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극장 문학과지성 시인선 190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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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플루트를 배우리라, 나는 마음먹는다

 빗물에 희미하게 뒤섞인 보이지 않는 소리의 손들이 실어 나르는

 낡은 요령(搖鈴) 같은 사립학교 도서관 맨 끝자리에서

 나는 죽음보다 더 뚜렷한 내 삶의 다른 서문(序文)을 꾸미고 있다

 이리저리 거처를 상실한 꿈들이 매일 밤 새로운 빗물에 젖어,

 순간마다 죽는 그 젖은 몸들을 잃어버린다

 주민등록증, 집에 갈 여비, 몇 겹의 꾸깃꾸깃한 지폐처럼

 종적이 묘연해지는 시들을 나는 다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잃은 걸 찾지 않는다는 게 무언가, 나는 다시 플루트를 배우리라, 생각한다

 그 길다랗고 작은 몸은 소리를 뱉으면서, 다시 소리를 죽이는 것 같다

 소리가 엮는 그림이 없고, 나는 소리의 몸이 오라고 호소하는 일말의

 자아(自我)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플루트를 배우리라, 내 여위고

 길쭉한 몸을 대롱 삼아 실눈의 탐색전을 전개하는 빗방울들의 치명적인

 적(敵)이 되리라, 꿈꾼다 꿈꾼다는 게 숙취에서 깨는 첫 눈뜸처럼 무언가를

 삭히려, 삭혀서 지워버리려는 의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플루트를 배우면 플루트는 나를 배울까? 내가 밟고 지나는 순간들은

 그 짧은 감식의 여운을 지우며 내 뒷덜미에 날아드는 매순간의 실족은

 아닌가, 나는 깨닫는다 깨달음의 방망이질에 얻어 맞는다 얻어맞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그런 걸 나는 감히 내 죽었음의 실증(實證)이라고 우겨본다

 플루트를 배우리라 플루트의 작은 주둥이에서 빠져 나오는 몸 없는 소리처럼

 나는, 죽지 않고 다만 지워지리라 서태지쯤 되는 누군가가 먼지 또는

 바람 같은 것으로 떠돌 내 넋을 붙들어 우리 모두 지워지자는 노래 하나

 만들어 부를지도 모르니까

 미래란 게 도대체 있기는 있을랴마는

 

 

강정, 『처형극장』中

 

 

+) 이 시집에서 시인은 죽음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그것은 때로 생에 대한 연민으로, 때로 생에 대한 의지(끌림)로 드러난다. "살아서 죽음을 보여주는 것 / 죽음을 살아낼 테야"[당신을 만난 이후로]라는 시구를 통해서도 나타나듯 화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일부로 묘사된다. 그것은 이분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인 것이다.

 

화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정확히 지적하면 불안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처럼 공포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다 액체의 시간이 가로막는 눈을 뜨고 나는 연극 속에 살아 있다"[촌극(寸劇)의 형태])

 

불안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시인에게 "미래란 게 도대체 있기는 있을랴마는" 그는 "죽지 않고 지워지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넋"을 대신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에게 몸(육체)은 음악(소리), 미술(그림) 같은 역할을 한다. 몸 중에서도 특히 "입"은 입구와 출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집에서 동시에 아우르는 몸의 책임을 보여준다.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기 위해 삶을 선택하거나 하는 것은 시인이 관심 갖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적"이 되는 "유일한 대안, 유일한 결론, 유일한 삶"을 꿈꾼다.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하다면 죽음도, 음악도, 신까지도 그에게 모두 기본적으로 거치는 하나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강정의 첫 시집에서는 시인의 정리되지 않은 관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두번째 시집처럼 촘촘한 사유가 엿보이는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 시집은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만큼 혼란스러운 작품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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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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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되는 밤'

 

 

