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동물에서 유래한 것을 먹는다. 오늘만 해도, 아침에는 구운 파마산 베이글에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다. 소의 젖으로 만든 파마산. 점심때는 닭 살코기와 브로콜리를 넣어 만든 로제 파스타. 닭 살코기는 지난 주에 마트에서 산 오븐구이 통닭에서 살만 발라서 놓고 여기 저기 넣어 먹는 중이다. 로제 파스타라 크림도 조금 넣었으니 또 소의 젖에서 얻은 음식. 


특별히 의식하고 육식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동물성 식품을 야금, 야금 먹게 된다. 라면을 끓일 때도, 달걀을 하나 톡 까넣는 것이 너무 쉽고, 치즈 한 장도 쉽게 올릴 수 있다. 


사실 시작은 같은 암컷으로서의 연민이었다. 평생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젖소 (그리고 송아지는 빼앗긴다), 평생 알을 생산하며 손바닥만한 케이지에 갇혀 사는 닭. 돼지는 알도, 우유도 생산하지 않지만, 암퇘지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는 것을 반복하다가 죽겠지. 인간이 더 많은 돼지를 얻는 방법은 암퇘지가 임신해서 출산하는 방법 뿐이니까. 이런 생각들은 특히, 생리기간에 자주 든다. 


그러다가는 축산산업의 가축들을 생각한다. 제품으로 생산되기 위해서 태어나고 길러지고 죽임당하는 생명들. 현대의 식료품은 그렇다. 소비자는 제품으로서의 고기와 채소를 만날 뿐이다. 산업사회의 분업화는 소비자로 하여금 생산과정을 따지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고, 소비자는 가격과 영양성분만으로 고기와 채소를 구분짓는다. 


하이킹 하는 길에 방목된 소들을 많이 본다. 소 한마리가 수백 킬로그램이 되므로 소를 본 나는 겁이 났다. 가끔은 좀 화가 난 듯한 소들도 있었고,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크다. 나 따위는 밀쳐지거나 차이면 갈빗대 한두개 정도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느날엔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 길을 따라 올라오던 너덧 마리의 소들과 마주쳤다. 사람과 마주친 소들의 눈을 보니 겁에 질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줄 몰라 길 중간에 가만히 서있으니, 그 중 한 마리는 우리를 피해 빙 둘러서 자기 가던 길을 갔다. 나머지들은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비켜 섰다. 그랬더니 우리 눈치를 보며 천천히 지나갔다. 


이렇게 동물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읽다 보면 연민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또 산에서 내려와 소고기를 맛있게 먹고 유제품을 소비하는 나는 위선자인 것만 같다. 


이런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던 중, 김산하의 <비숲>을 읽었다. 독후감에서도 썼다시피, 이렇게 연민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나에게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는 닭을 키우셨다. 시골집 옆에 할머니 집의 방 한 칸 만한 (아니, 더 컸던가?) 공간에 닭장을 짓고 닭을 여러 마리 키우셨다. 할머니는 아침엔 달걀을 몇 개 수확(?)해 오시곤 했고, 나는 닭들이 돌아다니는 걸 봤다. 가끔 가족들이 한번에 여럿 모인 때에는 외삼촌이 닭을 한 마리 잡기도 했다. 삼촌이 닭을 한 마리 들고 집 뒤켠으로 가서 목을 비틀어 죽이고,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뽑아오면, 할머니가 부엌에서 닭곰탕이나 삼계탕같은 것을 끓이셨다. 


삼촌은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닭을 잡는 동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나는 그 할머니집 옆 닭장에서 살던 닭 한마리의 생명과 닭고기를 바꾸었다는 것을 이해할 만한 나이이기는 했다. 그리고 앞마당까지 딸려온 깃털 몇 장과 함께 닭의 죽음을 속으로 애도했다. 그랬지만, 뭐, 닭고기는 맛있게 잘 먹었다. 꼭 닭고기가 아니어도 어떤 육류라도 고기를 먹을 때는 꼭 그 닭이 생각난다. 생명을 내어준 것에 감사하며, 욕심부려서 과식하지 않고, 취식 가능한 부위는 가능한 다 먹어 깨끗이 뼈만 남긴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왜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돼지를 키우면서 채식주의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였다. 그리고 나중엔 잡아먹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쩐지 놀랍지 않게 느껴졌다. 채식주의자가 스스로 키운 돼지를 결국 먹었다니.) 


