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과 오크 문학과지성 시인선 464
송승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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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 삶과 죽음, 꿈과 현실, 여름과 겨울. 직접적인 발화보다 이면에 놓인 흐릿한 이미지가 많다. 마치 물이 담긴 비커에 소금 알갱이가 퍼져나가면서 흐릿해져 가는 물의 모습이랄까. ‘물의 감정’ ‘돌의 감정’처럼 사물의 물성 그 자체에 집중하는 시들도 있다. 앞 부분의 시들(녹음된 천사, 커브, 물의 감정, 돌의 감정)이 좋았다.

- 송승언, 커브, 부분
창이 없으면 그림도 없지 그림이 없으면 나도 없다 문 앞에 지워진 발자국 쏟아지는// 너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입을 벌린다 그것은 내게 없는 표정/ 어쩜 저렇게 환할까 치아 사이로 펼쳐진 복도를 따라서 하나 둘 둘 하나// 복도는 어둠이고, 복도 끝은 하얀 방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창과 복도는 없고 따라서 울리는 둘 하나 하나 둘// 복도를 공유하는 많은 방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손잡이를 돌리면 잠겨 있고 손잡이를 돌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개방되는 문/ 벽 한가득 걸려 있는 얼굴들이 새하얗게// 복도 끝으로 휘어진 그늘을 보았다/ 창을 열어 몸을 내밀었다// 입은 벌어지고/ 투명한 입에 들어차는 여름 둘 하나 하나 하나

- 송승언, 녹음된 천사, 전문 9쪽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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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로드 - 스물넷에 떠난 컬러풀한 세계일주 아트로드 시리즈 1
김물길 글.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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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물길 글·그림, 아트로드, 알에이치코리아



1. 여타의 여행에세이와 다른 점은 사진 대신 그녀가 세계를 여행하며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는 점. 인물이나 풍경 그대로 그린 그림도 많지만, 헐벗은 아이들에게 예쁜 옷을 입혀주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편집되고 변형된 그림들이 많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작가의 본명은 수로(水路), 한글로는 물길이다. 곳곳을 흘러다니고 스며들고 증발하고 다시 빗물로 이 땅에 도착하는 물. 물은 긁히고 할퀴어도 상처가 금방 아문다.



- 새로운 규칙에 따라 억지로 그리지 않는 대신 그때그때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기로 했다. 1년 가까이 그려온 여행 그림이 아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생각보다 작업량이 많아 ‘따로 작업’이라는 시리즈의 이름을 붙였다. 권태기 덕분에 탄생한 새로운 그림들은 아트로드의 전환점이 되었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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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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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IAN McEWAN), 넛셸(Nutshell), 문학동네




1. 『햄릿』의 모티프를 차용한 소설이다. 다른 점이라면 숙부와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살해에 공모한 점과 작품의 화자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라는 것. 후자가 이 소설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다.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를 증오하지만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받는 ‘나’. 어머니가 감옥에 가면 ‘나’도 수년 간 감옥에서 지내야 하고, 어머니의 범행이 성공하면 평생을 아비 없는 자식으로 살아야하는 딜레마. 시인인 아버지와 라디오와 팟캐스트의 영향으로 고도의 지식으로 무장한 태아는 존재에 대한 고민한다.



간단히 거칠게(IN A NUTSHELL) 양수라는 바다에 떠서 오직 청각으로만 모든 상황을 추측하며 눈을 뜨지 않고 모든 것을 보는 한 존재의 탄생과정.




* 메모

- 내 첫 생각은 존재(To be)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의 문법적 변형인 is. 그것이 나의 원시적 관념이었고 거기에 핵심이 있다. 11쪽



-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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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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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임홍배 옮김, 젊은 베르터의 고뇌(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창비



1. 베르터(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절대적이고 순종적인 사랑과 당시 1700년대 당시의 귀족사회에 대한 혐오와 비판의식이 드러나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


친구 빌헬름에게 부치는 편지만 있고 빌헬름의 답장은 없다. 이미 약혼한 로테는 단순한 여인을 넘어 여러 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는 모성의 전형이다. 베르터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갈구를 넘어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물론 베르터는 계속 떠난다. 결국은 자신을 로테에게 바친다. 과부를 사랑해 살인을 저지른 어느 머슴을 변호하고, 약혼남과 약혼녀를 향해 로테를 사랑하고 있음을 밝히고, 로테의 마음의 한 구석이나마 차지하고 있음에 만족하는 무모한 사랑의 전형.


