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동물에서 유래한 것을 먹는다. 오늘만 해도, 아침에는 구운 파마산 베이글에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다. 소의 젖으로 만든 파마산. 점심때는 닭 살코기와 브로콜리를 넣어 만든 로제 파스타. 닭 살코기는 지난 주에 마트에서 산 오븐구이 통닭에서 살만 발라서 놓고 여기 저기 넣어 먹는 중이다. 로제 파스타라 크림도 조금 넣었으니 또 소의 젖에서 얻은 음식. 


특별히 의식하고 육식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동물성 식품을 야금, 야금 먹게 된다. 라면을 끓일 때도, 달걀을 하나 톡 까넣는 것이 너무 쉽고, 치즈 한 장도 쉽게 올릴 수 있다. 


사실 시작은 같은 암컷으로서의 연민이었다. 평생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젖소 (그리고 송아지는 빼앗긴다), 평생 알을 생산하며 손바닥만한 케이지에 갇혀 사는 닭. 돼지는 알도, 우유도 생산하지 않지만, 암퇘지도 계속해서 새끼를 낳는 것을 반복하다가 죽겠지. 인간이 더 많은 돼지를 얻는 방법은 암퇘지가 임신해서 출산하는 방법 뿐이니까. 이런 생각들은 특히, 생리기간에 자주 든다. 


그러다가는 축산산업의 가축들을 생각한다. 제품으로 생산되기 위해서 태어나고 길러지고 죽임당하는 생명들. 현대의 식료품은 그렇다. 소비자는 제품으로서의 고기와 채소를 만날 뿐이다. 산업사회의 분업화는 소비자로 하여금 생산과정을 따지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고, 소비자는 가격과 영양성분만으로 고기와 채소를 구분짓는다. 


하이킹 하는 길에 방목된 소들을 많이 본다. 소 한마리가 수백 킬로그램이 되므로 소를 본 나는 겁이 났다. 가끔은 좀 화가 난 듯한 소들도 있었고, 덩치는 나보다 훨씬 크다. 나 따위는 밀쳐지거나 차이면 갈빗대 한두개 정도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느날엔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 길을 따라 올라오던 너덧 마리의 소들과 마주쳤다. 사람과 마주친 소들의 눈을 보니 겁에 질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줄 몰라 길 중간에 가만히 서있으니, 그 중 한 마리는 우리를 피해 빙 둘러서 자기 가던 길을 갔다. 나머지들은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비켜 섰다. 그랬더니 우리 눈치를 보며 천천히 지나갔다. 


이렇게 동물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감정을 읽다 보면 연민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또 산에서 내려와 소고기를 맛있게 먹고 유제품을 소비하는 나는 위선자인 것만 같다. 


이런 감정을 반복적으로 느끼던 중, 김산하의 <비숲>을 읽었다. 독후감에서도 썼다시피, 이렇게 연민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나에게 꼭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책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적, 할머니는 닭을 키우셨다. 시골집 옆에 할머니 집의 방 한 칸 만한 (아니, 더 컸던가?) 공간에 닭장을 짓고 닭을 여러 마리 키우셨다. 할머니는 아침엔 달걀을 몇 개 수확(?)해 오시곤 했고, 나는 닭들이 돌아다니는 걸 봤다. 가끔 가족들이 한번에 여럿 모인 때에는 외삼촌이 닭을 한 마리 잡기도 했다. 삼촌이 닭을 한 마리 들고 집 뒤켠으로 가서 목을 비틀어 죽이고,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뽑아오면, 할머니가 부엌에서 닭곰탕이나 삼계탕같은 것을 끓이셨다. 


삼촌은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닭을 잡는 동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지만, 나는 그 할머니집 옆 닭장에서 살던 닭 한마리의 생명과 닭고기를 바꾸었다는 것을 이해할 만한 나이이기는 했다. 그리고 앞마당까지 딸려온 깃털 몇 장과 함께 닭의 죽음을 속으로 애도했다. 그랬지만, 뭐, 닭고기는 맛있게 잘 먹었다. 꼭 닭고기가 아니어도 어떤 육류라도 고기를 먹을 때는 꼭 그 닭이 생각난다. 생명을 내어준 것에 감사하며, 욕심부려서 과식하지 않고, 취식 가능한 부위는 가능한 다 먹어 깨끗이 뼈만 남긴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왜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니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돼지를 키우면서 채식주의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였다. 그리고 나중엔 잡아먹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쩐지 놀랍지 않게 느껴졌다. 채식주의자가 스스로 키운 돼지를 결국 먹었다니.) 


