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에는 섣불리 맞닥뜨려서는 안 된다고 알려진 크고 작은 금기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는 요리사의 손톱, 작가의 맨얼굴, 옛사랑의 현재 모습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그것은 주방장의 청결 의식이나 작가의 인간성, 옛사랑의 속물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연희는 그것이 환상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손길에 대해, 그토록 재미있고 지당하신 말씀을 늘어놓는 작가의 인격에 대해, 그 대상의 실체나 본질과 무관하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품고 있는 환상을 경계하라는 이야기라고 짐작했다.
p.9
 
자신이 전쟁이나 궁핍과 아무 관계 없고, 현실적으로 결핍된 것이 전혀 없다고 느끼는 때에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환상인 줄 번연히 아는 동안에도 환상은 활동하고 있었고, 그 대상과 무관하게 환상은 번성했다. 연희가 두려운 것도 그것이었다. 환상의 시원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곳, 인간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pp.29~30
 
나는 자기 향상을 위해 걷다가 여기 막다른 곳까지 와 있지만, 사실 자기 향상이란 어려운 거다. 정신적으로 깊어지는, 그거는 측정할 길이 없는 거다. 그걸 어디다 꺼내놓을 수도 없고, 물처럼 부어놓을 수도 없고, 바람처럼 어디 부딪쳐서 소리를 낼 수도 없고, 자기 향상은 자기만 아는 상대적인 거다. 
p.323 
 
연희가 생각하기에 환상을 대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그것에 끌려가거나 일방적으로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리석은 환상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고 큰소리쳐서도 안 되며, 재수 없는 환상이라는 놈을 기어이 때려잡아 박멸하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조심할 일은 환상을 현실 속에서 성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p.392
 
 
김형경, <성에> 中
 
 
+)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고서 가슴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작가도 그런 경험이 있을까. 혹시 작중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바탕에 작가의 자의식적 글쓰기가 깔린 것은 아닐까. <성에>는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어든 소설이었다. 오랜만에 김형경의 소설을 읽어야겠다 싶어 말그대로 그냥 집어든 소설이었는데, 새삼스럽게 프로이트가 떠오른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은 모두 프로이트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의 논문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야기를 소설에 끌어들이는 작가의 방식은 꽤 지적으로 보인다. 작가만의 기법이겠지만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기를 쓰고 해석해놓은 분석서들보다 이런 소설 한 두권이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전달한다.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성에>를 읽으면서 인물들의 파격적인 설정이 놀라웠는데, 책을 다 읽는 순간까지 '설마'를 외치며 놓지를 못했다. 이 작품은 액자형 소설로 크게 연희와 세중의 사랑(환상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속에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치명적인 사랑이 존재한다.
 
게다가 인물 중심의 소설 시점에서 벗어나 자연물의 시점을 끌어들인다.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 등 그 모든 존재들이 두 남자와 한 여자를 관찰하며 자신들의 세계와 비교한다. 이는 인간 이외의 객관적인 관찰자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섬세한 설정이다. 인간 내면 심리와 인간 사이의 주고 받는 행위를 거리를 둔 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주관적인 시선을 배제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얼키고 설킨 사랑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물론 연희와 세중이 오랜 시간 뒤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되나, 그것은 환상 속의 사랑을 강조하는 극적 구조로 보인다. 작가는 죽음으로 설명되는 유토피아를 환상으로 지시한다. 현실에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환상을 현실화시키려는 의도는 삶을 파멸로 이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영화 <거짓말>이 떠올랐다.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가 스치기도 했다. 같을 수도 없고 같지도 않지만 그 작품들이 떠오른건 평범하지 않은 소설의 내용과 구체적인 묘사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작가 김형경이 아닌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서 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하는 것들,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의 환상, 죽음, 사랑이란 키워드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느 지점에서 중첩시키느냐에 따라 지향점이 달라지리라 본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바로 그 지향점의 끝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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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과거를 지워 버렸다. 과거를 지우면서 미래도 지워 버렸다.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의식 대신에 일종의 열기 같은 것만이 존재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놀이라고 불렀다. 나는 목에서 불이 날 정도로 크게 말하고 크게 웃었다.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이미 어떤 음료수로도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p.74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해 주지 않는 거지?' 나는 인생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어느새 손에 우산을 몰래 들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도 그들은 항상 우산의 보호를 받으며 해가 떴을 때도 우산을 접지 않는다. 하지만 질투심이 나의 도약을 위한 아주 강력한 자극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있었고 그 어떤 존재 속으로 나를 내던질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난 그런 도약이 잠깐 동안밖에 지속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만족을 느꼈다 해도 곧 이어 다소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불편함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금방 그것이 다른 모든 감정들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고 난 불행해질 것이다.
pp.101~102
 
