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0
안상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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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실천문학사
‪#‎안상학‬ ‪#‎그사람은돌아오고나는거기없었네‬

1. 안도현 시인의 트위터 글 모음집 '잡문'을 통해 이 시집을 알게 되었다. 
경북 안동출신 답게 시골의 일상과 풍경을 묘사하는 시도 있는 반면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은 시도 많았다.
(팔레스타인 1,300인- 그들은 전사하지 않고 학살당했다. 47쪽, 평화라는 이름의 칼 51쪽)

- 발밑이라는 곳, 40-41쪽, 부분

내 발밑은 나만의 공간이다/ 중략 // 사람은 발밑을 밟으면서부터는 단독자다// 중략 // 발밑을 가진 적 없는 젖먹이와/ 발밑을 상실한 노인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닮았다/ 발밑을 잠시 버리고서야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몸짓/ 발밑 없이 와서 발밑과 동행하다 발밑을 잃고서야 돌아가는 인생/ 때가 되면 발밑에 연연하지 않아야 될 때가 한 번은 오는 법이다// 후략

: 인간이 갓 태어나 기어다니다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두 손의 자유를 얻는다. 성인도 가끔 과도한 음주로 네 발도 걸을 때도 있지만. '나만의 공간'인 '발밑'에서 실존이 탄생한다. '발밑'을 잃는 순간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연인을 위해 서로가 발밑을 잠시 버리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이라면 찰나에 교환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엄밀히 발밑을 잃는 것은 아니다. 타자성의 인식을 통해 '우리'의 발밑을 만드는 과정이다. '발밑에 연연하지 않아야 될 때'란 탄생과 살아감 죽음의 과정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서정적인 시나 존재를 다루는 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읽어나가기만 해도 잔잔히 미소가 번지게 하는 시골의 일상과 유머가 담긴 시도 많다.

858-0808 56-57쪽 부분

권정생 선생 생전의 집 전화번호/ 콩팥이 안 좋아서 이마저 그런가 하며/팔어팔으 콩팥콩팥으로 외워둔 전화번호/돌아가시고 재단으로 기어코 살려왔다// 거기 공판장이지요/난데없이 공판장 찾는 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온다/ 전화번호를 괜히 살렸다고 투덜대다가/ 문득 공판장에서 몇 번이가 번호를 사겠다는/ 전화가 왔다던 선생 말씀 생각난다// 중략... // 마음을 다잡다가도 끝내는 공판공판이 아니고 콩팥콩팥이라니까요/덜컥 끊어버린다// 나는 아직 멀었다.

시인의 말이 감명깊어 적어두었다.

- 시인의 말 142쪽
“내 인생의 대지에 나는 시를 뿌렸다. 내가 고른 씨다. 못난 손길로도 예쁘게 싹이 텄고, 슬픈 마음으로 어루만져도 기쁘게 자랐다. 꽃이 피었던 기억은 있는데 열매는 글쎄다. 시의 열매는 무엇일까 묻지 않았다. 삶이 여물면 시도 여물겠지 하며 지냈다. 사실 그것이 열매가 아닐까 생각하며 서두르지 않았다. 남의 논밭 기웃거리지 않았고 남의 작물이며 작황에 마음 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뿌린 씨 하나도 버거워하며 나는 나의 대지에서 시와 함께 소요했다. 꽤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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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가방 - 안규철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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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다 읽고 이 글을 쓰지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본 전시 중에 저자인 조각가 안규철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주제로 한 작품이 있었던 것이다. '사물'에 대한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도서관에서 눈에 띄여 빌린 책인데 저자가 내가 본 전시회를 연 작가라니. 아무렇지 않은 일 같지만 이런 우연이 반갑다.



말이 나온 김에, 아래 첨부한 사진은 안규철의 '아홉 마리 금붕어'라는 작품이다. 9개의 동심원 안에 물이 채워져 있고 각 원에 하나씩 금붕어가 있다. 9개의 원은 커다란 하나의 원을 구성하고 있지만 금붕어들은 고립된 구획에서 살 뿐 서로를 만날 수 없다. 각자의 집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지 않았을까.




