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믿다 -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권여선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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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까마득하여 도저히 다가설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의외로 손쉽게 실현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순간에 들렀던 것뿐이다. 더 기막힌 건 앞으로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또 찾아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산이나 상비약을 챙기듯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사랑을 믿는다는 해괴한 경험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퇴치하거나 예방할 수 없는, 문이 벌컥 열리듯 밖에서 열리는 종류의 체험이니까. 두 손 놓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니까.
 하지만 가장 기막힌 경우는 따로 있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유유히 빠져나온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 권여선, [사랑을 믿다], p.13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 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 권여선, [사랑을 믿다], p.23
 
무엇인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p.76
 
 
권여선 외, <2008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中
 
 
+)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문학상 수상작품집으로는 보기 드물게 베스트셀러의 입지를 굳힌 책이다. 뭐 좋은 작품이 없나 들춰보려고 구입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들이 좀 있다. 무엇볻 김종광의 <서열 정하기 국민투표 - 율려, 낙서공화국 1>을 읽을 땐 어찌나 공감되는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 작가, 나랑 어째 좀 비슷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가 정말 비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문학계와 출판계를 조롱하는 제법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풍자의 시선이 통쾌하다기 보다 반갑다고 해야 할까. 풍자라고 하기엔 진지하고 진실하여 약간의 엄숙함을 느낄 정도였다.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는 상당히 읽기 지루했다. 읽으면서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다 지쳐, 왜 이렇게 쓴거지?에 도달했었으니까. 등장 인물의 목소리가 교묘하게 섞여서 들리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을 놓치지 말고 읽어야 했다. 이러한 그의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파격적이라기 보다 낯설었다. 게다가 각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기 보다 제한된 기법으로 독자에게 상당히 침착한 독서를 요구한다.
 
윤성희의 <어쩌면>은 기존에 내가 읽었던 그녀의 소설과 사뭇 달라서 흥미롭게 읽었다. 죽은 영혼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들도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꿈이 있다는 것을 잘 살린 작품이었다.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는 변함없이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가에 대한 나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나는 가끔 문학상을 주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것에 부합하는 소설이 매년 나올 수 있는지도 솔직히 좀 의심스럽다. 나의 이러한 의문을 잠재울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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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euk 2011-11-25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가요. 덕분에 책 한권 주문했습니다.

우비소녀 2011-11-26 11:2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