"이제 사람들은 말도 두려워하고 있어. 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깨끗한 말들을 사용하지. 말들은 혼자 힘으로는 상처를 주지 않아.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이 상처를 내지. 광기는 위대함을 지니고 있어. 광기를 우편 양식같이 평범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의 신비한 힘이 부정되어 버려. 사실 인간 피라미드가 깊이를 상실하고 삼각형으로 변해 가는 어느 지점이 있어. 삼각형은 평면도야. 그러므로 그것을 둥글게 말 수 있어. 네가 그것을 둥글게 말면 삼각형의 맨 꼭대기가 땅에 닿을 수 있지. 광기는 거리를 없애 주고 아주 높거나 아주 낮은 곳에 충격을 주지. 어느 날 우리들의 운명이 그들처럼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
p.103
 
수산나 타마로,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中
 
 
+)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가 수산나 타마로의 장편소설이다. 중심 인물로는 범상치 않은 두 사람, 발테르와 안드레아가 등장한다. 두 젊은 청년을 중심으로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 성장 소설이다. 크게 불 / 땅 / 바람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가정의 화목을 전혀 모르는 발테르와 정신감호소의 환자로 있던 안드레아의 만남은 소설을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읽을수록 쉽지 않은 작품이나 좋은 문장들이 꽤 많은 소설이다. 엮자에 따르면 타마로가 이 책을 '악'에 관한 책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의 정점은 자신에게 내민 손길이 아닐까 싶다. 자신과의 화해. 자기 삶에 대한 길찾기. 우리는 흔히 젊었을 때의 끓어오르는 가슴 뛰는 감정을 열정이라고 부른다. 이 글의 두 주인공들은 그 열정을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며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랑이 꽤 자주 사용된 말이기에 이 소설의 말미를 얼마나 멋지게 장식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레네 수녀가 발테르에게 말한 마지막 말, "사랑은 관심이야."라는 대사는 이 소설을 선택한 내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는 깔끔한 한 마디였다. 그동안 보아왔던 식상한 상황에서의 말도 아니었고, 모든 것들을 대충 얼버무리는 단어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한 마디 보태자면 발테르의 생각으로 쓰인 다음 부분은 매우 공감되는 구절이었다. 정말 이런 순간은 그 어떤 때보다 활홀하다.
 
나는 되는 대로 네다섯 권의 책을 골라 책상으로 갔다. 첫 페이지를 읽을 때는 마치 딴 세상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라 들짐승이나 보물을 찾는 사람이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다이아몬드나 황금을 원했다. 종종 사막을 헤쳐 나가듯이 페이지들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주위에는 모래와 눈을 멀게 하는 태양이 있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언어들은 바로 모래, 죽은 시체, 돌멩이들이었다. 그것들은 속도를 내지 않았고,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종종 피로와 지겨움 때문에 여행을 시작했던 사실 자체를 저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거의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쯤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페이지와 내가 하나의 현이 되어 똑같은 악기 위에서 진동했다. 그러면 공간이 사라지고 시간이 사라졌다. 도서관이 불타 버려도 난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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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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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누구에게나 운이 있다. 나쁜 운이 있고 좋은 운도 있다. 나쁜 운에서는 최대한 손해를 적게 하고 좋은 운에서는 최대한 베팅을 해서 죽기 살기로 따내는 것, 이게 노름의 비결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운의 막을 내려라. 잃어도 치명적이지 않은 금액을 거는 이유도 그것이다. 운이 늘 좋을 수는 없는 거니까. 이렇게 하면 잃을 때는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을 잃지만 딸 때는 굉장한 돈을 딸 수가 있다. 노름판에서는 내가 프로다. 내 말을 들어라.
p.48
 