2. 이 책은 조각가이자, 한예종 미술원 교수로 있는 안규철 작가가 쓴 책이다.
저자 스스로 철학자의 성찰보다 가볍고 시인의 언어보다 얕은 말들로 사물에 대한 생각을 적어나간 책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곳곳에 자신의 작품을 싣고 그것이 탄생한 배경을 사물을 통해 철학적으로 때로는 예술적으로 풀어내는 솜씨는 왠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해내기 힘든 일이다.
전반부에 머리, 손, 발 등 몸에 관한 성찰에서 후반에는 의자, 가방 등으로 소재를 넓혀 간다.





- 손은 몸통에서 나란히 뻗어나온 두 줄기 길다란 가지로부터 펼쳐진 평평한 손바닥과, 다시 거기서 뻗어나온 다섯 가닥씩의 가느다란 잔가지로 이루어진다. 그 뿌리인 팔 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것은 여러 쌍의 대립항들의 복합체이다. 손에 대한 관찰은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공간 안에 서로 등을 맞대고 겹겹이 포개져 있는 바로 그 대립항들에 대한 관찰이나 마찬가지다. 왼손과 오른손, 손바닥과 손등, 안과 밖, 공격하는 주먹과 쓰다듬는 손바닥, 감싸고 사랑하며 만들어내는 손바닥과 물리치고 거부하며 파괴하는 손바닥, 빼앗고 놓지 않는 손과 베풀고 나누어주는 손, 통합과 분산, 단단함과 부드러움, 열림과 닫힘······. 37쪽





- “나는 어차피 무릎으로 생각한다.” 현대 독일미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젭 보이스가 한 말이다. 60쪽 어쩌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존재양식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무릎 없이 생각하며, 생각하지 않고도 본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과거에 그것은 최면술과 마법, 환각의 세계였다. 64쪽





3. 작가는 자신의 작품 옆에 글을 써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미술품(그림, 설치미술)에 텍스트를 얹는 행위에 대해 미술계 사람들로부터 미술의 본질을 흐리는 행위라며 비난을 받기도 한단다.
글자와 이미지(그림)의 전쟁은 오래된 문제지만 최근에는 티브이, 영화 등 시각매체의 발달로 전쟁의 양상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전엔 이른바 머리 좋은 사람들이 예술 계통에서 소설가나 시인처럼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영화,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많이 몰리는 느낌이 든다. 글자를 다루는 문학은 역사적으로 소수자들의 분야였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과 맞물려 이미지를 다루는 영역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 두 매체의 전쟁 속에서 새우등 터지지 않고 둘을 잘 달래서 한 우리 안에서 길들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다.



- 근래에 영상기술의 발전과 함께 그림(이미지)이 다시 급속도로 그 힘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화면에는 문자를 대신한 수십 개의 그림기호들이 늘어서 있다. 순전히 문자기호로만 이루어져 있던 명령어들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그림기호로 바뀌었다. 표음문자가 다시 상형문자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77쪽

- 우리가 뉴스에 중독이 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개탄하고 공감하고 안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남의 고통이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뉴스 중독의 밑바닥에는 사디즘이 깔려 있다. 199쪽




4. 시적인 산문과 미술품을 한 책에서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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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46
임선희 지음, 최복기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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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주니어김영사
#존재와시간 #하이데거



1. 만화가 아니었다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을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출간 당시 독일인들이 '존재와 시간'의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냐고 농담을 했을 정도라니까 학문적 난해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만화니까 만만하게 마음 먹고 일단 읽어 나갔다. '하이데거'느님이 만드신 철학용어로 가득찬 욕조에 살짝 발만 담그고 반신욕 한다는 기분으로 출발.





2. 우선 시 하나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단천 마을 - 전문,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110쪽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적벽을 마주한 이 마을에는 개를 전혀 키우지 않는다는데 그 까닭으로는 우선 개를 가져다 놓으면 어쩌다 한번 짖은 자기 목소리가 적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에 놀라 더 큰 소리로 짖고 그러면 그 소리는 더 큰 소리로 돌아와 결국 개는 밤새워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가 지쳐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죽어 나자빠지기 때문이라는데 사실 그보다는 사람들이 당최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면 죽은 개들이 웃을지도 모를 일인 것은 섣달이면 숫제 강이 쩡쩡 얼어 몸 트는 소리가 밤새 쩌엉쩌엉 울려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잔다는 말씀.


