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여우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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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시집, 그리운 여우, 창비, 1997



1. 20년 전의 시집.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되었다가 복직해 전북 장수군 산서(山西)에서 보낸 3년의 시간을 담았다. 시인은『백석 평전』(2014) 출간하기도 했는데, 표제작이기도 한 《그리운 여우》는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자연과 삶을 쉽고 깊고 노래하는 시다. 비교적 짧은 시들이 많은데, 20년 전에도 트위터가 있었다는 이 시집의 시들을 옮겨 적었을 것이다.



-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그리운 여우, 32-34쪽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속에 두고 온 어린 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뒷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막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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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 시인선 472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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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 지성사
#임승유


수족관 속에 손을 넣고 오직 촉감에 의지하여 잡히는 생물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는 게임이 생각났다. 시각은 빛의 여과망을 통과한 제한된 감각이지만 촉각은 보지 않고도 말할 수 없어도 즉각 느껴지는 감각이다. ‘모자의 효과’를 읽으며 ‘친척 집에 간다는’ 것이 왜 모자를 쓰는 일이었을까, 왜 아이가 아이와 아이를 낳았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알 것 같지만 말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 같다. 이 흥미로운 시가 시집의 중심이다.



금을 넘되 금을 밟지 않고 안팎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시, 때로는 허들 위로 떄로는 림보 아래로 장애물을 통과하는 시, 시인은 장대를 사용하는 고공 점프를 하진 않지만 단단히 심어놓은 발목에서 쑥 자라나는 대나무처럼 높이 솟아 봉을 건드리지 않고 배면뛰기로 바를 넘는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음 시기를 준비하는 높이뛰기 선수같은 시.




- 모자의 효과 9-11쪽 부분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 긁적이며 생쥐가 태어나는 것 같다// (···)//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와/ 아이와/ 아이를// (···)//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친척이 물 한 컵을 줄 때는 숨을 참으면 된다 맛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난다// 웃는 이가 된다/ 젖은 웃는 이가 된다// 친척 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투명한 인사 22-23쪽 부분

1 아저씨가 먼 곳에서 가져 온 건 정말 멀고 먼 이야기였다 멀고 멀어서 오다가 부서지는 이야기였다// 다 듣고 일어날 때 너무 먼 곳에서 오고 있는 이야기라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 같아서// 아저씨가 사라지기 전에 뒤를 돌아다봐야 했다// 2 물 항아리를 들여다 본 이후 목덜미를 만지는 버릇이 생겼다// 소리가 넘치면 몸을 끌고 가게 된다 소리는 한 몸이 다른 몸에게 가 부딪치는 것이라서 몸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서야 입을 벌린다// (···)



- 책상 58-59쪽

엎드렸다 일어나면 온도가 심어진다 체온을 나누다 헤어진 너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얘들아,// 부르면 한꺼번에 달려오겠지만/ 여기서만 얘들인 얘들아/ 앉아만 있던 테두리가 피부가 된 얘들아// (···)// 엎드렸다 일어나면 꽃집 앞에서 서성이는 기분이 들고/ 알맞은 온도란 이런 것일까// 흘러내린 얼굴을 주워 담듯 계속해서 아이들이 태어난다// 빈칸을 다 채웠는데도/ 아직 다 오지 못한 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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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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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돌베개
#신영복

지난 1월 15일이 故 신영복 선생의 1주기였다. 이에 맞추어 나온 유고집. 제1부 나의 대학 시절 제2부 사람의 얼굴에서는 그동안 펴내신 저서(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처음처럼, 더불어 숲, 담론 등)에서 한 번 씩은 봤음직한 내용이 많다. 자꾸 봐도 질리지 않는 사람의 얼굴처럼 책에 선생의 생전의 모습과 어투가 묻어난다.


새로웠던 부분은 이십 대에 썼던 수필을 모은 미발표 원고 부분, 특히 제3부(주소 없는 당신에게)에 실린 강연과 책의 발문, 추천사는 일독할 만하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깊은 사색의 체로 한 번 걸러 우려낸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핵심을 차분히 설명한다. 아름다운 문체, 논리적 정합성을 떠나 삶과 글과 말이 일치한 사람을 거쳐 간 바람의 흔적이 이 책이다.