그러나 내가 스스로에게 놀랐던 지점은 따로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순진하게도, 돼지를 앞마당에서 키웠을 거라고 상상했다. 아무리 집이 커도 돼지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가능할 리가 없는데. 결국은 나도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로의 '목가적'인 풍경을 주입받은 것이다. 


작가는 돼지를 키우기를 작정하고 돼지를 분양받아 이사 데려오는 것부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서술한다. 돼지는 성장 속도도 빠르고, 또 이 돼지들은 멧돼지의 피가 약간 섞여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돼지를 키워본 적이 없다. 책에서 내내 스스로를 '샌님'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1년이 안되는 시간동안 돼지를 먹이고, 돼지 집을 청소해주고, 나중에는 잡아먹었다. 


저자는,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고 고백하며 돼지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사는 동거돼지 정도의 애정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먹으려고 키우지만, 그래도 키우는 동안은 잘 챙겨주려는 마음. 그리고 본인의 철학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도움을 주는 보조자역할. 돼지들은 사료가 아닌 음식이나 인간의 음식을 만들며 나오는 부산물 (쌀겨, 벌레먹은 과일 등)을 먹었다. 그리고 축사가 아니라 충분한 공간이 있는 우리에서 지냈다. 여름에는 진흙 웅덩이에서 놀 수도 있었다. 결국은 죽일 생명에게 잘 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라든가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위선자같으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저자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음의 구절이, 이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기 전, 나머지 두 돼지도 순차적으로 도축되었다. 첫번째 돼지처럼 이웃,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세마리 돼지가 떠난 자리에 봄이 오면서 토마토 싹이 났다. 돼지 똥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지난 여름, 돼지는 토마토의 시간을 보냈다. 토마토를 먹고 또 먹었다. 토마토의 시간은 갔고, 이제 돼지의 시간이 되었다. 토마토는 돼지 똥의 양분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힌다. 나도 무언가의 양분이 될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돼지를 키우고 또 잡아먹으면서 생명을 먹는 것의 책임을 곱씹어보았다. 


인간은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지 않는 부산물을 활용해 가축을 길러왔다. 생태계가 감당하는 만큼 가축을 길렀다. 지금은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자연이 스스로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자원을 쓰고, 그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결국은, 모든 이야기가 "미래 자원까지 고갈시켜가며" 생산해야 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이어진다. 꼭 축산업 뿐만도 아니다. 빨리 발전하고자,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 아닌가 하는 분석이 사회 곳곳에서 나온다. 


20세기 초에는 가난했던 우리나라는 특히, '육류를 더 먹을 수 있는 것'이 '더 잘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여 왔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지나친 육류섭취는 줄이고 나에게도 건강하고 자연에게도 건강한 식생활을 만들어나가면 좋겠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이동호 지음

 창비

 2021.06. 


친구들끼리 고기를 먹으러 가면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농촌은 도시가 커지는 만큼 피폐해졌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내부 식민지‘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농촌은 젊은이와 식량을 도시로 보냈고, 도시는 농촌으로 혐오 시설과 쓰레기를 보냈다. 석탄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 화학공장 등 각종 기피 시설이 지방으로 왔다. 축산업도 그중 하나다. 내가 이주한 지역은 하필 국내 최대 축산단지다.

우리 동네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다.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생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한꺼풀 더 들어가면 축산업의 폐해는 악취로 끝나지 않는다. 값싼 고기를 만드는 구조는 열악한 노동환경, 지하수 남용, 가축용 항생제로 인한 수 생태계 교란, 막대한 온실가스를 남겼다. 과도한 육류 섭취로 인한 건강 악화와 국가 보건 비용 상승도 빼놓을 수 없다. 채식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서민의 고기‘라는 허울 좋은 호칭은 가장 잔인한 사육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그냥 사료를 먹이면 편한데, 왜 나는 고생해가며 부산물을 먹이고 싶었을까.
과거에 가축은 콩꼬투리나 옥수숫대 같이 인간이 먹지 않는 부산물을 먹었지만, 이제는 콩이나 옥수수, 즉 농산물 자체를 먹는다. 전세계 농지의 83 퍼센트가 가축을 기르고 그들을 먹이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는 데 쓰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옥수수와 콩은 표토를 사라지게 하는 대표적인 사막화 작물이다. 지구의 피부역할을 하는 표토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축산업계에서는 외양간에서 가축을 키우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묻는다. 그렇게 키워서는 온 인류를 먹일 수 없다고 사람들은 반박한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대안에 대한 논의를 빼고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때다.
이것이 내가 돼지에게 사료를 주지 않고 농부산물을 준 이유였다. 마냥 번거로운 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별도의 에너지 투입 없이 생긴 먹이로 돼지를 기른다는 뿌듯함은 물론 돼지가 무엇을 먹고 좋아하는지를 보며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다.

