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시선 411
신용목 지음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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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시집,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1. 시집에 수록된 「모래시계」의 구절에서 가져 온 시집제목과 시인의 말(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을 음미해보면 텁텁한 꿈속의 상황이 그려진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는 상황은 일말의 기대와 희망이 섞인 감정을 가진 뒤돌아 봄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돌아보는 상황은 자신이 기다리는 대상을 만나거나 되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마치 오르페우스가 하데스가 내건 조건을 어기고 에우뤼디케를 뒤돌아 본 것처럼.


호명(呼名), 글자 그대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모르는 이름은 있어도 이름이 없는 것은 없다. ‘이름 모를 풀과 나무’는 없다는 말이다. 삶이라는 호수에, 그가 있는 집의 유리창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처럼 변형되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언어로, 행동으로 끊임없이 호명을 한다. 삶은 호명과 메아리로 이루어진 꿈이다.




* 메모



- 모래시계 16-17쪽 부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중략)//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 우리 모두의 마술 20-21쪽 부분

그런 풍경은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여주는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그들이 스스로 높이를 메워버린 후 인간은 겨우 추락하지 않고 걷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중략)/눈을 감으면,/ 유리창에 비친 뺨을 벽에다 갈며 지하철이 지나간다. 땅속의 터널처럼, 밤이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라면 가로등은 끝나지 않는 창문이라고······// 냉장고 문을 닫아도 불이 켜져 있어서 환하게 얼어 있는 얼굴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마술은 아직 초연되지 않은 마술을 재연하는 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백미러 속에서 누군가 달려오고 있었다.// 깨진 유리 속이면 사람은 한명으로 군중을 만든다. 인간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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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들 마지막 왕국 시리즈 3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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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심연들, 문학과지성사

1. 키냐르의 《마지막 왕국》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여러 장르가 복합적으로 섞인 새로운 장르로서의 키냐르의 글은 갓난이의 옹알이처럼 생경하고 매력적이다. 다 알아들을 수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갓난이의 발화는 언어의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심연들, 신비들.



* 메모

- Jadis: 자디스, 단순히 옛날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계속하여 쌓이는 세월의 누적, 그 켜, 그 적층적 연속성

- 인간계에서 성장기와 노화기는 양극처럼 대응하는 듯하지만, 근원적으로는 가량 오르가슴과 단말마가 동일하나 상이한 헐떡임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행위이다. 19쪽

- 하늘론

보기 쉽기 때문에 보기 지겨운 하늘을 향해 아무도 눈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고 그(마롤 신부)는 말했다. 시간은 하늘이다. 태양이 지상의 선에서 사라진 후, 우리가 천공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릴 때, 우리는 과거의 어두운 얼굴을 본다. 91쪽

- 해안가에 와서 부서지고 솟은 돌에 부딪히고 휘말리는 역류를 따라 돌진하는 늘어진 뱃살의 해수면을 달이 들어 올린다. 지구와 달 사이에 무슨 축이라도 있듯, 달을 향한 반구의 해면은 달 쪽으로 당겨진다. 바다는 아직 그 상승을 수행 중인 나머지 옛날에 굴복한다. 옛날에 달은 지금보다 세 배나 지구에 가까웠다. 달은 아이를 떼어놓는 엄한 어머니처럼, 아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잠든 아이의 방문을 천천히 닫아주고 나오는 어머니처럼 바다를 뗴어놓았다.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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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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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1. 가방 속에 조그마한 우산을 넣고 다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접힌 우산은 자궁 속 태아처럼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태아는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밝은 빛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지만 내 우산은 빛이 그치고 비가 내리는 순간 세상에 기지개를 켠다. 어둠의 바깥은 또 다른 어둠. 슬픔의 바깥이 슬픔이듯.



우산을 넣은 가방을 매고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난다. 우산이 가방 속에서 내는 울음이다. 내가 거리에 남기지 못하는 발자국을 우산은 대신 남긴다. 밤에는 그 소리가 무서워 애써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전철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긴 밤. 우산이 펼쳐놓는 어둠의 오 분이 우산에게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아닐까.


● 메모



- 식후에 이별하다, 13-15쪽 부분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후략)



- 아주 잠깐 빛난 폐허, 18-19쪽 부분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중략)/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21쪽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중략)/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략)/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금빛 소매의 노래 110-111쪽 부분

추억이여, 너는 언제나 모르는 노래였다 바깥을 접으면 안이 구겨진다 군대 가서 절망한 친구는 자살했지만 절망해서 군대 간 친구는 잘 살았다 안을 수십 번 접어도 바깥은 한 치도 구겨지지 않는다// (중략)// 오오, 추억이여, 네 한 팔의 금빛 소매를 이제, 내 한 팔로, 쭈욱, 걷어 올려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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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하여 - 철학자 장켈레비치와의 대화 철학자의 돌 4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변진경 옮김, 이경신 해제 / 돌베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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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와의 대담, 죽음에 대하여(Penser la mort?), 돌베개



1. 아내의 외할머니가 최근에 돌아가셨다. 호우가 쏟아지던 날 화장을 하고 절에 있는 야외 납골당에 모셨다. 그날 오후 거짓말처럼 날씨는 개었고 또 다른 장례식장을 찾았다. 회사 동기의 부친이 대동맥 파열로 쓰러지셔서 수술 후 깨어나시지 못하고 가셨다. 아들 내외는 얼이 빠진 듯 보였다



2.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시한이 확정되어 있지 않고 연기되어 있을 뿐이다. 조건부, 불확정 시한부의 삶은 죽음이 있기에 삶으로서 가치가 있다.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진 사람을 죽음이라는 칼은 단번에 나눈다.



