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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마. 조금 띄엄띄엄 살아봐. 가끔 '삶의 질이라는 게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도 좀 해보면서 말이야."
p.62
이상한 삶이다. 마치 샌드백 같은 삶. '그래, 때릴 테면 때려봐라'는 식의, 자신의 육체에 어떠한 명예도 보호막도 덧씌우지 않는 그런 삶.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삶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삶이라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래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꾸 화가 치민다. 마치 내 자신이 모욕을 당하는 것 같다. 실컷 얻어터진 얼굴로 거울 앞에 선 기분이랄까.
pp.125~126
"불행은 결코 함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p.164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p.182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p.226
김언수, 『캐비닛』中
+) 모처럼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는데, 그 말을 한 지 꽤 오래전 같다. 누군가 내게 김언수의 소설이 재밌으니까 읽어보라고 권했을 땐,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여 보았다.
소재도 신선했고, 작가가 다루려고 했던 이야기도 비교적 확실히 드러낸 것 같다. 환상적이라는 말보다 우리가 꿈꿨던 세계를 맛 보여준 작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작가의 한 손이 그 세계를 붙들고 있다면, 다른 한 손은 결코 현실을 놓지 않는다. 독자가 잊을만하면 깨우쳐 준다. 삶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의 위트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들었는데, 진솔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그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쩌면 그 어떤 인문학 서적보다 이런 소설 한 편이 더 오래 남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철학적인 문체는 아닌데, 읽고 나면 철학책에서 보았던 글줄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유쾌하게 읽어나갔지만, 마무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가 말랑말랑하게 현실과 상상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작가의 선택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말랑말랑한 리얼리티, 그러니까 공상이 아닌, 잔뜩 부풀린 상상이 아니라라는 점은, 슬그머니 쏟아내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착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그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언제가 다시 읽어도 가슴에 남는 문장이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소설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