가축이 울타리 안에 살던 시절, 동물은 가족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구성원으로서 존중을 받았다. 동물이라는 다른 구성원을 대할 때 천벌이라거나 인간의 도리 같은, 지켜야 하는 선이 있었다.
지금의 동물은 경제 논리 안에 있다. 이 논리에 맞춰 인간은 동물을 살이 빨리 찌거나, 알을 많이 낳거나, 젖이 많이 나오는 품종으로 개량한다. 기준에 맞지 않는 동물을 불량품이다. 꼬리와 송곳니, 뿔과 부리를 자르고 거세를 한다. 햇볕을 쬐거나 흙을 밟거나 기지개 한번 제대로 켜지 못하는 틀 안에서 산다. 동물은 인간에게 값싼 고기만 제공하면 되는 공산품일까?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필요가 없는 기계일까? 이것을 그저 동물권의 문제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미리 준비했둔 중망치를 들어보았다. 무겁고 차가웠따. 돼지 앞에 섰다. 몸에 피가 빠르게 돌지만 머리로 가는 피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우리는 이별이다. 데려오던 날부터 부담되었던 일을 곧 시작해야 한다. 주변 누구도 내가 직접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데려왔고, 내가 시작한 일이다. 마무리할 책임 역시 내게 있다. 그렇다고 꼭 내 손을 통해 마무리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도 있고, 도축장에 데려갈 수도 있다.

내 몸의 저항을 주도하는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망치로 내려친다는 것. 생명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거북감이었다. 내려칠 수가 없었다. 돼지도 생각이 있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는 그 동질감이 거부감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그내로 나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몸은 통제되지 않았고,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한참을 숨을 멈춘 채였다.

그럼에도 나를 돼지 앞으로 데려다놓은 것은 어떤 예의였다. 돼지를 취할 사람으로서 직접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돼지를 마주할수록 그 마음이 커졌다. 잡아먹는 게 배신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게 배신 같았다. 남이 죽인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책임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목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 지 알아야 했다. 남의 살을 먹는 일, 생명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 그동안 나는 너무 쉽게 살았다.

겨울이 되기 전, 나머지 두 돼지도 순차적으로 도축되었다. 첫번째 돼지처럼 이웃,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세마리 돼지가 떠난 자리에 봄이 오면서 토마토 싹이 났다. 돼지 똥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지난 여름, 돼지는 토마토의 시간을 보냈다. 토마토를 먹고 또 먹었다. 토마토의 시간은 갔고, 이제 돼지의 시간이 되었다. 토마토는 돼지 똥의 양분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힌다. 나도 무언가의 양분이 될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돼지를 키우고 또 잡아먹으면서 생명을 먹는 것의 책임을 곱씹어보았다.

‘1++ 등급‘의 소고기는 근육에 약 17퍼센트의 지방을 갖고 있다. 근육에까지 지방이 있다는 것은 소가 고통스럽게 성장했다는 뜻이다. 근육 내 지방은 간 기능이 손상되고 대사 기능이 마비되면서 비로소 쌓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지 않는 부산물을 활용해 가축을 길러왔다. 생태계가 감당하는 만큼 가축을 길렀다. 지금은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자연이 스스로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자원을 쓰고, 그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일반 농가가 파산하는 와중에 축산 대기업의 주가는 올랐다. 그리고 ‘살처분 테마주‘가 인기 검색어로 올라왔다.

농촌에는 이제 마을community은 사라지고 농업industry만 남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싼 가격이 아니라 적정한 가격이다.