* 메모


- 세상에 끊어진 길은 없는 법이다. 끊어진 혈관이 없듯이 모든 길은 모든 길과 연결되어 있는 법이다. 21쪽



- ‘건축’이라는 단어, 이 단어를 읽거나 생각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상념이 다릅니다. 아파트 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아파트를 생각하는 사람, 또 더 나아가서 포클레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과 손때 묻은 망치를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 술 먹었던 목수 친구를 생각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 그림과 글씨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 가지만 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림은 ‘구체적 형식에 추상적 내용’인 반면 글씨는 ‘추상적 형식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116쪽



- 미발표 유고 중, 이십대에 쓴 수상록

가을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봄이 자라서 여름이 되고 여름이 늙어서 가을이 되고 가을이 죽어서 겨울이 되었나보다.” 137쪽

초가지붕 참새 둥지에 손을 찔러 넣다가 그 속에 먼저 도사리고 있는 뱀의 싸늘한 냉한(冷寒)에 섬찟해진 경험이 있는가? 145쪽



- 대숲은 그 숲의 모든 대나무의 키를 합친 것만큼의 광범한 뿌리를 땅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대나무는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면 이제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이루어 내는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홍수의 유역에서도 흙을 지키고 강물을 돌려놓기도 하며 뱀을 범접치 못하게 하고 그늘을 드리워 호랑이를 기릅니다. 그때쯤이면 사시청청 잎사귀까지 달아 바람을 상대하되 잎사귀로 사귀어 잠재울 것과 온몸으로 버틸 것을 적절히 가릴 줄 압니다. 설령 잘리어 토막 지더라도 은은한 피리소리로 남고, 칼날 아래 갈가리 찢어지더라도 수고하는 이마의 소금 땀을 들이는 바람으로 남습니다.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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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의 발견 창비시선 350
이병일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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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시집, 옆구리의 발견, 창비
#이병일




1. 감성이 메말라간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인연은 늘어가는데 오프라인에서 연락하는 사람은 줄어간다. 호기심보다 혼자 누리는 짧고 작은 고독의 방을 찾는다. 작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존재론에서 벗어나 관계망을 넓혀가는 사고’를 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일었던 파문이 잔잔해져 그 많던 동그라미들을 찾을 수 없다.



2. 이병일 시인의 첫 시집. 오랜만에 서정시가 주를 이루는 시집을 읽었다. ‘격장(隔墻)’,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함, 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이 시를 읽으면 제주도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가 생각났다. 중산간 지역 특유의 습기와 ‘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쌓아 올린 낮은 담장과 보랏빛 수국이 있는 곳. 바람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햇빛을 반사하지 않고 안아주는 곳이었다.



‘격장’ 외에도 좋은 시들이 많다. 시집 후반부 시들이 좋았다. 건물을 쑥쑥 자라는 식물로 나타낸 ‘식물성의 발견’, 나무가 제 몸 안에 프로펠러가 있어 산에 바람을 빼곡이 채운다는 ‘프로펠러’, 죽순을 습한 바람이 부는 대밭의 항문으로 본 ‘죽순’도 읽어볼 만하다. 내 취향이 자연에 대한 묘사나 이미지를 강조한 시보다 그 속에서 뜬금없다 할 정도로 비트는 문장을 흥미롭게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서정시를 좋아하는 분이 편하게 넘겨가며 읽어보면 좋을 시집.


- 격장 8쪽

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담장을 쌓아올린다. 황토와 짚을 잘 섞어서 두 집 사이에 돌 울타리를, 매화나무와 감나무의 경계선을 후회도 없이 쌓아올린다. 나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양손으로 옮긴다, 감나무 그늘로 옮긴다. 저만치 매화나무 꽃눈이 지켜봐도 돌풍과 작달비에 끄덕없는 돌담을 쌓는다.// 오늘 나는 담장을 쌓아올리며 겨우내 잠자던 어깨 근육을 흔들어 깨웠다. 돌덩이 하나 놓고 수박만한 태양을 놓는다. 돌덩이 하나 놓고 굴참나무숲 그림자를 놓는다. 곰곰이 바람의 각도와 수평을 맞추고 또다시 돌덩이와 재미없는 한낮의 하품을 마저 놓는다. 그때 나는 줄곧 이 담장 타기를 좋아하는 장미나 능소화의 유쾌한 질주를 생각한다.//
나는 자명하게도 담장을 쌓는 일에 끝없는 동작으로 힘을 탕진 중이다. 누가 또 돌담을 쌓아 격장(隔墻)을 이루는가, 그러나 나는 돌담처럼 맑디맑게 정다울 것이다.



