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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평점 :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1. 가방 속에 조그마한 우산을 넣고 다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접힌 우산은 자궁 속 태아처럼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태아는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밝은 빛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지만 내 우산은 빛이 그치고 비가 내리는 순간 세상에 기지개를 켠다. 어둠의 바깥은 또 다른 어둠. 슬픔의 바깥이 슬픔이듯.
우산을 넣은 가방을 매고 걸을 때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난다. 우산이 가방 속에서 내는 울음이다. 내가 거리에 남기지 못하는 발자국을 우산은 대신 남긴다. 밤에는 그 소리가 무서워 애써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전철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긴 밤. 우산이 펼쳐놓는 어둠의 오 분이 우산에게는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아닐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후략)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중략)/ 그때 하늘 아래 벗은 바지 모양/ 누추하게 구겨진 생은/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였다/ 장대하고 거룩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중략)/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략)/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추억이여, 너는 언제나 모르는 노래였다 바깥을 접으면 안이 구겨진다 군대 가서 절망한 친구는 자살했지만 절망해서 군대 간 친구는 잘 살았다 안을 수십 번 접어도 바깥은 한 치도 구겨지지 않는다// (중략)// 오오, 추억이여, 네 한 팔의 금빛 소매를 이제, 내 한 팔로, 쭈욱, 걷어 올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