공장식 축산이 최악의 동물 학대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권이 아니라 인간 윤리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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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2021-07-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책의 뒷부분 장 중 하나에,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산문을 인용해둔 부분도 좋았다. 도시에 살다보면 우리가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도, 그 동물들을 키우고 도축하는 사람들도 타자화되기 쉬워서, 굳이 인용까지 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태도같은 것을 상기시켜준 점이 좋았다. 나는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 시키는 것이 걱정스럽다.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을 떠나 살게 되었었다. 그 이후로 주욱 부모님과 따로 살았는데, 그렇다고 자취의 고수가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에 나오기 전까지는 항상 '학교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이다. 끼니를 스스로 준비해서 챙겨 먹지 않는다면, 본인의 공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취'라고 부르기 어렵다. 기숙사에서는 공용공간은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나는 화장실도 공용으로 썼으므로, 내가 관리해야할 대상은 나 자신과, 손바닥 만한 방의 내 쪽 절반, 매일 나오는 빨래 정도였다. 그 일은 정말 쉬웠다. 


자취에서 스스로 식사를 챙긴다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피할 수만도 없었다. 나는 요리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기숙사에 살 때는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가끔씩 부모님 옆에서 거드는 정도나 부모님이 안 계실 때에 간단히 혼자 챙겨먹는 정도였기 때문에 스스로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고 귀찮았다. 특히, 식사준비와 요리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 때에 요리하는 음식의 양과 노동의 강도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0인분씩 준비하게 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고, 여럿 중 입맛이 까탈스러운 사람이 있어서 입맛을 맞춰야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그냥 평균의 상황에서는, 한 번에 1인분을 요리하나 2인분을 요리하나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간에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 홀로 뚝 떨어져 살고 있으니 뭐라도 먹을 것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먹여야 했다. 처음에는 차마 먹지 못할 요리들도 속속 나왔으나, 나는 맛이 없는 요리를 먹으면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매주 금요일 저녁 때 한시간정도 시간을 내어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봤다. 맛있을 것 같은 레시피를 찾으면 레시피 노트에 적어두고, 그 다음주에 뭘 해먹을 지 대략적으로 정해서 주말에 장을 봤다. 요리를 한 후에는 요리가 어떻게 됐는지, 혹시 재료를 대체해야 했다면 대체한 재료는 무엇이었고 결과는 어땠는지, 버터나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요리는 1/2이나 2/3 정도로 줄여서 넣곤 했는데 그럴 때는 맛이 괜찮았는 지 등을 노트에 또 적었다. 이렇게 경험이 쌓여서 이제는 '생존요리사' 레벨의 자취요리사가 된 것 같다. 


몸이 아플 때나 상심했을 때는 스스로를 잘 대접하고 싶다. 평소 특히 맛있게 먹었던 요리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릇에 담을 때도 예쁘게 담아낸다. 가끔 인터넷에서 (레시피찾을 때) 보아둔 특별한 음료를 만들거나 특히 좋아하는 차를 우린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식사를 하고 나면 아무래도 힘이 나는 것이다. 


프랑스식 요리는 미국에서도 그다지 대중적이지는 않아서 (대중적인 식당보다는 조금 가격대가 있는 식당부터 파인다이닝 수준에 포진하고있다), 나도 프랑스식을 하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 다만, 캘리포니아에 이사와서 하우스메이트들과 지내며 프랑스인이었던 하우스메이트가 해준 음식은 먹어봤다. 당시 프랑스인인 하우스메이트 하나는 일요일 아침에는 별 것 아니라는 태도로 키시 반죽을 만들곤 했고, 퀘벡에서 온 프랑스계 캐나다인 하우스메이트는 가끔 하우스메이트 디너를 할 때 프랑스식 요리를 해주곤 했다. 이를테면 프랑스식 가정식을 먼저 먹어본 셈인데,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프랑스식 자취 요리: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의 저자 이재호씨처럼 한 가지에 꽂히면 그것을 파는 성격이 아니다. 나는 아마도, 커피학원에 다니거나, 프랑스로 요리를 배우러 훌쩍 떠나거나, 와인 학원에 다니는 일은 못할 거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잘 먹이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부모님께 내가 잘하는 요리를 해드려야지. 한식으로는 엄마한테 쨉이 안 될 테니, 양식으로 준비해야겠다. 






『프랑스식 자취 요리: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

 이재호 지음

 세미콜론

 2020.09. 