: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모항은 '개는 밤새워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가 지쳐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죽어 나자빠지'는데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잔다'라는 부분이다. '자기 목소리'는 존재가 말하는 내면의 소리, 양심이다. 실존적인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 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자기 목소리와 싸우다 지쳐 죽어 나자빠진 개와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3. '타자'는 내가 아닌 너와 그들이 아니다. '타인'은 타인은 자신을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고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 가리킨다.(152쪽). 나를 포함한 그들이 함께 거기(Da)에 있음이 타인들의 존재방식이다. '세계-내-존재'로 현존재(인간)와 존재적 사실(벌,꽃,책상 같은 여러 사물)과 더불어 관계를 맺으며 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관계망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실존'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세속적인 욕망의 틀에 같혀 있지 말고 내가 선택하고 판단해서 온전히 자기결정권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상기한 것만으로도 만화 '존재와 시간'은 '존재의미'가 있다.







4. 시간성이란 ‘있어 오면서(과거), 마주하면서(현재), 다가감(미래)이다.'(218쪽)
: 자신의 과거를 이어받아 미래를 계획하면서 그 가능성 아래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향하는 존재로서 주어진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실존적인 삶'을 산다면 적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겠지. 공포와 불안은 다르니까.






너무 심각한 얘기만 한 것 같다.

책장사는 아니지만 어렵지 않게 하이데거의 사상에 접근하게 해 준 책이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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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요 선생님 - 남호섭 동시집
남호섭 지음, 이윤엽 그림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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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요 선생님, 남호섭 동시집, 창비,
#놀아요선생님 #남호섭 #간디학교





1. 저자는 지리산 자락 산청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일하는 현직교사다. ‘간디학교’ 연작시를 비롯해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하는 빨간 홍시 같은 동시한편 따다 먹었다.




- 만우절(간디학교 1) 14쪽, 전문


오늘은 쉽니다


교무실 문에 이렇게 써 붙여 놓고/선생님들 다 도망갔다./남의 교실에 들어가 시치미 떼기,/선생님 앞에서 싸우다가/의자 집어 던지고 나가기,/우리가 음모 꾸미는 사이에// 한발 앞서/선생님들 다 도망갔다.





- 기숙사(간디학교 9) 27쪽, 전문

백혈병 치료 중인 아이가/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여럿이 가슴 아파하며 울더니// 문득, 청란이 머리를 깎았다./ 안 그래도 작고 귀여운 청란이/ 동자승처럼 더 맑아졌다.// 다음날 친구들하고 목욕탕 가서/ 목욕하고 나와 옷 입기 전/ 할머니 한 분이 조심스레 물으셨다.// 어느 절에서 오셨어요?/ 청란이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기숙‘사’에서 왔습니다.




- 봄비 그친 뒤 51쪽, 전문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빨리 달리는 건 산안개다.// 산안개가 하얗게 달려가서/ 산을 씻어 내면// 비 갠 날 아침에/ 가장 잘생긴 건/ 저 푸른 봄 산이다.





2. 동시라고 절대 쉽게 보면 안된다. 가장 쓰기 힘든 글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는 글이다. 글쓴이가 어른아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작가를 존경한다.





- 똥 86쪽, 전문

풀 뜯는 소가 똥 눈다.//긴 꼬리 쳐들고/푸짐하게 똥 눈다.// 누가 보든 말든/꼿꼿이 서서 푸짐하게 똥 눈다.//먹으면서 똥 눈다.

: ‘소가’를 ‘사람이’로 바꾸어 보면 다른 느낌이 든다. ‘먹으면서 똥 누는’ 인간, 생존을 위해 음식을 음미할 시간도 없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소화시킬 새도 없이, 똥 누고 또 먹어야 하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애도하며.






