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과 들판의 별 문학과지성 시인선 337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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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되는 밤'

 

 

 알코홀릭alcoholic, 그것은 연약한 한 존재가 자신을 열정적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빠질 때까지, 더 나빠질 때까지

 

 스스로 대답해야 하는 존재들, 끝없이 질문하는 존재들과도 같이, 지구 바깥에, 허공에 집을 짓는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는 나도 너처럼 말수가 적었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엔 얼굴을 붉혔다

 험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가끔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 대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땐

 꿈꾸는 약을 샀지 매일 밤 계속될 것만 같은 아름다운 꿈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던 것 같군

 아름답다는 건 때로 사람을 맥 빠지게 만드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종교를 갖는다는 것, 찬물로 세수를 해라 이 엄마가 죽도록 때려줄 테다

 

 공허해질 때까지, 더없이 공허해질 때까지

 

 언젠가는 밤새도록 책이란 것도 읽었지

 너처럼 책 속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짐승처럼

 종이 속에 묻혀 조금 울기도 했지

 그래 손등은 보드라웠고 뺨은 희었다

 아! 뺨이 참 희었는데......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그때도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저 언제나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내가 나의 부모였으니까

 

 웨이트리스waitress, 네가 먹을 음식과 네가 먹다 남긴 음식을 치워주겠다는 뜻이다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때까지

 

 

 

황병승,『트랙과 들판의 별』中

 

 

 

+) 황병승의 첫 시집을 처음 읽었을 땐 정말 불쾌했다. 도대체 시를 뭐라고 생각하는 시인인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집을 들춰보지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 시집이 나왔다. 당연히 나는 모른 척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시집을 읽고 말았는데, 이번에는 의심이 들었다. 변한 것은 분명 아닐텐데, 어째서 그의 시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세미나를 하면서 감히 '낭만적 거짓'이란 말을 뱉어버렸다.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 그랬다. 그의 이번 시집에서는 낭만적인 거짓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좀 거칠게 말한다면 내가 말한 그것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논의하는 요즘 시단의 논제일지도 모른다. 리얼리티와 환상성의 경계에서 시를 만들어내는 시인들의 대표주자로 황병승을 논의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환상 혹은 환상성을 언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환상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그들의 시작법에 대해 환상이란 논의를 하려거든 환상을 정의해야 하는 것이 우선시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를 그런 말로 설명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로선 쉽게 풀 수 없는 질문이다. 사실 어떤 대답이든 지금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바로 그가 서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끌고가는 지표가 된다는 점이다.   

 

잘 짜여진 각본, 누군가 그의 시집을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이번에 그가 독자로 보이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느정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각본이었단 말인가. 그는 어디까지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그에게 출발점과 도착점은 없다. 그에게 참, 거짓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독자들을 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그의 거만한 시선은 이번 시집에서도 시선은, 적어도 그는 시작하고 끝낼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시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황병승에 대해서는 평가를 보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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