노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의 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머지 반은 뭐냐. 진실이다. 거짓말을 하는 걸 수치로 알고 있다. 한두 번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거듭하면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힌다. 그러면 인생의 나머지 반을 포기해야 한다. 노름에 져서 돈 안 내고 도망갔다가 잡혀서 돈 없다고 거짓말하면 인생이 끝나는 게 미국이다. 미국에 총이 많은 것은 인생이 끝난 사람이 쓰든가, 남이 그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주기 위한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문화를 몰라서 고생 많이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외상이나 빚, 일본 말로 '가리'라는 걸 몰랐다. '나가리'는 더욱이 없었다. 노름판은 끝이 없지만 노름꾼은 끝이 있다. 노름판은 계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pp.48~49
 - [꽃 피우는 시간]
 
죽도록 좋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걸 기본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정상에 오른다. 재주가 없어도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 몫은 하게 되어 있다. 재주가 있어도 게으르면 소성(小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성할 수는 없다.
- [소설 쓰는 인간]
 
성석제, <홀림> 中
 
 
+) 성석제의 소설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숨어 있다. 풍자의 필치로 그것들이 되살아나면 상쾌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단언하는 말투가 좋다. 호흡을 짧게 끊으며 문장의 길이를 최대한 압축한다. 그렇게 자신있게 문장을 써내려가는 당당함은 어디서 생길까. 문장이 짧다고 해서 소설의 흐름이 쉽게 끊기진 않는다. 간혹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으나 이 한 권의 소설집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꽃 피우는 시간 - 노름하는 인간]과 [소설 쓰는 인간], [붐빔과 텅빔]을 읽으며 매우 흥미로웠는데, 한 인간의 삶을 추적하며 인생의 교훈을 끌어내는 소설은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는 풍자와 반어, 그리고 역설의 미학이 있다. 거창한 듯 하지만 한 편 한 편을 꼼꼼히 살펴보자. 현재의 인간과 작품 속의 인간의 차이는 없다. 말 그대로 현실의 것을 옮겨 놓은 듯한 그의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단순히 직접적인 제시가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 놓은 반어적 상황으로 풍자한다.
 
재미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로 알려진 이 작가는 요즘 젊은 작가의 소설처럼 신나는 소설을 쓰곤 한다. 그것이 그의 열정이 아닐까. 솔직히 내가 읽고자 했던 소설집이 아닌 다른 것을 골라서 읽었다. 본래의 의도에는 좀 어긋난 부분이 있기에 약간의 지루함이 있었으나(해묵은 소재들의 사용 때문이다.) 그의 필치를 닮고 싶다. 현재진행형의 말투와 깔끔한 묘사력. 군더더기가 없는 그의 문장은 늘 나를 사로잡는다. 꾸밈말이 적은 이런 소설이 나는 좋다. 서술자와 작품의 거리가 적절히 유지될 때 발휘되는 능력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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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내 인생
주세페 쿨리키아 지음, 이현경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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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은 돌고 또 돈다.
 1980년대 말, 세상은 정말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길 기다리며 매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대개 같은 길을 걸었다. 목적도 없이. 매일 같은 길, 같은 쇼윈도, 같은 얼굴들. 상점의 점원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구경꾼을 바라보듯 쇼윈도 너머의 사람들을 내다봤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밖에 없었다.
p.9
 