손수 밥을 지어 먹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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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과 관련해서 구매한 책들 중 두번째로 쓰는 독후감이다. 이번 책은 우리나라에서 타로마스터로 유명하신 정회도 님이 쓴 책이다. 다른 책들에 비해 정서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많았던 것은 나도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겠지. 


전체적으로 몰입해서 쉽게 읽기 좋은 책이었고, 실용적인 조언들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신경써서 집필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어떤 저자가 본인 책을 날림으로 적겠냐마는, 그래도 저자의 성실함과 진심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타로마스터이면서 강의도 하는 분이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하면서 사례도 많아서 독자입장에서는 재미있게 읽었다. 


세상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내가 태어난 곳, 나의 부모님, (특히 유년시절의) 성장환경, 시대, 국가, 등등. 조금 더 자라서는 주어진 환경 외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지만, 마찬가지로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 뿐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다 운이라고 칭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은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고, 우리들끼리는 우스개소리로 운칠기삼이라고 하는거다. 


가끔씩 별 것도 아닌 일에 많이 상심할 때가 있다. 가끔씩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왔을 뿐인데, 특별히 나쁜 일도 없었는데 더 지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체 내가 뭐가 문제일까, 하고 스스로를 조금 원망하거나 하면서 스스로를 더 지치게 만들곤 했다. 그런데 저자도, "이렇게 한 번 크게 어긋난 상담을 하고 집에 오는 날은 거의 기절할 만큼 지친 상태로 쓰러진다. 그 여파가 2-3일은 갈 정도다. 신기한 것은 상극인 사람은 만나러 갈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 라고 적고 있다. 일단, 나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가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래서 결국 내가 뭘 잘못하거나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경험을 하는게 아니고, 세상에는 그런 관계도 있는거구나 하면서 더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인연이나 타인의 에너지, 나와 타인의 에너지 상성 같은 것은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타인의 에너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특정 사람 집단은 또 특유의 에너지나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런 곳에 가면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나는 노량진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걸 좋아한다. 음식이 맛있고 저렴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들의 기운이 느껴져서 좋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에서는 좋은 에너지를 받기도 하고, 소위 명문대를 가라고 하는 이유도 좋은 에너지가 모인 곳이라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다. 물론 다른 이유도 많이 있겠지만. 그리고 이어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풍수지리같이 거창하게 가지 않아도, 내가 늘 사용하는 공간을 기분좋게 꾸미는 것만으로도 나의 평소 에너지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늘 일하는 방의 벽에 그림이라도 붙여서 분위기 전환을 좀 해볼까 싶기도 했다. 일단 이 방을 쓰는 내가 기분이 좋으면 일도 더 잘 될테니까. 


그 외에도 일상에서 본인의 운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본인의 운 흐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들에도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을 해주고 있다. 


나도 스스로의 변화에 있어서는 꽤 예민한 편이라, 내 주변의 분위기 변화에 대해서 촉각을 세우고 있다. 예를 들어, 전체적으로 처지는 기간이 있으면 (누구나 그렇듯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일단 해야할 일을 하면서 에너지가 상승할 때를 기다린다. 내 에너지가 상승하기 시작하는 때에는, 그다지 큰 차이는 아니지만, 느낄 수 있다. 아. 이제 에너지가 상승하고, 내가 바깥으로 에너지를 꺼내고 좀더 활동적으로 지내야할 때가 되는구나. 그래서 몸이 아프거나 하면 좀 화가 나는데, 이 에너지의 오르고 내림을 느끼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란 쉽지 않다. 위기를 넘길 수는 있어도 기회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들이 다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용기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이 위기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둘째, 판단이다. 내가 처한 위기를 분석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실천이다. 지혜로운 판단을 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실행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넷째, 운이다. 결실을 맺으려면 운이 함께 따라줘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왔으므로, 죽을만큼 난처한 위기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위기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기는 했다. 굳이 따지자면 걸려서 '죽을' 위기는 아니었어도 위기상황에서 아무 대처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부터 하강곡선을 탔을 것 같은 위기였다. (물론 그 이후에 언젠가 또 위기를 극복하고 상향곡선을 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때에 용기와 적절한 판단력과 실천을 통해서 상황을 타개했고, 운도 어느정도 따라주어 (+귀인들과 함께) 잘 마무리되곤 했던 것 같다. 


