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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수산나 타마로 지음, 이현경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과거를 지워 버렸다. 과거를 지우면서 미래도 지워 버렸다. 자신에 대한 생각과 의식 대신에 일종의 열기 같은 것만이 존재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을 놀이라고 불렀다. 나는 목에서 불이 날 정도로 크게 말하고 크게 웃었다.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이미 어떤 음료수로도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p.74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런 말을 해 주지 않는 거지?' 나는 인생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어느새 손에 우산을 몰래 들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도 그들은 항상 우산의 보호를 받으며 해가 떴을 때도 우산을 접지 않는다. 하지만 질투심이 나의 도약을 위한 아주 강력한 자극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있었고 그 어떤 존재 속으로 나를 내던질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난 그런 도약이 잠깐 동안밖에 지속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만족을 느꼈다 해도 곧 이어 다소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불편함이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금방 그것이 다른 모든 감정들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고 난 불행해질 것이다.
pp.101~102
"이제 사람들은 말도 두려워하고 있어. 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깨끗한 말들을 사용하지. 말들은 혼자 힘으로는 상처를 주지 않아.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위선이 상처를 내지. 광기는 위대함을 지니고 있어. 광기를 우편 양식같이 평범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의 신비한 힘이 부정되어 버려. 사실 인간 피라미드가 깊이를 상실하고 삼각형으로 변해 가는 어느 지점이 있어. 삼각형은 평면도야. 그러므로 그것을 둥글게 말 수 있어. 네가 그것을 둥글게 말면 삼각형의 맨 꼭대기가 땅에 닿을 수 있지. 광기는 거리를 없애 주고 아주 높거나 아주 낮은 곳에 충격을 주지. 어느 날 우리들의 운명이 그들처럼 변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
p.103
수산나 타마로, <나는 깊은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래였다> 中
+) 이 작품은 이탈리아 작가 수산나 타마로의 장편소설이다. 중심 인물로는 범상치 않은 두 사람, 발테르와 안드레아가 등장한다. 두 젊은 청년을 중심으로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되는 성장 소설이다. 크게 불 / 땅 / 바람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부모와의 불화, 그리고 가정의 화목을 전혀 모르는 발테르와 정신감호소의 환자로 있던 안드레아의 만남은 소설을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읽을수록 쉽지 않은 작품이나 좋은 문장들이 꽤 많은 소설이다. 엮자에 따르면 타마로가 이 책을 '악'에 관한 책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소설의 정점은 자신에게 내민 손길이 아닐까 싶다. 자신과의 화해. 자기 삶에 대한 길찾기. 우리는 흔히 젊었을 때의 끓어오르는 가슴 뛰는 감정을 열정이라고 부른다. 이 글의 두 주인공들은 그 열정을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며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랑이 꽤 자주 사용된 말이기에 이 소설의 말미를 얼마나 멋지게 장식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레네 수녀가 발테르에게 말한 마지막 말, "사랑은 관심이야."라는 대사는 이 소설을 선택한 내 머리를 쓰다듬게 해주는 깔끔한 한 마디였다. 그동안 보아왔던 식상한 상황에서의 말도 아니었고, 모든 것들을 대충 얼버무리는 단어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한 마디 보태자면 발테르의 생각으로 쓰인 다음 부분은 매우 공감되는 구절이었다. 정말 이런 순간은 그 어떤 때보다 활홀하다.
나는 되는 대로 네다섯 권의 책을 골라 책상으로 갔다. 첫 페이지를 읽을 때는 마치 딴 세상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라 들짐승이나 보물을 찾는 사람이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다이아몬드나 황금을 원했다. 종종 사막을 헤쳐 나가듯이 페이지들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주위에는 모래와 눈을 멀게 하는 태양이 있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는데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언어들은 바로 모래, 죽은 시체, 돌멩이들이었다. 그것들은 속도를 내지 않았고,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종종 피로와 지겨움 때문에 여행을 시작했던 사실 자체를 저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거의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쯤 갑자기 기적이 일어났다. 페이지와 내가 하나의 현이 되어 똑같은 악기 위에서 진동했다. 그러면 공간이 사라지고 시간이 사라졌다. 도서관이 불타 버려도 난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