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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탁, 탁 ㅣ 문학동네 시인선 70
이선욱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1. 아내의 친구들이 집으로 놀러 온다기에 자의반 타의반 서너 시간이 툭 내 품에 안겼다. 1호선 전철을 탔다. 목적지는 시청역 덕수궁 미술관.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아서 좋다. 한 시간쯤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도착한다. 미술관 표를 끊고 미술관으로 걸어갔다. 휴일이라 외국인, 연인들이 많았지만 미술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초현실주의가 시인 ‘조르주 헤네인’에 의해 이집트에 소개되고 ‘예술과 자유’라는 그룹을 중심으로 이루어나간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1938-1965)의 작품 전시였다. 샤갈, 달리, 마그리트의 느낌도 있지만 이집트 특유의 문화와 접목되어 있어 오히려 사실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도 많았다.
2. 이선욱의 시집에도 이국적인 풍경이 많이 등장한다. 아프리카나 몽고의 초원이나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벌판, 네팔이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역, 한적한 산골의 오두막 같은 장소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분명 한국적이거나 동양적인 풍경은 아니고 시인이 의도적으로 설정한 제3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이국적인 풍경을 제3의 눈으로 추방(데페이즈망 dépaysement)하여 낯설게 하는 기법. 이 시집과 초현실주의는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문 벌판이었지// 저녁이면 한 무리 염소들은/ 그늘로 떠났고/ 목동의 손만 홀로 남아/ 벌판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타자를 쳤네/ 타자를 쳤네/ (중략) / 목동의 손은 가벼웠지/ 몸은 없고 손만 남았으므로/ 말없이 서술하는 시간은/ 활자판의 중심처럼 칸칸씩 이동할 뿐/ 꿈꾸듯 망설이는 타법은 아니었네/ 다만 슬픈 꿈의 오타만이/ 하얀 털뭉치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 궁극의 어떤 형상 같았으나/ 궁극에는 자라지 못할 운명이었다네/ 자판은 타법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지/ 아니면 무언의 잦은 행갈이였을까/ 어딘가 어둠은 글썽거렸고/ 그것은 타이핑한 글씨체였다네/ 때로는 벌판에 도는 메아리처럼/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땅금 갈라지듯/ 목동의 손뼈가/ 더없이 두드러지곤 했네/ 사방으로 길이 없는/ 벌판의 한가운데였지/ 끊이지 않는 서술의 소리를 따라/ 손끝에는 굳은 살이 피어났고/ 그렇게 타자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네/ (중략) / 모가 닳은 자판 하나를/ 누르는 순간/ 무형의 뒤늦은 타점이 울렸네/ 무언가 손등에 떨어졌지/ 빗방울이었네
- 산장과 태양(부제: 침묵자들) 14-14쪽 부분
말이 섞이지 않는 시간/ 난로에 끓는 커피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양각보다 음각에 가깝지/ 혹은 둘러앉은 중간중간 우연의 빈자리처럼/ 몇몇은 죽은 사랑의 꿈을 꾸고/ 한 남자는 짧은 턱수염을 어루만지고// 중략// 산장의 태양은 빛나고/ 가장 빛나는 순간 빠르게 돌아서는 오후를/ 그들은 신의 고비라 부른다네/ 산맥을 넘어서지 못한 기도와/ 넘어서려는 의지가 헤어지는 풍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수많은 경험이 무화될수록/ 상상이 참담할수록//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