위기 상황이 생겨도, 내가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쏟아 (용기+판단+실천), 나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운과 관련한 책들에서 하나같이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해하며, 스스로를 먼저 챙겨야 한다. 그리고 나의 태도와 주변을 말끔하게 정돈하고, 귀인을 알아보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좋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나면 운을 기다려야겠지. 운은 내 뜻대로 오거나 가지 않지만, 왔을 때에는 한 번에 알아보고 잘 잡는 것, 까지가 나의 운을 끌어올려 잘 될 운명으로 가는 방법인가 보다. 





『운의 알고리즘』

 정회도 지음

 소울소사이어티

 2021.04. 

이처럼 세상의 많은 일들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운을 알지 못하면 살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한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한 번 어긋난 상담을 하고 집에 오는 날은 거의 기절할 만큼 지친 상태로 쓰러진다. 그 여파가 2-3일은 갈 정도다. 신기한 것은 상극인 사람은 만나러 갈 때마다 무슨 일이 생긴다.

겉모습이 뭐가 중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겉모습이 내면을 지배하기도 한다. 겉모습에 따라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거니와 무엇보다 스스로 뿜어내는 에너지가 달라진다.

나는 노량진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는 걸 좋아한다. 음식이 맛있고 저렴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들의 기운이 느껴져서 좋다.

내가 머무는 공간과 ‘나‘라는 공간에 운이 들어올 수 있는지 천천히 둘러보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공간을 정리하고, 맑고 밝게 만들어보자. 운이 들어오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한 명의 사람이 누군가를 잘되게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나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것은 쉽다.

운이 나쁜 것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박복한 사람, 하나는 재수 없는 사람이다. 이 둘이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다. 박복한 사람은 자기 혼자 운이 나쁜 것이고, 재수 없는 사람은 옆에 있는 나의 운까지 나쁘게 한다. 박복한 사람은 피해야 하고, 재수 없는 사람은 도망쳐야 한다.

사람의 운명을 다루는 일은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기에 나는 타로카드 뿐만 아니라 사주명리, 점성학, 관상, 해몽, 영성, 그리고 심리학, 역사, 종교 등 인문학을 꾸준히 공부했다.

행운을 잡는 것도 복이고 불운을 피하는 것도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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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으로 집에 갇혀 지낸 지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인생이 무언가 정체되어있다고 느꼈다. 꾸준히 일은 하고 있지만 생활에 무언가 스파크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내가 최근에 구입한 세 권의 '운'과 관련된 책 중에, 이 책은 다른 두 권의 책과 비교했을 때, '타인과의 교류' 등 나로부터 외부세계로 향하는, 어떠한 행위를 할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자세를 '세렌디피티'를 얻기 좋은 태도로 바꿀 것을 권유한다. (완전히 '세렌디피티'에만 초점을 맞춘 책!)


'세렌디피티'란 무엇인가? 영미권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이지만, 우리말로는 번역하기 쉽지 않다. 의미 설명을 굳이 하자면 '우연히' 찾아온 작은 '행운' 이라고 해야할까. 이 책은 그 세렌디피티가 과연 '우연히' 찾아오기만 할 것인가, 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자기계발서나 위인전, 평전 따위를 읽어보았다면, 어떤 우연한 기회에 커다란 과학적 발견이나 금전적 이득을 얻었다는 내용을 종종 봤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처럼 과학하는 사람들에게는 닳고 닳은 예시 중 하나인 페니실린의 발견이나, 3M의 포스트잇 개발 비화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세렌디피티'가 작용한 예시가 될것이다. 그런데 그 일화들은 흥미롭게 들린다는 것 외에, 난관에 봉착해도 창의적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상황을 타개하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어떤 메시지가 있을까? 사실 이 일화들과 완전히 같은 상황은 나에게는 생기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세렌디피티'가 왔을 때 포착해서 행운을 얻을 수 있는 생활습관이나 태도를 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집단적 차원에서는 개개인이 '세렌디피티'를 잡을 수 있는 환경과 문화를 만들고, 나아가 집단에 이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의 골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내가 주의깊게 보았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장의 제목인 경우도 있고 절의 제목인 경우도 있다) 