그러나 내가 스스로에게 놀랐던 지점은 따로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순진하게도, 돼지를 앞마당에서 키웠을 거라고 상상했다. 아무리 집이 커도 돼지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가능할 리가 없는데. 결국은 나도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로의 '목가적'인 풍경을 주입받은 것이다. 


작가는 돼지를 키우기를 작정하고 돼지를 분양받아 이사 데려오는 것부터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서술한다. 돼지는 성장 속도도 빠르고, 또 이 돼지들은 멧돼지의 피가 약간 섞여있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돼지를 키워본 적이 없다. 책에서 내내 스스로를 '샌님'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1년이 안되는 시간동안 돼지를 먹이고, 돼지 집을 청소해주고, 나중에는 잡아먹었다. 


저자는,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고 고백하며 돼지와 거리를 두려고 하지만, 그래도 함께 사는 동거돼지 정도의 애정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먹으려고 키우지만, 그래도 키우는 동안은 잘 챙겨주려는 마음. 그리고 본인의 철학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도움을 주는 보조자역할. 돼지들은 사료가 아닌 음식이나 인간의 음식을 만들며 나오는 부산물 (쌀겨, 벌레먹은 과일 등)을 먹었다. 그리고 축사가 아니라 충분한 공간이 있는 우리에서 지냈다. 여름에는 진흙 웅덩이에서 놀 수도 있었다. 결국은 죽일 생명에게 잘 해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 라든가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위선자같으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저자에게도 그런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음의 구절이, 이런 고민에 대한 저자의 답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되기 전, 나머지 두 돼지도 순차적으로 도축되었다. 첫번째 돼지처럼 이웃,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세마리 돼지가 떠난 자리에 봄이 오면서 토마토 싹이 났다. 돼지 똥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지난 여름, 돼지는 토마토의 시간을 보냈다. 토마토를 먹고 또 먹었다. 토마토의 시간은 갔고, 이제 돼지의 시간이 되었다. 토마토는 돼지 똥의 양분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힌다. 나도 무언가의 양분이 될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돼지를 키우고 또 잡아먹으면서 생명을 먹는 것의 책임을 곱씹어보았다. 


인간은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지 않는 부산물을 활용해 가축을 길러왔다. 생태계가 감당하는 만큼 가축을 길렀다. 지금은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자연이 스스로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자원을 쓰고, 그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결국은, 모든 이야기가 "미래 자원까지 고갈시켜가며" 생산해야 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이어진다. 꼭 축산업 뿐만도 아니다. 빨리 발전하고자,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 아닌가 하는 분석이 사회 곳곳에서 나온다. 


20세기 초에는 가난했던 우리나라는 특히, '육류를 더 먹을 수 있는 것'이 '더 잘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여 왔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 지나친 육류섭취는 줄이고 나에게도 건강하고 자연에게도 건강한 식생활을 만들어나가면 좋겠다. 





『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이동호 지음

 창비

 2021.06. 


친구들끼리 고기를 먹으러 가면 마치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농촌은 도시가 커지는 만큼 피폐해졌다. 강준만 교수는 ‘지방은 내부 식민지‘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농촌은 젊은이와 식량을 도시로 보냈고, 도시는 농촌으로 혐오 시설과 쓰레기를 보냈다. 석탄화력발전소, 원자력발전소, 폐기물처리장, 화학공장 등 각종 기피 시설이 지방으로 왔다. 축산업도 그중 하나다. 내가 이주한 지역은 하필 국내 최대 축산단지다.

