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쿠팡으로 출근하는 목사 - 목사 안 하렵니다!
송하용 지음 / 한사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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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에는 웃픈 농담이 하나 있다. 신대원 청빙 게시판에 유명 대형 교회 목회자 청빙 공고가 올라온다. 전도사들 세계에서는 삼성, LG, 현대와 같은 기업의 신입사원 모집 공고라고 여긴단다. 씁쓸한 농이다. 한국 교회의 담임 목사직 세습, 돈과 스캔들에 얼룩진 교회 강단, 명예와 공명심에 찌든 교회 정치판은 그야말로 진흙탕과 같이 추하다.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볼 수 있는 책 한 권을 만난다.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로교 통합 교단 서울의 한 대형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한 저자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참된 교회와 목회자상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남겼다.

대형 교회 담임 목사를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한국 교회 풍토 속에서 저자 또한 오로지 성공을 향해 8년의 시간을 달음박질했다. 이후 성도의 죽음 앞에서 가면을 쓴 채 가식적인 '애도쇼'를 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모순적 행태를 보며 자신 또한 현대판 바리새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역겨워 목사직의 옷을 벗었다.

저자는 책에서 자신이 경험한 부패한 한국 교회 모습의 한 단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부교역자들은 교회와 담임 목사의 종이며 기계 부속품과 같이 쓰다가 성능이 다해 내다 버리면 되는 존재처럼 취급된다. 인격적 대우는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도 없다. 사회의 일반 직장에서도 하지 않을 짓들이 교회에서 암묵적 동의하에 버젓이 벌어진다. 그런데도 이 땅의 수많은 젊은 사역자들은 오늘도 전임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구 목사가 되고 담임 목사가 되는 상승의 허영을 좀비처럼 좇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영혼이 담임 목사와 선임 목사들에게 '탈탈' 털려야 하는 말 못 할 아픔이 강이 되어 바다를 이룬다.

저자는 말한다. 목사는 사명을 좇을 때 행복하다. 사명이 아닌 아무개 대형 교회의 목사라는 타이틀과 그 직함 속에 따라오는 사택과 높은 사례비를 추구할 때 목사는 목사가 아닌 '먹사'가 된다. 저자의 날선 가르침이 사뭇 매섭다. 이야기하는 현실이 저자가 꾸며 낸 거짓이나 과장이 아니라 실제 한국 교회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한 명의 신자로서 읽는 내내 아팠다. 불편한 진실이 가져다주는 반박 불가의 팩트라서 더 그렇다.

 

 

목사직을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를 했다. 면접을 보기 위해 이력서를 내민 저자에게 연세 지긋한 사장님이 "목사가 이런 일할 수 있겠어?"라고 반문하신다. 힘든 일 한 번도 안 해보고 매일 성도들에게 "우리 목사님! 주의 종님!"이라고 상전 대우만 받은 목사가 편의점에서 라면 찌꺼기 비우고, 바닥 청소하고 진상 손님 맞이하는 소위 3D 업무할 수 있겠냐는 뼈 때리는 질문이다.

저자도 독자인 나도 서글퍼졌다. 도대체 한국의 목사들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비쳤으면 그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서슴지 않게 나올까!

이후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생계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그대로 살아냈다. 그 시간을 통해 자신이 지금껏 사명이 아닌 야망을 위해 살아온 사람임을 깨닫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왜 살아야 하고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와 같은 실존과 부르심의 물음이 삶의 지평 속에서 만나 부딪쳤다. 신앙과 신학이 충돌해서 사방으로 파편처럼 흩어졌다. 목사가 아닌 일반 신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찐' 사명을 찾는 작업이 이어졌다.

90년대와 2000년대를 정점으로 최고의 성장세를 구가했던 한국 개신교는 어느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주일 학교가 없는 교회가 태반이다. 청년들의 출석률은 반 토막 난지 오래고 30~40대 청장년들도 교회를 외면한다. 저자는 한국 교회를 침몰하는 배와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해는 마시라! 한국 교회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저자의 마음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안타까움으로 쓴소리를 마다 않는다.

저자는 인간의 전통과 관습, 제도의 틀 속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한국 교회 부패의 참상 앞에서 성경적 교회로의 회복과 회귀를 꿈꾸며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진짜 사명과 소명을 찾았다. 목사의 옷을 벗고 말이다.