 알코홀릭alcoholic, 그것은 연약한 한 존재가 자신을 열정적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빠질 때까지, 더 나빠질 때까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과도 같이, 지구 바깥에, 허공에 집을 짓는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나도 너처럼 말수가 적었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엔 얼굴을 붉혔다

 험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 대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땐

 꿈꾸는 약을 샀지 매일 밤 계속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꿈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군

 아름답다는 건 때로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찬물로 세수를 해라 이 엄마가 죽도록 때려줄 테다

 

 공허해질 때까지, 더없이 공허해질 때까지

 

 언젠가는 밤새도록 책이란 것도 읽었지

 너처럼 책 속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짐승처럼

 종이 속에 묻혀 조금 울기도 했지

 그래 손등은 보드라웠고 뺨은 희었다

 아! 뺨이 참 희었는데......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저 언제나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내가 나의 부모였으니까

 

 웨이트리스waitress,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먹다 남긴 음식을 치워주겠다는 뜻이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황병승,『트랙과 들판의 별』中

 

 

 

+) 황병승의 첫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땐 정말 불쾌했다. 도대체 시를 뭐라고 생각하는 시인인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집을 들춰보지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 시집이 나왔다. 당연히 나는 모른 척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시집을 읽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의심이 들었다. 변한 것은 분명 아닐텐데, 어째서 그의 시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세미나를 하면서 감히 '낭만적 거짓'이란 말을 뱉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그랬다. 그의 이번 시집에서는 낭만적인 거짓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좀 거칠게 말한다면 내가 말한 그것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논의하는 요즘 시단의 논제일지도 모른다. 리얼리티와 환상성의 경계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시인들의 대표주자로 황병승을 논의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환상 혹은 환상성을 언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환상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그들의 시작법에 대해 환상이란 논의를 하려거든 환상을 정의해야 하는 것이 우선시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그런 말로 설명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로선 쉽게 풀 수 없는 질문이다. 사실 어떤 대답이든 지금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바로 그가 서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끌고가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잘 짜여진 각본, 누군가 그의 시집을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이번에 그가 독자로 보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느정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각본이었단 말인가. 그는 어디까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그에게 출발점과 도착점은 없다. 그에게 참, 거짓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독자들을 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그의 거만한 시선은 이번 시집에서도 시선은, 적어도 그는 시작하고 끝낼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시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황병승에 대해서는 평가를 보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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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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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역사를 구상하는 사고의 틀은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거기서 산출된 이야기는 국민(민족) 의식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의식까지도 강하게 구속하고 있다.

                                                                                   p.32

 

 이렇게 해서 근대의 국민을 독자로 가진 비문은 이윽고 한국인 독자도 획득함으로써 근대 한국의 텍스트로서, 고구려 텍스트로서의 비문에는 없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였다. 비문은 바로 근대의 표상과 함께 소생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70년대 이후의 비문을 둘러싼 논쟁은 비문의 표상을 둘러싼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근대 텍스트로서의 비문의 표상은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에 알맞은 이야기의 역할을 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근대 텍스트로서의 비문은 동아시아에서 국민 형성을 위한 담론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 것이다.

                                                                            pp.77~78

 

 좋든 나쁘든 우리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일국사의 틀 속에서, 더구나 근대의 컨텍스트에 끌어당겨서 지난 100년 동안 역사를 구상해 왔다. 그때문에 '사실'(史實)이라고 하는 것도 일국사라는 패러다임의 이론 부하성과 근대의 편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일국사를 넘어서는 광역권에서 새로운 역사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려 한다면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이전의 역사적 '사실'(事實)이 재구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근대의 컨텍스트에 끌어당겨진 고대를 근대의 컨텍스트에서 다시 읽는 작업도 조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79

 

이성시, 『만들어진 고대』 中

 

 

+) 근대의 컨텍스트에 끌어당겨진 고대가 근대 체제 속의 컨텍스트 속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 텍스트로 변한 모습을 살펴보며, 동아시아 고대 텍스트를 고대의 컨텍스트 안에서 새롭게 역사상을 구축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만들어진 고대'는 동아시아  고대사가 명확한 정치적 의도를 갖고 만들어졌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목이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민족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묶기 위해 이데올로기로 '민족'을 이용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러니까 단일민족이란 표현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짙은 말이다.