역자는 베르터의 죽음은 로테의 사랑을 얻지 못한 것도 있지만 당시 사회에 대해 느낀 절망도 있었다고 해석하여 Leiden을 ‘슬픔’ 대신 ‘고뇌’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베르터의 로테에 대한 사랑과 로테의 어정쩡한 태도에 완전히 이입하지는 못했다.


또한 이 둘의 관계를 사실상 알면서도 묵인하는 듯한 약혼남 알베르트의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



● 메모



- 알베르트, 자네가 나를 속인 것에 감사하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언제일까 하고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네. (중략) 나는 역시 그대들과 함께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 자네한테 폐를 끼치지 않고 로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그래. 나는 로테의 마음속에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이 자리를 그대로 지킬 테고, 그럴 수밖에 없어. 만약 그녀가 나를 잊기라도 하면 나는 미치고 말 걸세. 알베르트,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속이 지옥 같네. 알베르트, 잘 있게! 하늘의 천사 로테여, 안녕! 113-114쪽



-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혈통이 고상한 말은 너무 심하게 몰아대어 혈압이 솟구치면 본능적으로 동맥을 물어뜯어 숨통을 틔운다고 한다. 나도 종종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동맥을 열어젖혀 영원한 자유를 얻고 싶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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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문학동네 시인선 70
이선욱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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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욱 시집, ‘탁, 탁, 탁’, 문학동네


1. 아내의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온다기에 자의반 타의반 서너 시간이 툭 내 품에 안겼다. 1호선 전철을 탔다. 목적지는 시청역 덕수궁 미술관.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서 좋다. 한 시간쯤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도착한다. 미술관 표를 끊고 미술관으로 걸어갔다. 휴일이라 외국인, 연인들이 많았지만 미술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초현실주의가 시인 ‘조르주 헤네인’에 의해 이집트에 소개되고 ‘예술과 자유’라는 그룹을 중심으로 이루어나간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의 작품 전시였다. 샤갈, 달리, 마그리트의 느낌도 있지만 이집트 특유의 문화와 접목되어 있어 오히려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도 많았다.



2. 이선욱의 시집에도 이국적인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 아프리카나 몽고의 초원이나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벌판, 네팔이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역, 한적한 산골의 오두막 같은 장소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분명 한국적이거나 동양적인 풍경은 아니고 시인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제3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이국적인 풍경을 제3의 눈으로 추방(데페이즈망 dépaysement)하여 낯설게 하는 기법. 이 시집과 초현실주의는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 메모

- 탁, 탁, 탁, 9-11쪽 부분

그러니까,// 가문 벌판이었지// 저녁이면 한 무리 염소들은/ 그늘로 떠났고/ 목동의 손만 홀로 남아/ 벌판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타자를 쳤네/ 타자를 쳤네/ (중략) / 목동의 손은 가벼웠지/ 몸은 없고 손만 남았으므로/ 말없이 서술하는 시간은/ 활자판의 중심처럼 칸칸씩 이동할 뿐/ 꿈꾸듯 망설이는 타법은 아니었네/ 다만 슬픈 꿈의 오타만이/ 하얀 털뭉치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 궁극의 어떤 형상 같았으나/ 궁극에는 자라지 못할 운명이었다네/ 자판은 타법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지/ 아니면 무언의 잦은 행갈이였을까/ 어딘가 어둠은 글썽거렸고/ 그것은 타이핑한 글씨체였다네/ 때로는 벌판에 도는 메아리처럼/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땅금 갈라지듯/ 목동의 손뼈가/ 더없이 두드러지곤 했네/ 사방으로 길이 없는/ 벌판의 한가운데였지/ 끊이지 않는 서술의 소리를 따라/ 손끝에는 굳은 살이 피어났고/ 그렇게 타자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네/ (중략) / 모가 닳은 자판 하나를/ 누르는 순간/ 무형의 뒤늦은 타점이 울렸네/ 무언가 손등에 떨어졌지/ 빗방울이었네




- 산장과 태양(부제: 침묵자들) 14-14쪽 부분

말이 섞이지 않는 시간/ 난로에 끓는 커피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양각보다 음각에 가깝지/ 혹은 둘러앉은 중간중간 우연의 빈자리처럼/ 몇몇은 죽은 사랑의 꿈을 꾸고/ 한 남자는 짧은 턱수염을 어루만지고// 중략// 산장의 태양은 빛나고/ 가장 빛나는 순간 빠르게 돌아서는 오후를/ 그들은 신의 고비라 부른다네/ 산맥을 넘어서지 못한 기도와/ 넘어서려는 의지가 헤어지는 풍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수많은 경험이 무화될수록/ 상상이 참담할수록//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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