- 눈사람 93쪽 전문

학교 운동장에/ 눈사람이 서 있습니다.// 실컷 놀다 돌아간 아이들 발자국.// 눈사람이/ 발자국을 따라갑니다.

: 눈사람도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교실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 머리카락 변변이 없는 머리에 솜털모자라도 얹어주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과 손에 장갑이라도 껴 주면 좋지 않았을까.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의 손에 손난로 하나 쥐어 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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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6
기혁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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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민음사, 2014
#기혁 #모스크바예술극장의기립박수

1. 제1부 파주의 표제작 파주(坡州) 15쪽
-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택배 상자 속 대기가 궁금해진다//노을이 질 때마다/구름의 살결을 보면서 날씨를 매만지던 시절이/책의 사위에도 일렁이는 것이다//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다던 아버지,/대기가 없는 달의 중력을 가정하며 나보다 꼭 6분의 1만큼 가벼운 생애를 살았던//내 외로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어둠이다/근본 없는 혁명은 내내 과거의 혈육을 찾아가는 것,// ...... 타인의 우주를 받아 든 사람들은 사막을 표류하는 비행사를 떠올립니다 더러는 지구에 없는 암시(暗示)를 읽기도 했지만 직육면체의 밤하늘에 공전을 계속할 에움길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지리학자의 별을 지나 도착한 일곱 번째 행성에서 어둠은 그저 낮의 그늘일 뿐이었고 그런 나의 자괴를 사랑이라고 다독거리던 옛 애인은 어린 왕자를 모던 보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요 주변을 더듬어 자신의 어둠을 울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교양이라면 한평생 우주를 곁에 두었던 엄마의 교양은 인공위성이 틀림없습니다
(중략)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




당신이라는 낮달은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얇은 파본이었을지 모릅니다 조심조심 이불 속에 웅크려 택배 상자를 개봉하면 비좁은 우주를 품은 천막(天幕)이 고갯길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고갯길이 많은 동네를 파주라고 부르던 슬하가 슬퍼지는 것은 옆자리의 어둠으로 밤낮을 구분해 온 당신의 일생 어딘가 파주의 풀을 뜯던 양들이 자욱하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에게나 펼치치 못한 페이지가 있고 제목으로 알 수 없는 독서가 있습니다 문맹의 꽃들에게 붙여진 꽃말은 자궁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지구의 첫울음을 닮았습니다





: 우선 제목을 보자. ‘파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파주 아울렛’과 ‘파주 출판도시’다. 1연과 2연에서 택배 상자에 놓인 책과 상자 속 대기는 친숙한 연상이다.
이 시(詩)의 제목 밑에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바치는 시라고 적혀 있다. 생택쥐페리가 독일 나치의 프랑스 점령 이후에 미국으로 망명해 프랑스있는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 ‘어린 왕자’다. 제목과 부제에서 어린 왕자와 책이라는 힌트 카드를 들고 시를 읽어나간다.



3연,4연에서 “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던 아버지”를 “어둠”이라고 밝히는데 어둠은 우주를 상징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상자 속 대기에서 어둠을 떠올리고 어둠을 우주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후 어린왕자의 내용에서 모티브를 딴 서술, 소설 ‘어린 왕자’에서 왕자는 나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보채고 나는 사양하다가 상자를 그린 후에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라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 원했던 것은 상자 안, 당신 내면의 우주에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어디까지나 이 시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








2. 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이 시집의 표제작인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다. 42쪽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화이트 러시안의 표정을 지으며/허공에 허파를 만들고/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그 나라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의사는 처방전 대신/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하늘을 나는데/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그것을 적분해/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떠돌이 악공의 견가가 끝나 갈 무렵/+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는 나무의 본래 구실을 하지 못한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은 러시아가 1980년대 후반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며 서방세계에 문을 열기는 했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여전히 독재자로 평가받는 푸틴의 수하에 있다. 고질적인 병의 명칭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 뿌리가 허공을 향한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과 희망의 발견을 위해 애쓴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는 왼손과 오른손이 포개지는 기도다.






2편의 시만 소개했지만, 기혁의 시는 어렵다. 몇 번을 읽어도, 뒤쪽의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어도 선뜻 이해가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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