한나절 만에 완독했다.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았고 전부 나의 이야기 같다. 용기가 없어 쓰지 못한 이야기를 저자가 대신 써준 것 같아서 읽는 내내 감사했다. 야망이 아닌 사명을 찾은 저자가 그 사명대로 잘 걸어가길 빈다. 돈과 명예와 권력, 쾌락을 사명처럼 여기며 목숨 거는 이 시대 오염된 한국 교회 목회자들에게 이 작은 책이 영적 카운터펀치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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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정동호 지음 / 책세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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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을 위한 책,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 있다. 호기롭게 펼치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완독을 포기한다는 비유의 보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 권의 책 전체가 비유와 은유로 가득 차 있는 코드화 된 비밀문서와 같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고 외치며 집어던지고 싶다. 대부분 독자들은 중간에 책을 덮는다. 끝까지 읽어도 거의 활자만 기계적으로 따라간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그렇다. 결코 독자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 미스터리한 저작!

지난봄 원작을 읽으며 죽을 뻔했다. 서평을 썼고 그 서평이 포털 메인에 올라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만 명이 넘게 클릭을 했다. 니체와 원작을 한참 오해하고 쓴 서평에 철학을 공부한 몇몇 댓글러들의 팩폭이 시작되었다. "당신 글빨로 운좋게 포털 메인에 뽑힌 것 같지만 니체와 원작은 완전 잘못 이해했어!"라고 들리는 댓글에 철학 문외한의 무지를 겸허히 인정했다.

얼마 전 나의 무식함을 온 천하에 광고해 준 이 암호와 같은 책의 난해함을 해결해 주기 위한 해설서 한권을 만났다. 그야말로 원작의 주석서다. 모든 비유와 은유에 대한 상세한 해설에 끙끙대며 읽었던 원작의 체증이 시원스럽게 내려간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저자 '정동호' 교수는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니체 전문가다. 그만큼 책의 내용에 신뢰감이 더한다.

원작의 수많은 비유와 은유로 꼬인 실타래를 차근차근 전부 푼다. 그러나 책이 가지는 백미는 원작의 내용 풀이가 아닌 책의 전반부 100여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는 작품 해설이다. 이 부분만 읽어도 사실 니체 철학과 원작에 드러난 핵심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 창시자 '조로아스터'가 차라투스트라다. 니체는 당시 차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표현했다. 원작은 니체 철학의 전부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철학을 집약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영원회귀, 위버멘쉬, 힘에의 의지 등이다. 알파와 오메가의 직선적 시간관을 좇는 기독교와 달리 니체는 생성과 소멸의 반복이라는 영원회귀 사상을 강조한다. 신은 죽고 없다. 그렇기에 우주는 더 이상 신의 섭리가 아닌 힘(에너지)의 운동으로 운행하며 이 운동으로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한다.

더불어 인간은 신이 없는 세상 속에서 그동안 신에게 매여 있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발돋움해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정수인 넘어서는 인간 '위버멘쉬'다.

니체와 원작이 말하는 핵심은 인간을 굴레 씌었던 기존의 모든 종교, 관념, 사상, 도덕, 질서, 가치 체계의 전복이다. 내가 니체를 오해한 부분도 아마 이 지점인 것 같다. 나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니체가 허무주의 철학자인 줄 알았다. 모든 선행 질서와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니체의 주장과 시도가 내게는 이 세상에 대한 허무와 염세로 비쳤다. 한 댓글러에게 지적 당한 내용도 이거다. 니체는 오히려 허무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삶을 긍정한 철학자였다.

기존 질서, 특별히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과 도덕적 관념을 철저히 거부했다. 인간의 생(生)을 사랑한 철학자였기에 원작에서 말하는 요지는 있지도 않은 신 따위에 눌려서 노예처럼 인간 말종의 삶을 살지 말고 너 자신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위버멘쉬가 되어 새롭고 참된 인생을 즐기며 살라는 말이다.

니체 전문가의 친절하고 명확한 해석과 해설을 통해 니체와 원작을 정확하게 이해한 시간이다. 니체에게 애증의 종교였던 기독교 신자로서 나는 니체 철학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철학이 이 시대에 끼치는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보며 화들짝 놀란다. 자연과 우주와 인간은 하나라는 범아일여 사상, 절대 존재의 부재 속 인간이 바로 신이라는 과학 만능시대 니체의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다. 인간 잠재력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신(新) 바벨탑의 세대 속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너무나 매혹적인 철학이며 사상이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한 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는 고전이다. 그러나 원작에 도전하기 전 반드시 본서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를 읽고 들어가길 바란다! 니체 전문가가 '차라투스트라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일 가련한 독자들을 위해 빵 부스러기를 흘려 놓았기에 그것만을 따라가면 결코 길 잃을 염려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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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에 관하여 - De Sollicitatione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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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침체, 불황 거기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까지... 불확실성의 시대. 지금 이 시대를 대변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한 치 앞을 낙관할 수 없는 불투명한 세상 속에 산다. 마음속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고 입에서는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잠식한 지 오래다.

