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내 인생
주세페 쿨리키아 지음, 이현경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은 돌고 또 돈다.
 1980년대 말, 세상은 정말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길 기다리며 매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대개 같은 길을 걸었다. 목적도 없이. 매일 같은 길, 같은 쇼윈도, 같은 얼굴들. 상점의 점원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이 구경꾼을 바라보듯 쇼윈도 너머의 사람들을 내다봤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자유로웠다. 하지만 내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밖에 없었다.
p.9
 
나는 홀로 태어났고, 지금까지 홀로 살아왔다. 어느 날 이모처럼 혼자 죽을 것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관계를 맺었다가 이별한다. 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몸은 결국 썩고 분해되어 차츰차츰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 존재에 속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우리의 꿈조차도. 우리의 웃음과 걸음걸이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p.110
 
모두 한없이 즐거운 듯한 분위기인 반면 나는 어디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텔레비전 앞에서 넋을 놓거나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절망에 빠진 전형적인 낙오자의 모습이다. 나는 아마도 절망에 빠진 낙오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어쩌면 잉태되던 순간 발생했던 몇 가지 오류가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하얀 이력서를 앞에 두고 느끼는 혼란은 내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찾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알 수가 없다. 그것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내 자신과 화해하며 잘 지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것이다.
pp.159~160
 
주세페 쿨리키아, <빗나간 내 인생> 中
 
 
+) 주인공 발테르의 아버지가 말한다. 책을 읽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너는 무능력자에 실패한 놈이고 멍텅구리라고. 아버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군대 갈 나이에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는 일 뿐인 발테르였으니까.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나이에 돈을 벌고 안정된 삶을 준비한다. 그러나 발테르는 그런 일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고(물론 이것조차 그에게 맞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공익 근무 요원으로 약간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하기엔 좀 거창할지 모르나 발테르가 겪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生)에 대한 고민이다. 발테르는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안정을 위해 참고 견디는 사회생활을 거부한다. 그것보다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자유를 즐길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발테르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꽤 컸다. 가난과 무시, 결국 발테르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사회생활을 하게 되고 그 역시 그들의 일원이 되었음을 확인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로맹가리의 소설에서 읽을 수 있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위트와 인상적인 반어의 기법이 곳곳에 드러나는 좋은 소설이다.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고 했으나 마치 작가의 자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특별한 꾸밈없이 소설의 전개만으로, 대화만으로 이러한 반어를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나 또한 꼭 갖고 싶은 능력 중의 하나이다. 소설에서든 시에서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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