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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림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누구에게나 운이 있다. 나쁜 운이 있고 좋은 운도 있다. 나쁜 운에서는 최대한 손해를 적게 하고 좋은 운에서는 최대한 베팅을 해서 죽기 살기로 따내는 것, 이게 노름의 비결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운의 막을 내려라. 잃어도 치명적이지 않은 금액을 거는 이유도 그것이다. 운이 늘 좋을 수는 없는 거니까. 이렇게 하면 잃을 때는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을 잃지만 딸 때는 굉장한 돈을 딸 수가 있다. 노름판에서는 내가 프로다. 내 말을 들어라.
p.48
노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인생의 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머지 반은 뭐냐. 진실이다. 거짓말을 하는 걸 수치로 알고 있다. 한두 번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거듭하면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힌다. 그러면 인생의 나머지 반을 포기해야 한다. 노름에 져서 돈 안 내고 도망갔다가 잡혀서 돈 없다고 거짓말하면 인생이 끝나는 게 미국이다. 미국에 총이 많은 것은 인생이 끝난 사람이 쓰든가, 남이 그 사람의 인생을 끝장내주기 위한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문화를 몰라서 고생 많이 했다. 다행히도 나는 한국에 있을 때부터 외상이나 빚, 일본 말로 '가리'라는 걸 몰랐다. '나가리'는 더욱이 없었다. 노름판은 끝이 없지만 노름꾼은 끝이 있다. 노름판은 계속되고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pp.48~49
- [꽃 피우는 시간]
죽도록 좋아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걸 기본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이 정상에 오른다. 재주가 없어도 부지런한 사람은 자기 몫은 하게 되어 있다. 재주가 있어도 게으르면 소성(小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성할 수는 없다.
- [소설 쓰는 인간]
성석제, <홀림> 中
+) 성석제의 소설에는 기발한 상상력이 숨어 있다. 풍자의 필치로 그것들이 되살아나면 상쾌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단언하는 말투가 좋다. 호흡을 짧게 끊으며 문장의 길이를 최대한 압축한다. 그렇게 자신있게 문장을 써내려가는 당당함은 어디서 생길까. 문장이 짧다고 해서 소설의 흐름이 쉽게 끊기진 않는다. 간혹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는 작품도 있으나 이 한 권의 소설집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꽃 피우는 시간 - 노름하는 인간]과 [소설 쓰는 인간], [붐빔과 텅빔]을 읽으며 매우 흥미로웠는데, 한 인간의 삶을 추적하며 인생의 교훈을 끌어내는 소설은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들에는 풍자와 반어, 그리고 역설의 미학이 있다. 거창한 듯 하지만 한 편 한 편을 꼼꼼히 살펴보자. 현재의 인간과 작품 속의 인간의 차이는 없다. 말 그대로 현실의 것을 옮겨 놓은 듯한 그의 주인공들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을 단순히 직접적인 제시가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 놓은 반어적 상황으로 풍자한다.
재미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로 알려진 이 작가는 요즘 젊은 작가의 소설처럼 신나는 소설을 쓰곤 한다. 그것이 그의 열정이 아닐까. 솔직히 내가 읽고자 했던 소설집이 아닌 다른 것을 골라서 읽었다. 본래의 의도에는 좀 어긋난 부분이 있기에 약간의 지루함이 있었으나(해묵은 소재들의 사용 때문이다.) 그의 필치를 닮고 싶다. 현재진행형의 말투와 깔끔한 묘사력. 군더더기가 없는 그의 문장은 늘 나를 사로잡는다. 꾸밈말이 적은 이런 소설이 나는 좋다. 서술자와 작품의 거리가 적절히 유지될 때 발휘되는 능력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