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처음 읽는 바다 세계사 현대지성 테마 세계사
헬렌 M. 로즈와도스키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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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을 중심으로 역사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신선한 시각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중반~2/3 이후에는 번역때문인지 원서자체의 문제인지 몰입감이 급격히 줄어들어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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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
이동옥 지음 / 현암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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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가톨릭 신자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을 이야기들을 다룬다.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고, 새로 알게된 내용들도 있었다. 꼭 여성 신자가 아니라도 생각해볼만한 주제들이며, 현대 교회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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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성별은 무엇일까? 


천사의 성별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에 내가 물어보면, 어른들은 신도 천사도 성별이 없고 따지는 의미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니까, 인간의 기준이나 상식과는 아예 상관없는 존재들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성당에 가면 신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는 가끔 상상하곤 했다. 하느님이 성별이 없는 존재라면, 어머니라고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아버지'라고도 '어머니'라고도 부르지 않는 게 더 공평한 것 아닌가? 


예수님은 왜 남자일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거면, 예수님은 공평하게 여성으로 태어났어야 하는게 옳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과연 우리가 지금 아는 예수님이 했던 일들을 다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몇 살 때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린아이도 세상을 판단하는 눈치가 있다. 


굳이 눈치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것이, 성당에 가면 미사 집전도 남성인 신부님이 하고, 수녀님들은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미사 집전을 돕는 어린이들도 복사단의 남자어린이들이다. 여자어린이들은 독서나 성가대를 할 수 있었지만, 그 역할은 남자어린이도 할 수 있었다. 단지 남자어린이들은 다 복사단을 하고 싶어해서, 성가대나 전례부에는 여자어린이들이 더 많았던 것 뿐이다. 평화로운 성당 내부에서도 남녀 역할이 심하게 나뉘어있고,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데,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인간 여성으로 태어났더라도 하느님이 주신 미션(?)을 전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지나친 상상이었을까? 


성인이 되고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 학교 근처 성당에서는 여성, 남성 상관없이 청년미사에서는 복사를 할 수 있었고, 시간을 내서 성서공부도 했다. 성경에 써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 "신학자의 눈으로, 기록자의 눈으로 본" 이야기라는 설명도 자주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성경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을 읽어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당시 기득권의 눈으로 본" 기록들을 기준으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많은 일들이 관습처럼 이어진다. 피임이나 낙태는 여전히 죄고, 동성애자들도 교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유사이래 여성은 '거룩하게 되려고 수행하는' 남성들을 방해하는 유혹자로 취급되었고, 그런 시각은 단지 그리스도교 문화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보인다. 


여성으로서의 나는 언제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남성)을 유혹하는' 사람이거나 '아름답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거나 아름다워서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시각에 동참해, 중고등학생들에게 언제나 몸가짐을 조심하고 단정하게 처신하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지겨웠다. 그렇지만 단정한 학생이 되는 것에 실패했을 때에 받을 수도 있는 불이익이 너무 커서 반박하지도 못했다. 


20대-30대가 되고 여성의 몸을 도구로 보는 사회에서, 피임을 꼭 해라, 하면 안된다, 낙태를 하면 안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사회는 이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종교의 잣대, 전통의 잣대, 윤리의 잣대, 그리고 가끔은 과학이나 통계를 가져다가 입맛대로 사용한다. 


그 이후에 중년 이후의 여성의 삶은, 특히 나의 어머니 세대나 그 이전 세대의 삶은, 대부분의 경우 본인의 에너지를 가족을 위해 헌신했고 돌봄노동을 제공했으나 본인이 돌봄을 받아야할 때가 되면 가족으로부터 되돌려받는 것은 요원한 삶이 많다. 이제 나이를 먹은, 누군가 돌보아주어야 하는 그들은 이제 어떡해야하나? 