그러나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염려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세상은 똑같고 먹고살기 빡빡한 현실은 거대한 산과 같이 우리의 코앞에 자리한다. 신자는 이러한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 이에 관한 성경적 신학적 인문학적 철학적 관점에서 매우 탁월한 답변을 내놓은 책이 바로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님의 <염려에 관하여>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 염려란 보편적이다.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책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자들이 가진 염려의 문제에 초점을 둔다. 저자는 책을 크게 두 파트로 나눈다. 1부에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 속에 염려의 근원과 원인을 진단하고 들춰낸다. 2부에서는 의미 있게 살라는 내용 속에 염려라는 바이러스에 함몰되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처방을 제시한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 염려란 가당찮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염려한다. 들에 핀 꽃과 하늘의 새도 먹이신다고 하셨는데 나는 당장 회사에서 밀려날 것 같고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아야 할 것 같다. 자녀는 대학에 떨어질 것 같고, 몸에는 큰 병이 들 것 같아서 미칠 것 같다.

염려가 신자의 영혼을 잠식할 때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환경이 가져다주는 현상적 두려움에 매몰된다. 저자는 염려의 근원이 '자기 사랑'에서 나옴을 지적한다. 그것은 신자의 궁극적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의지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지성의 일치에서 생겨난다. 자기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그릇된 것을 욕망하는 자기 사랑에 있다.

 

 

염려가 엄습할 때 신자가 염려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사랑하기에 나의 구체적인 욕망과 바람이 채워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염려를 가져온다. 신자에게는 바른 사랑의 대상을 찾는 일이 급선무다.

책을 덮었을 때 머릿속에 남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질서'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중 하나는 질서다. 염려에 대척할 수 있는 유일한 원리는 질서다. 자신의 그릇된 욕심을 갈망하며 사랑하는 것은 삶이 무질서하다는 증거다. 온전한 질서와 참된 진리의 근원을 떠났기에 영혼에 나타나는 병적 현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그 삶이 최고선(최고선, summum bonum)을

향하여 사랑으로 질서 지워진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p222

 

그릇된 욕망에 기인한 자기 사랑은 뿌리가 깊고 정체가 모호하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 아름답고 정당하다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목소리가 크기에 더 그렇다. 이 세대가 그렇다. 네 자신을 사랑하라고! 네가 갈망하는 것을 하라고! 달콤한 질서를 제안하지만 쓰디쓴 무질서가 온다. 매일 아침 들려오는 뉴스가 그 증거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질서가 잡힌다. 올바른 질서 속에 세워진 삶은 바른 목적과 목표를 지향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혼돈이 걷히고 내가 무슨 이유로 어떤 삶을 살아내야할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신자의 영혼 안에 싹틀 때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며 그 원함이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염려는 아침 안개 걷히듯 사라진다.

결국 신자의 염려는 자기 사랑에 기인한 욕망과 욕심의 문제로 귀결되고 해결책은 오직 하나! 자신을 사랑하는 대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삶은 바른 질서를 되찾고 무엇을 먹고 마실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말씀은 신자의 영혼 안에 의심할 수 없는 믿음으로 각인된다.

책을 펼칠 때 나의 삶도 적지 않은 염려로 열병을 앓았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내 마음을 잠식한다. 책을 통해 염려에 관한 김남준 목사님의 성경적 신학적 솔루션을 접했을 때 마음의 답답함이 사라진다. 명쾌했다. 내 삶에서 잘못된 부분을 정확히 직면토록 돕는다. 무너진 삶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핵심이며 관건이었다. 탁월한 목회자의 책 한 권이 신자에게 힘을 얻도록 격려한다. 책의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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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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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이 시대의 몇 안 남은 글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가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며 배우고 싶은 작가다. <칼의 노래>이후 <현의노래>, <남한산성>, <밥벌이의 지겨움>,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개>등을 읽었다. 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 흑암 속 글들은 김훈의 손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고 하얀 원고지 위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채 한바탕 신명 나게 춤사위를 펼친다. 글의 움직임은 개별적이지만 통합적이다. 그러나 그 통합 속에는 강제와 억압, 개별성의 마모는 없다. 대신 어울림과 연합으로서 한 몸으로의 나아감이 있을 뿐.

