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02
앤소니 버클리 콕스 지음, 황종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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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우-도일-반다인, 퀸으로 이어지는 정통계보의 본격추리소설은 모든 미스터리 형태의 원형이 되었고, 지금도 매니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초기 정통추리소설은 그것의 태생적 본질적 특질상 몇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묘사의 부실함, 리얼리티의 결여, 작위적인 설정, 인물의 정형성 등등...

이러한 한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본격미스터리의 황금시대인 1920년대부터 몇몇 선견지명을 지닌 작가들에 의해 지적되고 그 극복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그들 중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작가로 나는 버클리 콕스를 꼽고 싶다. 버클리 콕스의 주요작품들은 모두 당대의 정형에서 벗어나 있다. <살의>의 과도한 심리묘사, <독초콜릿 사건>의 주인공 탐정의 실패 혹은 주인공 탐정이 누구인지 불분명한 점, 그리고 <시행착오>는 기본패턴을 뒤엎고 탐정이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이 아닌 범인이 자신의 범죄를 증명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 등은 모두 반다인이 주장했던 법칙들을 위반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버클리 콕스가 절대 본격물이 아닌 다른 장르의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의>를 제외한 두작품도 본격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미트가 체제 밖의 개혁자라면, 버클리 콕스는 체제내의 개혁자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작품은 대개의 추리소설이 가지는 살인-체포-증명의 패턴 속 주체가 탐정이 아니라 범인이다. 패트 매거의 <탐정을 찾아라>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구성이지만, 비록 범죄자의 심리와 동기의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도, 자신의 범죄를 증명해가는 과정의 논리적 완성도가 아주 치밀하기에 범죄소설이나 스릴러라기보다는 본격물로 분류함이 옳을 듯하다. 특히 후반부의 법정 장면 묘사는 가드너의 작품을 연상케할 정도로 뛰어나면서 <살의>와는 달리 과도한 심리묘사는 피하는 본격물의 특징을 따르고 있다.

작품을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추리소설을 제법 읽어 많이 약아진 나의 머리는, 더 이상 이 작품이 사용한 것 같은 서술 트릭에 속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피터 러브시의 <가짜 경감 듀>를 읽을 적에도 느낀 것이지만, 추리 매니아로서 많은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나 클리세나 어떤 패턴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좀 서글픈 일인 것도 같다. <미궁과 사건부>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을 부러워한다고 말한 엘러리 퀸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가끔은 책장에 독을 발라 살해하는 수법이나 비밀통로, 쌍둥이의 대역 같은 구닥다리 트릭에도 전율을 느꼈던 초심자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도일이나 반다인을 아직 한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결말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너무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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