종교는 고대부터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사람들에게 윤리적 기준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법과 같은 사회적 틀을 제공하기도 하며, 기쁨과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기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언제나 실천하지는 못했더라도-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고통을 나누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왔다. 나는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다인들에게는 혁명적인 인물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갈등을 빚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셨다. 예수님이 21세기에 등장하신다면, 현재 우리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는 부조리한 일들을 다 뒤엎어버릴지도 모른다. 


여전히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은 쉽지 않지만, 교회가 역사속에서 계속 노력해왔던 것처럼, 여성의 고통과 여성이 느끼는 부조리함에 귀기울여주고 변화시켜나가려는 노력을 해나갔으면 좋겠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김동옥 지음

 현암사

 2018.10. 



이 책은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이자 제도종교의 신자로서 혼란을 겪으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쓴 글이다. 종교가 여성 억압에서 눈을 흐리는 ‘아편‘이 될 수도 있지만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세상이 제시하지 않는 통찰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교는 여성에게 성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여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지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종교는 여성에게 가정 내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권고하기보다는 "불평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피해자인 ‘착한‘ 여성에게 침묵하고 희생하길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낙태한 여성과 낙태된 태아를 위한 기도회와 미사가 열리고 있지만 이러한 행사를 여성 신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예식은 불쌍한 태아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고, 낙태가 살인에 해당하는 중죄임을 재확인 시킴으로써 여성은 죄의식 속에 속죄의 시간을 갖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동성애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더라도, 동성애 관련 교리를 공식적으로 수정한 것은 아니다. 또한 교황의 발언이 진보적이라고 해석되는 것은 그동안 가톨릭 교회가 그만큼 사회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고 성소수자의 고통과 인권에 둥감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수도 공동체는 이성애자를 위한 제도이기에 동성애자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마르타와 마리아는 각기 다른 역할을 선택했다. 마르타는 늘 분주하고 힘든 일을 자처하고 희생하지만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주님의 집인 성당에 와서도, 피정 중에도 기도와 전례에 몰두하지 못하고 청소와 음식 만들기에 전념하는 여성은 집을 떠나도 안식을 얻지 못한다. 반면 마리아는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기도 생활에 몰두한다. "당신은 남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나쁜 여성입니다" 라고 비난받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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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미니멀리즘이다. 그렇지만 미니멀리즘은 유투브나 인스타그램에서 많이 소비되는 관념인데다 애초에 미술사조같은 느낌도 있는데, '제로 웨이스트'라고 쓰니, 이 책의 저자가 실천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해 정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해주는 느낌이 든다. (이래서 제목 짓기가 중요한가보다)


제목부터 블로그 등에 연재했던 글을 책을 엮은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드는데 구매를 결정한 것은, 나로써는 조금 의외의 일이다. 최근에 올린 독후감들은 소설이나 에세이같은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종류의 책은 비소설 분야의, 생각을 많이 해야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일수록 독후감 쓰기가 어려워서 읽자마자 독후감을 쓰지 못하고 몇 개월씩 묵혔다가 쓰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최근 나도 쓰레기를 덜 만들고 꼭 필요한 소비만 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아져서, 내 최근 관심사에 부합하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자, 술술 읽히면서 금방 완독해버렸다. 저자가 글을 편안하게 잘 쓰는 편이기도 했고, 여러 번 고심하고 고쳐서 적은 글인 것 같았다. 책 구성도 마찬가지고. 자원을 낭비하는 것을 꺼리는 최소주의자가 책을 낼 때는 그만큼 의미있는 내용으로 옹골차게 구성할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해내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을 동반하는 일이다. 일관성 있는 저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소일 님은 "정말 이런것까지!" 라고 생각될 정도로 최소주의자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는 톤이 좋았다. 나도 평소에 생각만 하고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데, 책을 읽으면서 <아,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는데 나는 이런 작은 것도 못하네> 라고 스스로 작아지기보다는 <앗. 그래! 이렇게 작은 것부터 할 수 있으니까 당장 나도 작은 것부터라도 생각해봐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실천의지가 생겼다.