그렇기에 김훈의 글은 낱알과 같이 흩어지지만 어느 순간 찰지고 비린 밥 한 공기와 같이 뭉쳐져 읽는 이의 의식 속에 떨쳐버릴 수 없는 묵직함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역사 소설과 단편, 에세이 등을 썼다. 이제는 절판되어 김훈의 마니아들이 중고서점을 돌며 발품을 팔아 구했다는 <밥벌이의 지겨움>은 이미 전설적이다. 최근 들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절판된 몇 권의 책들과 새롭게 쓴 글들을 엮어 두 권의 산문집을 냈다. 그중 한 권이 <라면을 끓이며>다.

나의 '김훈 바라기'는 그의 산문집을 서가에 들어 앉힘을 기꺼이 허용한다. 글이 막힐 때 그의 책들을 꺼내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죽어있던 상념의 어휘들이 살아 꿈틀대는 좀비와 같이 징그럽게 부활한다. 어쩌면 이런 불경스러운 이유가 나를 김훈으로 이끄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라면을 끓이며>는 작가가 자신과 일상, 세계 심지어 사물에까지 사유를 확장시킨 결과물이다. 김훈이 김훈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같은 범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고 미치지 못하는 그 생각의 깊이다. 타이틀 작 '라면을 끓이며'에서 작가는 라면이라는 소시민들의 허한 창자를 달래주는 싸구려 음식에 대한 그만의 깊은 상념과 사유의 나래를 펼친다. 라면 한 봉지를 통해 배고픔이 일상화된 서민들의 과거와 현재를 논한다. 못 먹고 살던 시대에 대한 그만의 건조하고 짧게 쳐낸 문체가 라면 스프의 MSG 만큼이나 중독적이다. 먹다 보면 아니 읽다 보면 중독되니 나 같은 서평 나부랭이의 입에서는 한탄만 나올 뿐이다. 어찌하면 가진 생각을 이렇게 풀어낼 수 있을까?

 

 

총 5부로 묵였다. 전부 명필 명문이기에 어느 하나 폐기하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밥에 대한 김훈의 상념은 치열하다. 문학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헛소리를 하지 말라고 일갈했던 작가의 인터뷰 전문을 읽은 적이 있기에 그의 밥과 일상에 대한 견해가 어떠한지 짐작이 간다. 결코 형이상학적이지 않고, 철저히 현실적이다. 땅이 주는 저항과 압력을 받아 대척점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재를 인정한 사람이다. 따라서 먹고사는 일상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다. 입안으로 밥알을 넘기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고귀하고 성스러운 일로서 미화했다. 그것이 그의 전설적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번 책에서 그의 산문 몇 개를 체에 걸렀다. 벌어 놓은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는 밥이 주는 고뇌와 삭힌 비애가 남다르다. "이것을 넘겨야지만 또 이것을 벌 수 있을 텐데"라고 탄식하는 문장에서 눈물이 난다. 먹고살아야 하기에 끊어질 듯한 몸뚱이를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내가 경험해 봤고 그 경험이 현재진행형이기에 밥에 관한 작가의 단상이 책을 읽는 내내 저민 슬픔으로 마음을 후빈다.

또한 펜을 잡은 사람의 역할을 이 땅의 실제에 한정시킨 작가가 자신의 펜을 겨눈 곳은 2014년 4월의 팽목항이다. 세월호 침몰에 대한 김훈의 생각이 실려있기에 책의 가치가 남다르다. 정치적 색안경을 벗고 객관성을 유지한 채 읽어보라! 범접할 수 없는 이 시대 최고의 글쟁이가 바라본 세월호 침몰에 대한 글이 소름 돋는다. 마음에 묻은 아픔이 순장되어 땅속에서 여전히 신음하며 울부짖는 자들의 뒤척임과 같이 생생하다.

글이 무섭다는 이유를 발견하게 된 책. 김훈의 글이 무섭다. 세월호라는 건국 이래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서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감정을 절제하며 써 내려간 흔적이 역력하기에 닭살 돋는다. 삭풍에 바싼 말린 어물과 같이 주관과 감정을 걷어낸 체 시쳇말로 팩폭한다. 삶이 따라주지 못하는 말쟁이들의 억지스러운 비아냥과 어설픈 변명이 원천봉쇄된다. 행여 덤볐다가는 살아나올 수 없는 글의 부비트랩이 도처에 깔려있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개별적 아픔을 보편적 아픔으로 승화시킴으로서 글쟁이의 역할을 다한다. 명불허전! 김훈!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철학적 사유의 깊이는 이제 더는 올라갈 곳이 없다. 풀어놓는 글의 향연은 이미 경지다. 현실에 뿌리박혀 있는 작가의 시대를 인식하고 조망하는 식견을 따라갈 재간이 없다. 몸으로 부딪쳤고 그 안에서 느끼며 울었다. 그 잦은 울음 속 공간을 헤집고 들어와 저만의 똬리를 튼 채 자리한 상념들이 사물과 일상, 인간과 세계, 사건과 사고라는 주제를 배태하고 출산한다. 글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작가! 이런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 그야말로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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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기초 히브리어 - 이스라엘 언어와 문화를 한 권에 쏙! 샬롬! 히브리어
임채의 지음, 이나현 감수 / 시원스쿨닷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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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신자가 구약성경의 언어로 알고 있는 히브리어는 단지 소수의 목회자들에게나 허용된 언어로 이해된다.