노환으로 병석이지만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다보고 가는 죽음과 동기 부친의 죽음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을 다 같은 것일까.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겨진 사람에게는 고통이지만 떠난 사람에게는 떠나 보내는 사람의 슬픈 모습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기쁜 일이라고 위로할 수 있을까.



3. ‘지속, 시간’의 생철학자 앙리 베르그송과, 철학자이자 소설가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받은 저자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신비’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의미를 부정하는 비의미(non-sens)’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의 이행’으로서의 죽음은 결국 삶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었다. ‘죽음에 대한 불안’ 보다 ‘삶에 대한 불안’이 더 심한 현 시대에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 메모


-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한, 나는 죽음의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존재합니다. 내가 죽게 되리라는 점에서 나는 죽음의 안에 있지만, 내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한에서는 그 안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67쪽




- 안락사에 호의적인 진보주의자들도 빠지기 쉬운 신학적 선입견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즉 죽음은 오직 신이 결정할 문제이고, 인간은 다른 인간이 죽어가더라도 그것을 막을 수 없으며, 기술로 인해 얻게 된 능력을 모두 동원하는 것도 필요치 않다는 생각 말입니다. 88쪽




- 죽음은 다른 것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의 이행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이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으로, 끊없이 이어지는 것이며, 바깥이 없는 창문과도 같습니다.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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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 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만드는 한 잔의 술
탁재형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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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 스피릿로드(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하는 한 잔의 술), 시공사


1. 독성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 분해요소가 없는 나에게 술은 음용이 아니라 전시용이다. 자발적 음주를 거의 하지 않는 내가 맛있다고 느낀 맥주는 독일 맥주 ‘파울라너’ 정도. 처음 마셨을 때 국산 맥주에 없는 묵직하고 든든한 맛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술을 즐기지는 않지만.


순수한 주(酒)적 호기심으로 고른 책인데, 우선 재미있다. 다큐멘터리 전문 피디로 10여년 넘게 전 세계를 돌아다닌 저자답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술도 많다. 첨부한 목차만 봐도 침을 꼴깍 삼키시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그 술을 알게 된 사연과 그 속에 녹아 있는 인연이 풍기는 향만으로도 취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 책의 목차


1. 불 속에서 정련된 포도의 향기(이탈리아-그라파)
2. 첫사랑 같이 아련한 스피릿의 이데아(루마니아-빨링꺼)
3. 무미(無味)의 술이 지닌 미학(러시아-보드카)
4. 커피와 술이 건네는 극단적 위로(베네수엘라-미체)
5. 지독한 추위 뒤에 맛보는 최고의 한 모금(네팔-무스탕커피, 스위스-글뤼바인)
6. 끝내 사라지지 않을 금단의 열매(수단-아라기)
7. 인류 최초의 증류주(아랍-아락)
8. 세계 정상을 노리는 중국의 자존심(중국-바이지우)
9. 잉카의 항아리에 담긴 유럽의 혼(페루-피스코)
10. 삼바걸의 체취를 닮은 열대 칵테일(브라질-까이삐리냐)
11. 지구 반대편, 같은 아픔을 공유한 술(말라위-까냐주, 페루-까냐소)
12. 선입견을 깨우친 화전민의 술(라오스-라오라오)
13. 아마존 정글의 맥주(페루-마사또)
14. 술 한 모금에 깃든 삶과 죽음(캄보디아- 쓰라 써)
15. 물아일체의 판타지를 마시다(동서양- 침출주)
16. 히말라야의 고단함을 치유하는 묘약(네팔-락시)
17. 불타는 축제의 연료(브라질-아구아르디엔떼)
18. 한 잔의 술에 담긴 기억(라오스-비어라오)
19. 왕실에서만 맛보던 비밀의 맥주(독일-바이스비어)
20. 소년이 동경한 어른의 세계(영국-위스키)
21. 아프리카에서 청심환이 필요할 때(남아프리카공화국-아마룰라)
22. 진정한 남자의 술(멕시코-테킬라)
23. 술 한 잔에 담긴 조르바의 정신(그리스-치쿠디아)
24. 영국군의 더위 치료제(영국-진토닉)
25. 행복한 사람들은 향기를 마신다(덴마크-이콰빗)

26. 대나무를 닮은 장인의 마음(대한민국-죽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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