무엇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진짜로 무언가 시작하면 작은 것 하나하나를 신경쓰는 것이 큰 일이 되는데, 작은 것들 하나하나, 통계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접근하는 저자의 시각이 좋았다.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특히, 화장실에서 쓰는 휴지의 양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였다. 화장실 휴지는 물에 녹아서 변기속으로 사라지니까, 쓰레기를 버린다는 행위와는 연관짓지도 못했던 구석이다.


나도 판데믹 전에는 개인 텀블러를 들고 다니며 물도 마시고 커피도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하기도 했다. 미국에는 한국같은 정수기가 별로 없고 대부분 체육관에서나 쓰는 식의 음수대만 있을 뿐이라 불편해서 컵을 들고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일리노이의 겨울은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나 커피를 집에서 만들어서 진공 텀블러에 넣어가지고 학교에 가면 오전 동안은 따끈한 차를 홀짝홀짝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이후에는 뜨거운 물 구하기가 좀 어렵지만 찬물이라도 마실 수 있었고. 그 때부터 항상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던 질문이 있었다. 스테인리스 진공 텀블러를 대체 몇 번 써야 일회용 컵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서 환경에 덜 나쁠 수 있을까? 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 위해서 구글 검색을 좀 해봤다. 한 번의 검색 후 첫번째 들어간 페이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재사용이 가능한 컵을 쓸 경우, 몇 번을 써야 일회용 컵을 사용하는 것보다 온실가스를 덜 만들 수 있을까? 

(출처: https://www.anthropocenemagazine.org/2017/07/reusable-or-disposable-which-coffee-cup-has-a-smaller-footprint/)


의외로 세라믹 컵이 제조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많이 만드는 모양이다. 그래도 세라믹 컵은 집에서 주로 쓰고, 최소 몇 백번은 쓸테니 걱정이 덜 된다. (그런데 왜 세라믹 컵만 감소 추이가 다를까? 궁금하다) 의외로 스테인리스 컵은 약 30-50 회 정도 쓰면 일회용품을 쓰는 것에 비해서 이득인가보다.


요즘에는 가게들에서 개인 그릇/컵을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데다가 (한국은 잘만 하던데도!), 요즘엔 하도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밖에서 굳이 뭘 사먹거나 사마시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한 내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아니면 물병), 내 스테인리스 빨대를 들고 다닐 거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시도해보려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면서 독후감을 끝내려고 한다. 첫번째로는, 나도 손수건을 들고 다녀보려고 한다. 이미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가는 날이면, 헝겊 밴대나(?)로 도시락통과 귤 같은 것을 포장(?)해서 가곤 한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헝겊이 약간의 음식을 흘렸을 때나 식탁보같은 것이 필요할 때 요긴하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두어개 더 들고다니면서 필요할 때 휴지 대신 써보려고 한다. 아마도 안 쓰는 옷으로 만들면 더 좋겠지! 두번째로는, 얼마 전에 찢어져서 못 입게 된 바지가 있는데, 그걸로 크로스백같은 걸 만들어보려고 한다. 색깔도 예쁘고 찢어진 부분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서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했던 바지였다. 실제로 시도한 후에 후기도 남겨봐야지. :) 



인용구 모음*


처음 지진이 나고 일주일 정도는 지진과 해일에 도시의 모든 것이 쓸려 가는 장면만 텔레비전에서 끊임없이 방송되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의 문명이 흔적 없이 휩쓸리는 것을 반복적으로 듣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여진도 잠잠해지고 지진의 충격에서 벗어날 때쯤부터는 텔레비전에서 드라마, 영화, 만화, 예능과 같은 프로그램은 방영하지 않고 복구 상황에 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불안한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공영 광고만 반복되었다. '서로 인사를 하자. 응원으로 힘을 내자.' 분명 밝고 기운나는 것이었는데, 무한정 반복되는 광고를 보다 보면 힘이 빠지는 것은 왜였을까?