원어 성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쉽게 접할 수 없는 고대어에 대한 높은 장벽이 히브리어는 신학교를 가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난공불락의 언어라는 이미지를 형성시켰다. 상형문자와 같은 자음과 깨알 같은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모음, 문장을 읽어가는 어순 또한 한국어와 반대다. 모든 것이 생소한 히브리어를 조금은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꾸며진 책이 오늘 리뷰하는 <샬롬! 기초 히브리어>다.

보통 한국의 신학교에서 목사 후보생들은 '켈리' 박사가 쓴 <성경 히브리어>라는 책을 통해서 히브리어를 공부한다. 매우 좋은 책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초심자들에게는 조금 어렵다. 구약 성경을 읽어내기 위한 신학교 교재이다 보니 실용 히브리어와는 느낌이 다르다. 이 책 <샬롬! 기초 히브리어>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이다. 당장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실생활 히브리어의 용례를 제시한다.

저자는 7년간 이스라엘에서 공부하며 실제 그 땅에서 살았다. 실용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자 장점은 문장 위주의 학습이다. 단어와 함께 문장을 통으로 공부한다. 자음과 모음이 모여서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며 말이 된다는 기초적인 언어의 규칙을 성실하게 따른다.

모든 언어가 동일하듯 히브리어 알파벳인 '알레프베트'를 통해 자음을 익히고 장, 단, 반모음으로 이루어진 모음 체계를 공부한다. 이후 쉬운 단어들을 암기하면서 단어들을 조합시켜 문장을 완성한다.

현재형 평서문을 베이직으로 공부하면서 히브리어의 두려움을 걷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초심자들을 위해 배려한 부분이다. 기초 히브리어 교재라는 책이 가진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본문은 총 10장 30개의 유닛으로 구성된다. 각 유닛은 해당 학습의 주요 단어를 설명하고 문장으로 구성한다. 해당과의 뒷부분은 연습문제와 그날의 학습을 정리할 수 있는 섹션으로 채웠다.

각 파트가 끝나면 저자가 이스라엘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단순한 어학책이 가지는 딱딱함과 건조함을 탈피했다. 책은 이처럼 문화와 여행을 위한 일종의 가이드북 역할까지 겸한다. 독자는 본서를 통해 언어를 공부하는 목적이 한 나라를 이해하는 전체적인 작업임을 깨닫는다.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베레시트 바라 엘로힘 엣 하샤마임 베엣 하아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오래전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생경한 단어를 외우고 문장으로 조합하여 해석하는 훈련을 했다. 매주 단어 시험을 치르는 등 힘겨운 노력을 기울인 결과 띄엄띄엄 성경의 명문을 읽어내려갈 때 맛보는 그 환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히브리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우리에게 히브리어의 유려함과 아름다움을 극찬하셨다. 언어는 인간을 이해하고 문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한 공동체의 세계관을 조망할 수 있는 무형의 축적된 유산이다. 유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와 신앙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히브리어는 언어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성경을 원어로 만날 때의 그 벅찬 감동이 신자를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의 성경 원어로 이끈다. 내가 믿는 진리를 진리의 원천이신 그분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다는 신앙적 열망!

공부했던 단어들이 홍수 속 떠밀려간 가재도구처럼 망각의 물결 속에 흔적도 없다. 히브리어 교재를 펼쳐놓고 한참을 망연자실했다. "아!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기에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본서 <샬롬! 기초 히브리어>를 만난다. 실용 히브리어를 통해서 다시금 히브리어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스라엘 여행, 사업 목적의 출장, 유학, 성지 순례, 성경 공부 등 히브리어를 공부하려고 하는 목적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 책이 종교를 떠나서 이 아름다운 언어에 접근하려는 독자들 모두에게 제목 그대로 샬롬(평안, 평화)으로서 다가오는 시간을 선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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