- 성공은 계획된 것이라는 착각 

- 치밀한 목표보다 야심찬 목표에 세렌디피티가 있다 

- 다양한 시도를 두려워하지 말라 

- 좋은 에너지를 유지하면 일어나는 일들 

- 세렌디피티가 넘쳐흐르는 환경은 따로 있다

- 아웃라이어들의 행운과 성공의 비밀 


나정도면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걸까? 어떤 기준에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 맞고, 다른 기준에서는 전혀 아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매 순간 힘껏 살아왔고, 항상 주변을 잘 살폈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려고 애썼다. 어떤 때에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세세하게 작은 목표로 액션플랜을 만들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떤 때에는 혼란의 중심에서 멀고 추상적인 목표만을 가지고 나아갔다. 혹시 내가 지금 내 인생에 있었던 성공 하나를 바탕으로 '성공스토리'를 만들면 어떤 모양새일까? 


​많은 경우,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싶었고, 그것을 위해서 이것 저것 그것을 했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성공' 스토리니까, 그래야 폼나보이니까. 특히, 내가 만약 어떤 연구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재단에 연구비를 위한 제안서를 쓴다면, 그렇게 써야 내 제안서가 더 설득력있어 보이니까. 


같은 이유로, 작년에 갑자기 판데믹 때문에 연구실에 못가게 된 사람들이 많아서 저널마다 리뷰논문이 많이 나왔다. 나중에 2020년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과연 

'아. 판데믹이어서 랩에 못하게 되서 울며 겨자먹기로 리뷰논문을 썼어' 라고 할까, 아니면 

'아. 안그래도 ##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판데믹이 터져서 시간을 갖고 문헌조사를 하고 리뷰논문을 썼어' 라고 할까? 

(어떤 사람은 '그 분야 앞으로 잘 될 것 같아서 그 때 리뷰논문을 쓴거야' 라고, 판데믹의 ㅍ자도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나가는 사람들이나 위인들의 인생을 따라가려 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이미 한 '위대한' 일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런 식으로 포장되어있을 확률이 높다. 그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들의 사정을 속속 알기 어려우니까. 오히려 롤모델은 본인과 가까이 있지만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로 잡는 게 좋다. 


똑같이 어려움이 닥쳐도 어려움 속에서 작은 가능성이나 행운의 기회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 하면, 크게 불운한 상황이 아닌데도 본인의 처지가 불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가능성이나 행운의 기회를 발견하는 사람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상황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에 좋은 에너지를 전파한다. 이런, 일견 추상적으로 보이는 생활의 태도를 통해, 그들은 작은 행운을 자주 발견하고, 그 행운들이 쌓여서 그들은 점점 더 발전하고 나아진다. 


​구체적인 행동 지침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더 명쾌한 도서가 되었을테다. 그렇지만 저자가 책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았고, 이 책은 연구 내용들에 기반해서 서술된 책이다. 시간이 없고 책을 다 읽고 싶지 않다면 책 말미의 '나오며 - 당신만의 세렌디피티 코드를 완성하라' 만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읽고 나니 앞서 나왔던 내용들에서 좀 아리송했던 부분들이 퍼즐 맞춰지듯 들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에 빠져 허우적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세렌디피티 사고방식과 세렌디피티 영역을 개발하고 관계와 의미, 소속감을 존재의 핵심에 두길 바란다.


결국, 이 책은 '행운' 을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논하는 책이었다. (다른 책들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늘어놨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삶의 자세를 생각할 때에,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좋은' 에너지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건실한 사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세렌디피티 코드』

 크리스티안 부슈 지음, 서명진 옮김

 비즈니스북스

 2021.04. 






* 전자책으로 읽어서 기기에 따라 쪽수가 달라지기 때문에 '밑줄긋기'에는 쪽수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문제를 풀 뜻밖의 해결책에 가능성을 열어두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게 된다.

예기치 않은 일에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은 행운과 세렌디피티의 핵심 요소다. 마틴과 같은 사람은 여러 이유 덕분에 늘 운이 좋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연을 알아보는 능력이다. 이 능력 덕분에 예기치 못한 우연을 거머쥘 확률이 더 높다. 이들에게 우연이 더 자주 일어나서가 아니다. 세렌디피티를 기대하기 시작하면 세렌디피티의 순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들과 같은 상황을 겪더라도 더 운이 좋아지는 비결이다.