(...)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후 일본에서는 단사리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은 이미 우리도 익히 알고있는 미니멀 라이프 유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대규모 자연재해를 주기적으로 겪는 나라/문화는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될까? 미국에서도 대규모 자연재해가 종종 일어나지만 (캘리포니아의 산불이라든가, 남부의 허리케인 피해라든가), 미국은 워낙 커서 그런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이 보인다. 서울에 살 때 홍수 소식을 듣거나 태풍 피해 소식 같은 것을 들으면, 그 소식을 전하는 매체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 <아. 우리가 좀더 단단히 준비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지진이나 쓰나미같은 것은 인간의 준비 여부와는 상관없이 피해가 크니까, 인간으로서는 무력감에 빠질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니멀라이프 유행이 생긴거라니 어쩐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최소주의자에서 나아가 물건의 생산과 소비, 사용, 처분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도덕적 양심을 담아 '윤리적 최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쩐지 이런 유행이 한동안 MZ 세대들 사이에서 돌아다닐 것 같다. 그 끝에는 지금까지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 많은 자본과 자원을 투자해야했던 일들이 가상현실이나 그래픽으로 구현되는 일들도 많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쇼케이스같은것들?) 물론 작년부터 이어진 비대면 문화가 이런 트렌드를 가속시킬 것도 같다.


일회용 아기 기저귀만 해도 30-40년이 소요된다고 하니, 그 말인즉슨, 내가 싼 똥 기저귀가 아직도 분해되지 않은 채로 어딘가에 매립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대목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나도 분명히 아기때 일회용 기저귀를 썼겠지? 그리고 그 기저귀들이 소각되지 않았다면 어딘가 매립되어있을텐데, 아직까지도 분해되지 않고 남아있을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게다가 그 이후로 모든 아기들의 기저귀가 다같이 모여있을테지. 내가 쓴 기저귀를 다 모은 부피는 내 몸의 부피보다 훨씬 클텐데.


완전히 '0'이 아니더라도 '100'에서 '99'로 조금 줄이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쓰레기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아무리 경제적 가치가 높은 물건이어도 내게 쓸모가 없다면 그 물건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귀걸이같은 것들. 대학생 때 귀걸이 선물을 한두번정도 받았다. 사람들은 성인 여성이면 으레 귀를 뚫었겠거니 하고 "무난한 선물" 로 귀걸이를 잘 고르는데, 나는 실은 귀를 뚫지 않았다. 내가 귀를 뚫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되면 사람들은 미안해했고, 나도 어쩐지 미안했다. 선물받은 귀걸이는 다행히 귀걸이 하는 것을 좋아했던 동생에게로 갔다. (ㅋㅋㅋ)


잠시 스쳐 지나가는 물건은 인연이 아니다. 거절하자. 어떤 물건이 쓰레기가 되고, 어떤 물건이 내가 잘 사용하는 것인지 분류할 수 있게 되면 기능이 없는 물건은 사양하게 된다. 내가 아끼는 텀블러를 애용하는 일이 결국 일회용품 컵을 사양하는 이유가 된다.

거절하는 것도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고, 종종 여러 사람을 번거롭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본인에게 필요없는 것은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손수건 휴대하기: 제로 웨이스트 필수품을 꼽자면 단연 손수건이다. 기능은 많고, 가벼워서 어디든 들고 다니기 좋다.


우리는 하루에 휴지를 얼마만큼 쓸까? 성인의 경우 보통 하루에 4회정도 소변을 보는데, 평균적으로 한 번 휴지를 쓸 때 두루마리 휴지를 1m 가까이 사용한다고 한다. 즉 우리는 매일 소변을 보느라 4m의 휴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소일님은 그래서 화장실용 손수건을 준비해두고 화장실에서 사용 후 바로 따뜻한 물에 빨아서 말린다고 했다. 나도 최근 미국의 한 하이킹용품 온라인매장에서 비슷한 용도로 파는 제품을 본적이 있다. 미국에는 긴 하이킹 코스가 많고, 중간중간에 화장실이 잘 없는데다 있어도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고 (당연히) 수도시설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여러번 사용할 수 있는 (그리고 하이킹 후 빨아버리는) 헝겊을 파는 것이다. 헝겊이라기엔 좀더 본격적인 제품이었지만 (무슨무슨 은나노도 들어있고 어쩌고 저쩌고), 어쨌든 비슷한 개념이라 이 대목을 읽으면서 그 제품이 생각났다.


