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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평점 :
새해들어 첫 리뷰를 남기는 책은 셰익스피어를 탄생시킨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31명의 순례자가 성인 '토마스 베켓'의 성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에 타바드 여관에 모였고, 여관 주인은 순례의 길을 오가는 동안 본인이 가진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고, 그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한턱 내는 게임을 제안한 것.
31명의 순례자들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부터 낮은 신분의 사람들까지 다양하고 다채로운 신분과 계층,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서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중세 영국의 생활상과 인간군상의 적나라한 모습들, 중세 유럽 그 시대를 살아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저자인 초서의 탁월한 집필력을 통해 매우 흥미롭게 파악할 수 있는 점이 본서가 가진 장점이다.
토막 토막 작은 이야기들은 간혹 통속적이고 음탕하며 또 때로는 아름다운 미담에 걸맞기도 하고, 동시에 적절한 풍자와 해학이 곁들여져 독자로 하여금 웃음과 탄식을 선사하며 더불어 각 chapter를 마무리하면서 잠시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을 되새겨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당시 중세 유럽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과 불합리한 관점을 드러내는 여러편의 이야기들,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아무렇지 않게 빼앗다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한번에 날려버리는 어리석은 방앗간 주인에 관한 교훈, 자신의 늙음은 생각지 않고 오직 젊은 여인만을 원하는 탐욕스럽고 주제도 모르는 기사에 관한 이야기,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로 싸우던 의형제의 이야기, 아내로 맞이한 여인의 정조와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아내의 인내심의 바닥까지 테스트한 의심 가득한 어느 후작의 이야기 등등...
각 세대의 시대상을 이해하고 시대가 던지는 메시지를 가장 손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제일 손쉬운 방법을 꼽으라면 바로 온갖 인간군상들이 모여있는 전통 시장을 가보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흥정하고 때로는 시비가 붙어서 애교로 봐줄 수 있을 법한 작은 소요가 끊이지 않고, 한편에서는 진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에 울어대는 각종 가축들의 울음소리가 물건을 홍보하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어울려 하나가 되는 그야말로 서민들의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전통 시장.
'제프리 초서'의 본서 <캔터베리 이야기>가 바로 이와 같이 전통 시장과 같은 분위기의 책이라고 평해도 억측은 아니리라. 순례자들 각자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마치 인간사의 모든 희노애락을 커다란 샐러드 볼에 넣고 각종 양념과 고소한 참기름,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만들어지는 비빔밥과 같다. 그만큼 본서가 가지는 매력은 서민적이고, 사람 냄새 가득하다는 점이다. 이렇기에 독자는 650여 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짧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이들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의 길을 마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마치 32번째의 순례자가 되어 그 일행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경청하며 함께 웃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본서가 가진 독특함이다.
책을 덮으며 깨닫는 사실 한가지는 본서에서 저자가 31명의 순례자들을 통해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비단 중세 유럽, 영국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이땅에 인간 사회가 존재했던 시대 언제 어디에서나 본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나와 우리 이웃들의 평범한 삶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지극히 평범한 주제를 인간 지성의 틀 안에 녹여냄으로서 비로소 하나의 교훈적인 작품으로 형상을 부여한 것이 바로 저자 '제프리 초서'의 천재성이다.
직진우회전 동시 차선에서 정지선을 오버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갈길을 열라고 무례한 경적을 울려대는 탐욕과 이기심에 가득한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의 오만함을 목격한 아침. 본서의 내용들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혹자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또는 탐욕스러운 주인공의 삶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애써 부인하겠지만 그것이 다만 하나의 초라하고 애처로운 면피용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순례자들의 입을 통해 촌철살인과 같이 현실을 직시하도록 요구하는 이야기의 편린이 인간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어찌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 본성의 외침으로 증명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