
인류의 태동 이후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우주와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 속에서 그것의 기원과 구조, 기능을 탐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유의 작업을 해나갔다. 저자는 한 철학의 역사적 기원과 개인적 동기, 하나의 철학 체계는 한 개별 지성의 창조적 사유의 산물이며 그 창시자의 인격을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즉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깊은 생각과 탐구의 정신을 지닌 그 시대의 지성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물음 앞에서 답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으며 그것에는 자연스럽게 나름의 답을 발견한 하나의 철학 체계를 형성한 지성인들의 인격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철학이라는 것이 오직 자신만의 세대가 가진 물음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종결되는 한계성에 그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창의적 철학자는 동시대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새로운 개념들과 더불어 과거 철학사로부터 이끌어 낸 전통적 개념과 통찰을 살찌워야 한다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진정한 철학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그것에 대한 정답만이 최고라는 오만을 견제할 때 더욱 더 풍요로운 사유 체계의 완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방금 위의 이야기와 같이 각 시대와 세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 사상이 독단적인 움직임 속에서 역사적 단절성을 갖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 자신들의 앞 시대를 살다간 선배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유에 대한 직간접적인 연관성을 추구했음을 너무나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유독 하나의 시대 정신만이 한권의 책을 관통한다고 볼 수는 없고 각 시대마다의 철학 사상들이 마치 유아용 토마스 기차 장난감과 같이 어느 정도의 연결성을 이루며 진행됨을 발견할 수 있다.
총 22장으로 구성된 본서는 1장 자연철학부터 22장 실용주의 실증주의 분석철학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 사상을 앞뒤의 사상체계들과의 시대적 연관성을 무시하지 않은 채 매우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 나와 같은 철학의 문외한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범주에서부터 철학의 기원을 생각하길 좋아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의 그 난해함을 굳이 이해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그 지난한 정신적 사유의 과정들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중세철학이나 근대 계몽주의 철학과 같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철학 사조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에 관한 그들의 사상과 이론에 대해서 좀 더 심도있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귀한 이득이었다.
밀레토스 학파 또는 이오니아의 자연 과학자들로 불리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실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 사유의 소재로 삼았다. 초기 고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다. 만물의 질료이며 원초적 재료는 물이기에 만물은 물로 시작해서 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던 탈레스나 생물의 기원을 밝히며 사람은 원래 물고기였음을 주장하며 마치 이후 다윈 진화론의 고전판 버전과 같은 사유를 설파하기도 한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사물들의 제일 원리이며 근본실체는 공기, 증기, 안개이며 공기는 생명의 원리이자 우주의 원리임을 주장한 아낙시메네스까지 어찌보면 우리가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모르고 살아도 하등 문제 없고, 지장없는 마치 개똥 철학같은 이야기들을 매우 심도있게 나열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철학자들이 관심있게 궁구한 우주와 세계의 실체의 문제는 당장 우리네 삶에 큰 연관성이 없다할 수 있지만 인간 존재의 문제와 연결될 때 그렇게 만만하고 쉽게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다소 심각한 이슈가 될 여지가 충분한 철학적 주제들을 끄집어온다.
예를 들어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의 문제는 무엇이며 그 세계와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과 인간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모든 사유의 물음을 차단해버리고 당장의 배고픔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의식주의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인간은 한낱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도 모르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조차 모르며 인간 존재의 기원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의 결과는 지금 현시대가 맞닥뜨린 각종 윤리적 문제들과 결코 관련없지 않다. 전쟁, 폭력, 살인, 강간, 낙태, 아동 성매매, 인종청소, 유아살해, 장기밀매, 안락사, 동성애, 식인풍습, 유전자 조작, 대리모 출산 등 현대 우리 사회가 겪는 수 많은 난제들에 대해 그것이 오직 독립적으로 발생한 시대의 아픔이라고 말하는 것만큼 무지한 답변은 없다.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된 우주의 생성과 기원의 문제는 인간과 신 존재의 증명을 요구하며 종교와 중세철학의 시대로 바통을 넘겼다. 이후 신 존재의 증명을 둘러 싼 끊임없는 종교적 논쟁은 다시 인간성 회복이라는 지성과 이성의 시대인 계몽주의 근대 철학에 그 철학적 사유의 주도권을 넘긴다. 종교에 대한 이성의 탁월함을 맹신했던 인간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지른 그 끔찍한 전쟁의 참혹성을 통해 다시금 인간 이성의 무한 맹신이라는 화려한 망상을 떨쳐버리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있은 후 인간 정신과 철학의 무대는 전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상대성의 인정과 다원화라는 새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제 인간은 신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인간 지성과 이성에 대한 맹신도 거부한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새로운 인간 문명의 총아로서 떠오른 현대인들에게는 편리함과 그로 인한 즐거움, 효율성이라는 최고의 철학적 주제가 대세다. 그렇기에 효율성의 측면에서 장기매매가 이루어지며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 낙태를 시술하고 안락사를 시행하는 의료인들이 존재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라도 불멸의 삶을 꿈꾸기에 이르렀다.
본서는 단순히 서양철학사의 시대적이며 연대기적인 나열로서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 고대 자연주의 철학의 시대부터 근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대표적 철학사상과 철학가들이 그들이 살던 당시의 사회, 정치, 문화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렇기에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내용은 잠시 이해의 과정을 스킵하고 넘어간다해도 이후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크나큰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특별히 틸리 교수가 철학적 논의를 심술궂게 비꼬아서 표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문체의 명확함과 명료함으로 인해 다른 책들보다는 표현에 있어 매끄럽게 다가오는 철학서이다.
10여일간 벽돌과 같은 책 한권에 파묻혀서 사고의 바다 속에서 허우적댔다. 영원한 이국의 언어와 같은 철학. 잠간 농담과 같이 표현했지만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 속에서 철학을 모른다고 실제로 밥 벌어 먹고 사는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는 관념적 학문으로서의 철학. 그러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 어르신들의 시대적 유물로서 잠시 밀어놓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좀 더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자연 철학자들과 같이 거창하게 우주와 세계를 논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와 내 이웃과의 관계라는 협의적 의미에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지금과 같은 시대만큼 필요한 때가 또 있을까싶다. 자기가 왜 태어났고 본인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며 나를 둘러싼 내 이웃들의 존재와 그들 하나하나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췄을 때 리뷰의 서두에서 이야기한 N번방의 괴물들이 탄생한다. 완연해가는 봄 기운 속에 이번 시즌에는 우리 모두 가벼운 책들을 좀 내려놓고 머리에 쥐가 날 수도 있는 고생스러움을 선택함으로서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고기가 아님을 증명해보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