샤워 시간을 2분만 줄이면 40L의 물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편리함'하나를 빼놓고 생수는 좋은 점이 단연코 없다. 일단 친환경적인 면이 없다는 점에서 제로 웨이스트의 강적이다. 게다가 생수는 전국의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의 이름을 따거나, 직접 그곳의 물을 개발한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 어딘가의 물이 깨끗하다고 하면 그 물이 플라스틱 병에 담기기까지 산을 깎고 공장을 지어 플라스틱 병에 담은 뒤 화석 연료를 이용해 운송한다. 여기까지 과정만으로도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소비하는데, 소비자의 손을 거쳐 재활용으로 분리 배출된다.


그렇다! 게다가 미국 생수는 맛도 별로 없어서 (아. 평창수나 삼다수는 맛있었는데!) 생수 안 산지 진짜 오래됐다. 끓여서 따뜻하게 마시거나, 브리타로 걸러서 마신다.


천연 운모는 자연 소재이기 때문에 플라스틱 걱정은 없지만, 채굴하는 과정에서 착취당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이먹어가면서 보이는 세상의 어두운 구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우리나라 1인당 평균 푸드 마일리지는 7,085 t km/인 으로 무려 세계 1위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푸드마일리지의 단위는 (톤) * (km) 라고 한다. 음식물 1톤의 양이 움직이는 거리를 단위로 만든거라고. 이것도 구글검색을 했더니 나왔다.


"거북이가 고통받고 있으니 빨대 쓰지마!" 라기보다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았다니, 잘했어! 분명히 변화의 시작이 될거야." 라는 방식이 좋다.

맞아. 타인의 불행을 이용해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방식은 당장은 충격요법으로 효과가 좋아보일지 몰라도, 어쩐지 껄끄럽다. 아이들을 위한 모금을 할 때도 아이들 사진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쓰이는 사진들이 사회적 편견을 고착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자기 파괴적, 소비 지향적 삶의 방식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바뀌도록 말이다.



전자책으로 읽었으므로 페이지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페이지수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용구의 순서는 책에서 나온 순서를 따르고 있다.




『제로웨이스트는 처음인데요』

소일 지음

판미동

202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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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코로나 사이언스 - 연구 현장의 최전선에서 써 내려간 과학자들의 코로나19 분석 보고서 코로나 팬데믹 시리즈 3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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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 SARS-CoV-2)가 인류의 발을 묶어둔 지 (이 글을 쓰는 시점 기준으로) 벌써 1년이 넘었다. 나는 학교에 있으니 이런 저런 채널을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떻게 사람 몸에 들어와 작용하는지, 백신을 만들 때는 어떤 작전을 쓰는지, 등 주워들은 것은 많았다. 그래도 잘 정돈된 책으로 읽어보고싶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판데믹 Pandemic 이 시작된지 반년여 만에 책을 출간해낸 출판사측과 저자들에게 감사인사를 보낸다. 특히 연구하시는 분들은 연구만으로도 바빴을텐데, 시간을 내어 대중과 소통까지 해냈다는 점이 대단하다. 이러한 노력들이 가짜뉴스나 도시괴담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새로운 질병에 맞서 싸울 때에도, 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움직이고 침투하는 지 이해한다면 더 효과적으로 감염을 막을 수 있을것이다.

처음에 구매할 때에 기대했던 것처럼,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체에 침입하여 공격하는지,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 팬데믹이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등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도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아주 세세하게 들어가지도 않았고 아주 겉핥기로만 설명하는 것도 아닌, 중간 지점을 잘 잡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시의적절하게 과학 대중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020년 1월, 외신으로 전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소식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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