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전부가 현 남성 중심 사회의 미러링이다. 가모장제 사회에 여성들은 여러 요직에 분포하지만, 남성들은 조신하고 예쁘게 집에서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며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는다.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현실세계의 여성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이갈리아의 맨움들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는 한편, 이갈리아에서 존중받는 여성성에 대해서는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1. 메이드맨의 무도회와 참나무숲
페트로니우스는 메이드맨의 무도회에 가서 그로 메이도터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영어로는 Maydaughter일 것 같았다. 마치 영어 성 중에 ~son이나 ~man 으로 끝나는 이름처럼) 와 섹스를 한다. 삽입섹스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세하게 묘사가 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섹스는 거의 항상 삽입섹스를 기준으로 한다. 강간의 기준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갈리아에서 섹스는 삽입섹스는 아닌 것 같다. 섹스장면은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약간 혼란이 오기도 했는데, 어쨌든 쉽게 말하면 현실 세계의 남성과 여성을 움과 맨움으로 바꾸어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했는데, 첫 번째는 페니스의 삽입과 섹스의 완성은 분리해서 생각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강간에 대한 점이었다. 특히, 우리 사회는 강간의 가장 나쁜 점 중 하나로 원치않는 임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꼽는다. 물론 나쁜점이 맞는데, 강간의 원인이 되는 욕구가 성욕이라기 보다는 정복욕이나 과시욕, 권력욕과 가깝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심리적, 육체적 타격과 사회적인 낙인이 가장 나쁜점이라고 생각한다. 페트로니우스가 참나무숲에서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이런 점들을 더 확실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2. 탄생궁전
나는 솔직히 말하면 출산에 대해서 스스로가 긍정적인 인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를 기억해봤을때, 엄마의 배가 점점 불러오면서 나는 점점 두려웠다. 엄마의 그 임신한 배가 나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었고, 임신 중이었던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좋은 엄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커지는 배가 무서웠다. 성장하면서도 "임신" 혹은 "출산" 과 관련하여 내가 접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임신"으로 퇴직을 강요당함>, <"출산" 하다가 사망>, <"출산" 휴가 후 퇴직을 강요당함>, <여성들은 "임신" 하면 회사를 그만두니까 애초에 뽑지 않는게 좋음>, <"임신"과 "출산"은 몸매를 망참>, <"임신"과 "출산"으로 경력 단절> <"출산"의 고통> ... 헤아려보면 끝도 없다. 그에 반해 "임신"과 "출산" 관련하여 내가 접할 수 있는 "긍정적"인 단어들은 그것들을 지나치게 신성시하여 인위적으로 느껴지는 환상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임신"의 기쁨> ("임신" 하면 몸매가 망가지고 피로도 밀려오고 힘들다면서), <"출산"의 기쁨> ("출산" 하면 죽을 것처럼 아프다던데.) 등. 거기다가 모성애를 당연시하는 표현까지.
어쨌든 내가 사회적으로 배운 임신과 출산은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고 (=경제력과 경력을 잃고), 건강을 잃을 수도 있고, 몸매로 상징되는 여성성을 잃는 과정이고, 굉장히 아프고 힘든 과정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갈리아 탄생궁전에 관한 이야기를 읽자 이 모든 것은 (의학적으로 맞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사회적으로 학습한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갈리아에서 움의 출산은 여러 모로 존중받고, 현실세계와는 달리 <진짜로> 대단한 것으로 간주된다. 나는 탄생궁전 부분은 읽으면서 이런 분위기였다면 나는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스스로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네가 낳았으니까 네가 키워. 엄마랑 애착이 제일 중요해"라는 숨막히는 이야기보다, 낳은 것은 움이니 키우는 것은 맨움이 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물론 움과 맨움의 불균형한 관계는 나도 싫지만) 숨통을 틔웠다든가 하는 느낌도 있었다.
3. 복장
본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맨움이 바지를 입을 수 없는 이유는 바지에는 페니스와 음낭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늘 들어왔지만."
우리사회는 이상하다. 남성의 생식기는 통풍이 잘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남성이 치마를 입었던 역사는 거의 없다. 도포를 입더라도 밑에는 바지를 입었다. 물론 여성의 생식기라고 통풍이 안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별 이유도 없이 치마만을 입을 것을 강요받았다. 전통적인 서구적 사회에서 남성이 살갗을 드러내는 것은 미성숙한 것으로 치부되는데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의 반바지라든가) 여성은 살갗을 드러낼 것을 강요받는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정장은 스커트정장이었다) (물론 스타킹 등을 신기도 했고 옛날에는 스커트의 길이도 길었겠지만). 그래서인지 남성들이 정장을 입고 단체로 서 있을 때 여성이 스커트 정장을 입고 중간에 서 있으면 드러난 다리 때문인지 몹시 이질적으로 보인다. 위 대사에서 나오다시피, 바지 안에 들어갈 "부피큰 것"을 가진 것은 남성 쪽인데도, 여성은 왜 그렇게 오랜동안 배제당해왔을까.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저 대사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된다. 현대 사회의 남성이라면 누구나 바지를 입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성 고정관념을 이루는 이유들은 말도 안되는 것들이 아닐까, 하는 작은 의심을 싹틔우기에 충분한 대사였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생각타래들과 함께, 나는 페트로니우스에게 깊이 공감했다. 나는 내가 억압받는 성이라는 것이 싫어서 반대의 성을 가진 상황을 수십 번 가정해 보고 상상해보며 살아왔음에도, 다른 성이 억압받는 성이 되는 것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어디선가 남성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오히려 움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단순히 특이한 이야기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소통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