나는 홀로 태어났고, 지금까지 홀로 살아왔다. 어느 날 이모처럼 혼자 죽을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관계를 맺었다가 이별한다. 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몸은 결국 썩고 분해되어 차츰차츰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 존재에 속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우리의 꿈조차도. 우리의 웃음과 걸음걸이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p.110
 
모두 한없이 즐거운 듯한 분위기인 반면 나는 어디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텔레비전 앞에서 넋을 놓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절망에 빠진 전형적인 낙오자의 모습이다. 나는 아마도 절망에 빠진 낙오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어쩌면 잉태되던 순간 발생했던 몇 가지 오류가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하얀 이력서를 앞에 두고 느끼는 혼란은 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찾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알 수가 없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내 자신과 화해하며 잘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pp.159~160
 
주세페 쿨리키아, <빗나간 내 인생> 中
 
 
+) 주인공 발테르의 아버지가 말한다. 책을 읽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너는 무능력자에 실패한 놈이고 멍텅구리라고. 아버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군대 갈 나이에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일 뿐인 발테르였으니까.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돈을 벌고 안정된 삶을 준비한다. 그러나 발테르는 그런 일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고(물론 이것조차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공익 근무 요원으로 약간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할지 모르나 발테르가 겪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生)에 대한 고민이다. 발테르는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안정을 위해 참고 견디는 사회생활을 거부한다. 그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자유를 즐길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발테르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꽤 컸다. 가난과 무시, 결국 발테르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그 역시 그들의 일원이 되었음을 확인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로맹가리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위트와 인상적인 반어의 기법이 곳곳에 드러나는 좋은 소설이다.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고 했으나 마치 작가의 자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별한 꾸밈없이 소설의 전개만으로, 대화만으로 이러한 반어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나 또한 꼭 갖고 싶은 능력 중의 하나이다. 소설에서든 시에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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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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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까마득하여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의외로 손쉽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에 들렀던 것뿐이다.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산이나 상비약을 챙기듯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
 하지만 가장 기막힌 경우는 따로 있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유유히 빠져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 권여선, [사랑을 믿다], p.13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 권여선, [사랑을 믿다], p.23
 
무엇인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76
 
 
권여선 외, <2008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中
 
 
+)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문학상 수상작품집으로는 보기 드물게 베스트셀러의 입지를 굳힌 책이다. 뭐 좋은 작품이 없나 들춰보려고 구입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들이 좀 있다. 무엇볻 김종광의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 - 율려, 낙서공화국 1>을 읽을 땐 어찌나 공감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작가, 나랑 어째 좀 비슷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가 정말 비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문학계와 출판계를 조롱하는 제법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자의 시선이 통쾌하다기 보다 반갑다고 해야 할까. 풍자라고 하기엔 진지하고 진실하여 약간의 엄숙함을 느낄 정도였다.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는 상당히 읽기 지루했다. 읽으면서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다 지쳐, 왜 이렇게 쓴거지?에 도달했었으니까. 등장 인물의 목소리가 교묘하게 섞여서 들리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을 놓치지 말고 읽어야 했다. 이러한 그의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파격적이라기 보다 낯설었다. 게다가 각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기 보다 제한된 기법으로 독자에게 상당히 침착한 독서를 요구한다.
 
윤성희의 <어쩌면>은 기존에 내가 읽었던 그녀의 소설과 사뭇 달라서 흥미롭게 읽었다. 죽은 영혼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들도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꿈이 있다는 것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는 변함없이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가에 대한 나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나는 가끔 문학상을 주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것에 부합하는 소설이 매년 나올 수 있는지도 솔직히 좀 의심스럽다. 나의 이러한 의문을 잠재울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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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euk 2011-11-2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가요. 덕분에 책 한권 주문했습니다.

우비소녀 2011-11-26 11:2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