- 옆구리의 발견 12-13쪽 부분

나는 옆구리가 함부로 빛나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바다가 감쪽같이 숨겨놓은 수평선과 아가미가 죽어 나뭇잎 무늬로 빛나는 물고기와 칼을 좋아해 심장의 운명을 감상하는 무사와 무딘 상처 속에서 벌레를 키우는 굴참나무는 매끈한 옆구리를 지녔다// 살아간다는 것은 옆구리의 비명을 엿듣는 일/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는 백열등으로 괴는 늑막염 소리 듣지 못했다/ 갈비뼈를 자르고 한쪽 폐를 후벼 파내는 시원한 통증을 맛봐야 했다// (···)



- 우물 22-23쪽 부분

현기증 이는 푸른 물결무늬들/ 그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우물이 있네// (···)// 한생이 유창하게 탈바꿈하듯/ 오래 준비된 침묵은 거꾸로 빛나는 웃음이고/ 꿈틀대는 바보 웃음이고/ 그러나 그 순전한 웃음이 글썽거리네/ 아프도록 멀리 있는 병이 씻기는 기분이랄까// 거기, 하염없이 차갑고 맑은 여자가 사네/ 오늘밤 나는 우물 속에 얼굴 처박고/ 갈증으로 일렁이는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보네//(···)



- 식물성의 발견 70-71쪽 부분

햇살 좋은 날씨가 많아질수록 건물들은 쑥쑥 자란다/ (···) / 첨단기술이 두더지처럼 기나긴 지하 세계를 뚫고 나와 지상 위에 정기적으로 거대한 아파트를 심고 있을 때/ 나는 종신보험을 들고 나온 초식동물의 꿈을 꾼다/ 건물의 유일한 외부인 골목에서 식물 냄새가 맡아진다



- 프로펠러 96-97쪽 부분

한 줄기 바람을 피우기 위해/ 어둡고 환한 여름 산은 프로펠러를 돌리나보다.// (···) // 나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측량할 수 없다/ 그러나 프로펠러를 몸 안에 지닌 나무가/ 여름 산에 크고 작은 바람들을 빽빽이 채우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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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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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문학과지성사


1. 읽어도 잘 이해 안 되는 시집. 이해 안 되도 자꾸만 책장을 넘기고 싶은 시집. 가끔 이해가는 시들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세포를 강하게 끌어 당겨 세포들이 피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시집. 부산한 출근길 보다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시집. 너무 빠지면 잠이 안 올 수도 있으니 주의. 읽기 전부터 겁먹고 읽지 말라는 건 아님. 한 번 다 읽고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잠재적인 것과 해방적인 것」)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시집. 다시 읽으려고 접어 둔 귀퉁이가 자꾸만 무한 증식하는 시집. 현실의 ‘재현’보다 현실을 잠시 보류해 두고 ‘가능성’을 모색하게 하는 시집. 몰라도 짜증 안 나는 시집.



2. 메모



-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12-13쪽

창을 바라본다. 창문이 비추고 있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생각이라면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누군가의 생각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상각이라면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질료화한다. 나는 그의 생각을 열고 나갈 수가 없다.// 나는 한순간,/ 누군가의 꿈을 뚫고 들어선 것이다.// 나는 그를 멈춘다.// 커튼이 날아가버린다. 나는 내가 가까워서 놀란다. 나는 그의 생각을 돌려보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생각을 잠그고 있다.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로// 창문이 비치고 있는 것/ 지금 누군가의 생각이 찢어지고 있다.




-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32-33쪽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 일요일과 초과 40-41쪽 부분

치마를 펼치고 걷는다. 치마는 펼쳐지지 않고 나를 감는다. 치마가 텅 비어 있도록 다시 치마를 펼친다. 치마에서 나가자.// 슬픔의 발달 이후 여러 개의 손가락이 똑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슬픔이 성사되어 슬픔이 타락한다. 움직이지 않는 신호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일요일// 신호들은 연결되지 않는다. 부서져버린 모퉁이가 너무 커서 모퉁이는 되돌아가지 못하고 부서지는 순간 몇 겹으로 깨어진 방향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치마에서 나가자. 치마의 주름이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지는 날 그렇게 치마는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는 내일을 이해하고야 만다. 눈꺼풀 속에서 눈을 움직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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