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유독 더 많은 여성혐오를 겪었다거나, 성범죄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영씨가 겪은 일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져서,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마치 예지력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꼈다. 어머니 세대의 불공평함을 보고 자란 것, 딸 둘에 아들이 막내로 있는 가족 (심지어 터울까지도 우리집과 같아서 놀랐다),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당하는 성차별적인 언사, 50%에 한참 못 미치는 여성 비율을 보도하며 "여풍"이 인다고 묘사하는 보도자료, 아직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여기저기저 보고 들은 명절 증후군, 출산/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등등. 내가 몇 마디 더 보탠다고 크게 달라지겠냐마는 그래도 내 경험도 몇 자 보태고 싶다.
나는 여중에 다녔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학교라서 체육 담당교사는 두 명 뿐이었는데, 한 사람은 키가 큰 여자 교사였고, 한 사람은 덩치가 큰 남자 교사였다. 여자 교사는 우리가 "여자 중학교"이므로 무용을 배워야 한다고 내가 중2 때부터 갑자기 체육 수업을 무용 수업으로 바꾸었다. 무용 시간에는 기껏해야 발레를 처음 배우면 배우는 6가지 발 모양이라든가 (초등학교때 잠시 배워서 알고 있었다) 투스텝이라든가 포크 댄스 등을 배우곤 했다. 나는 사실 무용을 잘 못해서 (그래서 초등학교때 금방 그만두었다) 무용 시간을 싫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굳이 "여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칠 이유가 있나 싶다. 특히 대단한 무용도 아니고 포크댄스 따위를 가르치면서. 그리고 남자 교사는 어쩐지 기분 나쁜 신체 접촉을 은근슬쩍 하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에서는 더 이상한 교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결국 나는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소문의 진실을 직접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우리 중학교에는 바지 교복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 친구 중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입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1) 재킷은 치마 교복을 상정하고 디자인 되었으므로 허리에서 딱 잘리는데, 바지 교복 위에 입기에는 아무래도 깡동하고 (그래서 블라우스가 자꾸만 빠져나올 것이다), 2) 척 봐도 바지가 좀 불편한 디자인이었고 라인이 잘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중학생 또래 학생들에게 외모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하면 입 아프다. 그래서 피어프레셔(peer pressure)도 큰 것이다.) 3) 안 그래도 치마도 이미 비싸게 주고 샀는데 바지까지 사고 싶지 않아서 였다. 왜 여학교 교복은 꼭 치마여야만 하나. (왜 교복의 구성품들은 교복이 치마인 것을 상정하고 디자인 되는가) 그놈의 "학생다운 것"을 위해 우리는 모두 머리를 귀 밑 3cm로 자르고 하얀 '카바양말'을 신고 흰색 혹은 검정색 (남색)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산 꼭대기에 있는 학교로 등교해야만 했다. 내가 한 가지 후회되는 것은 졸업식을 맞이하여 내 머리를 한 번 더 교칙에 맞게 자른 것이었다. 내 머리는 정말 빠르게 자라는 편이라 귀밑 3-5 cm라는 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의 1개월에 한 번씩 미용실에 들러야 했는데, 덕분에 중3 겨울방학이 지난 내 머리는 상당히 길었다. (왜냐하면 겨울방학 전에도 열심히 길렀으니까.) 그래서 거의 묶을 수 있을 만큼 길었고, 나는 원래 졸업식에 머리를 자르지 않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나를 설득해서 결국 나는 머리를 자르고 졸업식에 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간 후에도 복장 관련 논란은 이어진다. 우리 학교는 교복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적당한 일상복을 입고 학교에서 생활했는데, 여름이 되면 교장이 아주 반복적으로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지 말 것", "여학생들은 반바지를 입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유인 즉슨, 여학생들의 다리가 보이면 남학생들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런 개소리가 있나. (하도 여러 층위로 개소리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교복은 항상 치마로 만들면서 이제는 다리를 내놓지 말라니. 여학생들 다리 때문에 못 할 공부면 그냥 딴 길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또, 남학생들 공부는 챙겨주면서 여학생들 공부하는 건 안 챙겨주냐?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반바지를 7부 바지보다 짧은 것은 잘 입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이 받았다. 엄마는 나에게 그냥 보면 긴 바지지만 중간에 지퍼가 달려있어 밑단을 제거할 수 있는 바지를 사주었다. (밑단을 제거하고 나면 무릎 정도 길이가 된다) 엄마가 왜 그런 바지를 어디서 사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름 내내 그 바지 2벌을 보란 듯이 입고 다녔다. 그리고 뭐라고 하면 밑단을 주섬주섬 붙여주었다.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 책의 의의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번째로는 보편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담담하게 늘어놓음으로써 독자 (특히 여성인 독자)들로 하여금 본인의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지금까지는 여성 군중 사이에 "구전"되던 이야기들을 "활자화" 함으로써 그 이야기들이 도시괴담같은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활자화된 서사는 사회 곳곳에서 관측되고 논의되었던 파편들을 꿰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보편적인 이야기지만 활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여성 군중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던 이야기가 남성 군중에게로 노출될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다.
책에 주석이 여러 개 있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한 사항이었다. 비소설에 주석이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소설에 주석이 많은 것은 "이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관측된 사실이다" 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사실적 근거'를 위해 소설에 주석을 넣는다는 것은 좀 우습지만.)
그리고 여러 리뷰에서 "빙의"라는 수단을 썼다는 것이 아쉽다고 언급했다. 나도 처음에 "빙의"라는 이야기를 책 설명에서 보았을 때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다. 빙의라는 것을 실제로 본 적도 없는데다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빙의' 라는 단어는 실제 의미와는 달리 은유적인 의미로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우 비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김지영씨가 굳이 다른 여자들에 빙의해서 할 말을 쏟아내는 이유는 그가 그런 비현실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 한 해당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자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초반 1/4~1/3 가량이었기 때문에 그의 빙의 장면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마지막으로, 책의 뒤쪽 1/3 가량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김지영씨를 진료한 정신과 의사는 김지영씨의 처지를 이해하고 본인의 아내의 처지도 이해한다. 본인이 이해심이 깊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래놓고는 임신 때문에 그만두려 하는 상담사를 보며 '다음 상담사는 미혼으로' 라고 생각하며 끝난다. 나는 이 정신과 의사가 집단으로서의 남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마치 "딸 같아서 그랬어" 라며 여자인 부하 직원들에게 성추행을 일삼지만, 본인의 실제 딸과 부인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사실은 작가는 이 부분을 가지고, 이 소설이 출간된 후의 상황을 예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보고 이해하고 동정하는 척 하지만, 자신의 이득과 관련되어있거나 자신의 직장 동료 등에게 비슷한 일이 닥치면 눈감아버리는 얄팍한 공감 능력, 불합리한 것을 불합리하다 인지하지만 관망하며 본인의 이득만 챙기려는 게으른 기회주의자. 그러나 실제는 더 처참했다.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피해 의식이라 치부하거나,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을 싸잡아서 욕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나는 이런 상황을 볼 때마다 버지니아 울프 저 <자기만의 방>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린다.
"마지막 장을 읽으며, 그녀에게 백 년을 더 주자고 결론지었습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계획하고 달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