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레드메인즈 동서 미스터리 북스 32
이든 필포츠 지음, 오정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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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포츠라...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작가다. 크리스티가 스승이라 불렀다는 작가이고 오래된 미스터리 베스트텐에 작품을 두개나 올리는 요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소리>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빈약한 트릭, 그다지 놀랍지 않은 결말, 섬세하지도 않고 날카로운 맛이 없는 밋밋한 추론... 반다인, 크리스티, 퀸 등에 한참 뒤진다고 생각했다. 필포츠 정도에게도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오겠냐며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별로 아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를 실제로 읽고나니 그간의 나의 필포츠를 비롯한 제이황금기 초반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가혹하고 건방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제일황금기의 단순 추리퀴즈같은 단편추리소설의 약점을 극복하고 문학으로서의 추리소설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또한 이들과 반다인, 크리스티, 퀸 등 3대 장편미스터리 거장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매우 짦으나 이들이 3대 거장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빨강머리 레드메인즈>역시 그 시기 뛰어난 작품들의 미덕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짜임새있는 구성에 강렬하지는 않지만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는 전개와 설득력 있는 추론.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보다 진지한 탐구와 뛰어난 묘사... 특히 이작품은 범인과 탐정의 치열한 심리적 대결구도가 잘 짜여져 있다. 탐정소설이라 불리는 여타의 작품과는 다르게 탐정과 범인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탐정이 아닌 범인 쪽에 감정이입하여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수수께끼를 구성하고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진상을 숨기는 재주가 3대거장에 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인가! 머리가 좋은 독자가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중간 쯤에서 범인을 알아맞추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용의자수도 극소수이고 반전의 강도도 약한 편이다.

<빨강머리 레드메인즈>는 몇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을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장점을 외면하고 단점만을 확대해서 보아왔던 내가 이같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미스터리 독자로서 분명한 즐거움이고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게 해준 동서에 고마움을 느낀다(녹스의 <육교살인사건>과 부시의<완전살인사건>도 출판해주면 더욱 감사하겠다). <어둠의 소리>와 <빨간집의 비밀>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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