 

생각보다 꽤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필자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고대가 그 지역 근대 국민 국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대'로 변용된 현상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 입증한다. 독자로 하여금 그의 생각에 동조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학자이다.

 

 

* 일국사 - 국민국가를 이념상의 구성원으로 삼는 현대 국제 사회에서 지배적인 사고. 국익을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 사고를 역사에 투영시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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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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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마. 조금 띄엄띄엄 살아봐. 가끔 '삶의 질이라는 게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도 좀 해보면서 말이야."
                                                                                 p.62

 

 이상한 삶이다. 마치 샌드백 같은 삶. '그래, 때릴 테면 때려봐라'는 식의, 자신의 육체에 어떠한 명예도 보호막도 덧씌우지 않는 그런 삶.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삶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삶이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 화가 치민다. 마치 내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것 같다. 실컷 얻어터진 얼굴로 거울 앞에 선 기분이랄까.

                                                                         pp.125~126

 

 "불행은 결코 함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p.164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p.182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p.226

 

 

김언수, 『캐비닛』中

 

 

+)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 말을 한 지 꽤 오래전 같다. 누군가 내게 김언수의 소설이 재밌으니까 읽어보라고 권했을 땐,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여 보았다.

 

소재도 신선했고, 작가가 다루려고 했던 이야기도 비교적 확실히 드러낸 것 같다. 환상적이라는 말보다 우리가 꿈꿨던 세계를 맛 보여준 작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작가의 한 손이 그 세계를 붙들고 있다면, 다른 한 손은 결코 현실을 놓지 않는다. 독자가 잊을만하면 깨우쳐 준다. 삶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의 위트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는데, 진솔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그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쩌면 그 어떤 인문학 서적보다 이런 소설 한 편이 더 오래 남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철학적인 문체는 아닌데, 읽고 나면 철학책에서 보았던 글줄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유쾌하게 읽어나갔지만, 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랑말랑하게 현실과 상상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작가의 선택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말랑말랑한 리얼리티, 그러니까 공상이 아닌, 잔뜩 부풀린 상상이 아니라라는 점은, 슬그머니 쏟아내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착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언제가 다시 읽어도 가슴에 남는 문장이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소설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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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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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듯하지만, 정작 그것을 돌이켜보는 것은 안타깝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곳에 대한 기억과 그곳에 대한 기대에는 모두 순수함이 있다. 각각의 경우에 도드라져 나오는 것은 장소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대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나는 나의 활동에 보탬이 되거나 직접적으로 활력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히 나를 가르치기만 하는 모든것을 싫어한다."

                                                              「호기심에 대하여」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수밖에 없다는 것.

                                                              「숭고함에 대하여」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中

 

 

+)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은 치밀한 사색이 강점이라고 생각된다. 감수성을 자극하는 몇 마디 가벼운 문장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에 내재된 생각의 깊은 골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무거질 수 있는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에 따라 매우 가벼워진다. 나는 그런 그의 문장에 매력을 느끼는데, 단순히 교양서라고 하기엔 남는 것이 참 많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책을 한번쯤 읽고 가야지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가 언급한대로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한다는 점에서 기대와 흡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과 기대를 동반하는 여행을 떠나며 이 책 한 권쯤 갖고 가도 되리라 생각한다.

 

일탈을 꿈꾸며 여행한다는 그동안의 내 생각에 새로운 전환을 불러 일으킨 책이다. 여행은 길을 찾는 것도 아니며 쉬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상상력을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은 것이다. 여행이라는 말은 육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정신의 움직임이었다. 눈과 귀와 손이 따라 움직이는.

 

몇번이고 다시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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