당신은 무엇을 예상하는가? 평소와 다름없는 만찬회를 예상하는가? 지루한 사람 옆에 앉아서 따분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눈에 안 띄게 빨리 나갈 방법을 궁리 중일 것 같은가? 이렇게 예상했다면, 당신은 딱 그정도의 경험만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에서 세렌디피티의 흔적을 지워버리면 다시 세렌디피티가 일어나도 알아채지 못한다. 세렌디피티란 단독으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이 아닌 일련의 과정이자 오랜 잠복기를 거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처음부터 모든 일을 ‘계획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의 한 CEO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저 운이라고 말하거나 사실 계획되지 않은 우연이었다고 말하면 투자자나 직원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능력이 부족해 보이고 의존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그와 동료들은 "이것이 바로 회사의 목표였습니다. 저희는 늘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죠." 와 같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왜 그랬을까? "이런 이야기는 잘 팔리니까요. 투자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공식적인 이야기‘를 짜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많은 전환점이 있었던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계획된‘ 이야기를 더 편하게 여긴다.

와이즈먼은 실험을 통해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미신을 따르거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등 불운을 바꾸는 데 효과 없는 방법에 집착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도적으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보통의 학생은 대개 확실한 로드맵과 정해진 목표를 가진다. 어떻게 해야할 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결과물이 확실하다. 하지만 특출한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를 탐색하고자 한다. (...) 함께 작업을 한 학생 대부분이 스스로 이런 애매한 상태를 약점으로 여기지만 진정한 창의력과 독창성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 유쾌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상태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성과에 이르는 잠재적 시발점이다.

문제를 해결해야 하거나 영감이 필요할 때 좋은 에너지를 내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적 없는가? 혹은 계속 하품만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서 더 힘들어진 적은 없는가? 에너지는 멈춰있지 않고 늘 흐른다는 점을 기억하라.

조직에서 실직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제시간에 회의에 참석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한 사람에 둘러싸여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세렌디피티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 (빈곤한 상황에서는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훨씬 더 커지고 의사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해야 상대방이 안정감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신뢰를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방향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갖추는 것이다. 누구나 합리적인 절차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진실을 마주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나치게 특출나 보이는 사람을 너무 우러러볼 필요 없다. 그들은 대개 초기 운이 좋고 뛰어난 성과 역시 임의적인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유리한 시작점에서 출발해 불균형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것이다.

비범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는 아웃라이어다. 그들을 성공적으로 따라 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성공에 ‘우연한 기회‘나 ‘특권‘이 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 사실은 이런 아웃라이어보다는 ‘2인자‘에게서 배울 점이 가장 많다. 비범한 성과는 비범한 운이 작용해야 하므로 뛰어난 성과가 나온 후에는 보통 평범한 성과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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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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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도 자주 보지 않고, 팟캐스트도 듣지 않지만, 유투브 등을 통해서 이수정 박사님은 알고 있었다. 습관처럼 알라딘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가 이 책을 우연히 보고, 당장 구매해버렸다. 


역시나,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 중, 내가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영화는 세 편 뿐이었다 (곡성, 기생충, 숨바꼭질). 그래도 매 꼭지 초반에 영화 줄거리를 소개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주제를 따라갈 수 있었다. 사실 영화 자체도 많이 보지 않지만, 특히 범죄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봤던 영화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영화가 대중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영화는 (영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특히 범죄영화중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범죄영화들이 사회의 취약한 구석을 조명하거나, 폭력적인 묘사나 극단적인 묘사가 자주 나오기 때문일까. 그런 와중에 많은 폭력과 편견 등이 사회적 약자를 향한다. 관객들은 대부분 그런 요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보겠지만, 곳곳에 스며있는 공기같은 편견은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기처럼 상존하는 잘못된 인식, 사회적 편견 등을 적확하게 짚어주는,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나서 팟캐스트도 들어봤는데, 옹골찬 구성과 대화 내용이 인상깊었다. 수많은 팟캐스트들 중 단연 돋보였다. 

네 사람의 목표는 같았다. 범죄를 흥밋거리로 만들지 말 것. 여성의 안전을 중요하게 다룰 것. 피해자의 관점에서 범죄에 접근할 것이 그것이었다.

"범죄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매체는 관심 없습니다. 여성이나 아동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범죄 영화를 다룬다면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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