우리 동네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많다.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생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한꺼풀 더 들어가면 축산업의 폐해는 악취로 끝나지 않는다. 값싼 고기를 만드는 구조는 열악한 노동환경, 지하수 남용, 가축용 항생제로 인한 수 생태계 교란, 막대한 온실가스를 남겼다. 과도한 육류 섭취로 인한 건강 악화와 국가 보건 비용 상승도 빼놓을 수 없다. 채식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서민의 고기‘라는 허울 좋은 호칭은 가장 잔인한 사육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그냥 사료를 먹이면 편한데, 왜 나는 고생해가며 부산물을 먹이고 싶었을까.
과거에 가축은 콩꼬투리나 옥수숫대 같이 인간이 먹지 않는 부산물을 먹었지만, 이제는 콩이나 옥수수, 즉 농산물 자체를 먹는다. 전세계 농지의 83 퍼센트가 가축을 기르고 그들을 먹이기 위한 작물을 재배하는 데 쓰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옥수수와 콩은 표토를 사라지게 하는 대표적인 사막화 작물이다. 지구의 피부역할을 하는 표토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축산업계에서는 외양간에서 가축을 키우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말이냐고 묻는다. 그렇게 키워서는 온 인류를 먹일 수 없다고 사람들은 반박한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대안에 대한 논의를 빼고 변화를 거부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변화가 필요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 때다.
이것이 내가 돼지에게 사료를 주지 않고 농부산물을 준 이유였다. 마냥 번거로운 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별도의 에너지 투입 없이 생긴 먹이로 돼지를 기른다는 뿌듯함은 물론 돼지가 무엇을 먹고 좋아하는지를 보며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다.

가축이 울타리 안에 살던 시절, 동물은 가족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구성원으로서 존중을 받았다. 동물이라는 다른 구성원을 대할 때 천벌이라거나 인간의 도리 같은, 지켜야 하는 선이 있었다.
지금의 동물은 경제 논리 안에 있다. 이 논리에 맞춰 인간은 동물을 살이 빨리 찌거나, 알을 많이 낳거나, 젖이 많이 나오는 품종으로 개량한다. 기준에 맞지 않는 동물을 불량품이다. 꼬리와 송곳니, 뿔과 부리를 자르고 거세를 한다. 햇볕을 쬐거나 흙을 밟거나 기지개 한번 제대로 켜지 못하는 틀 안에서 산다. 동물은 인간에게 값싼 고기만 제공하면 되는 공산품일까?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필요가 없는 기계일까? 이것을 그저 동물권의 문제라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미리 준비했둔 중망치를 들어보았다. 무겁고 차가웠따. 돼지 앞에 섰다. 몸에 피가 빠르게 돌지만 머리로 가는 피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우리는 이별이다. 데려오던 날부터 부담되었던 일을 곧 시작해야 한다. 주변 누구도 내가 직접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데려왔고, 내가 시작한 일이다. 마무리할 책임 역시 내게 있다. 그렇다고 꼭 내 손을 통해 마무리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에게 부탁할 수도 있고, 도축장에 데려갈 수도 있다.

내 몸의 저항을 주도하는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망치로 내려친다는 것. 생명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거북감이었다. 내려칠 수가 없었다. 돼지도 생각이 있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는 그 동질감이 거부감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그내로 나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몸은 통제되지 않았고,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한참을 숨을 멈춘 채였다.

그럼에도 나를 돼지 앞으로 데려다놓은 것은 어떤 예의였다. 돼지를 취할 사람으로서 직접 잡아야 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돼지를 마주할수록 그 마음이 커졌다. 잡아먹는 게 배신이 아니고 남의 손을 빌리는 게 배신 같았다. 남이 죽인다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책임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목숨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 지 알아야 했다. 남의 살을 먹는 일, 생명을 얻는 일은 쉽지 않다. 그동안 나는 너무 쉽게 살았다.

겨울이 되기 전, 나머지 두 돼지도 순차적으로 도축되었다. 첫번째 돼지처럼 이웃,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세마리 돼지가 떠난 자리에 봄이 오면서 토마토 싹이 났다. 돼지 똥에 있던 씨앗들이 싹을 틔운 것이다. 지난 여름, 돼지는 토마토의 시간을 보냈다. 토마토를 먹고 또 먹었다. 토마토의 시간은 갔고, 이제 돼지의 시간이 되었다. 토마토는 돼지 똥의 양분으로 자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먹고 서로에게 먹힌다. 나도 무언가의 양분이 될 것이다. 생명만이 생명을 줄 수 있다. 돼지를 키우고 또 잡아먹으면서 생명을 먹는 것의 책임을 곱씹어보았다.

‘1++ 등급‘의 소고기는 근육에 약 17퍼센트의 지방을 갖고 있다. 근육에까지 지방이 있다는 것은 소가 고통스럽게 성장했다는 뜻이다. 근육 내 지방은 간 기능이 손상되고 대사 기능이 마비되면서 비로소 쌓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을 수 없는 것과 먹지 않는 부산물을 활용해 가축을 길러왔다. 생태계가 감당하는 만큼 가축을 길렀다. 지금은 더 많은 고기를 먹기 위해 자연이 스스로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자원을 쓰고, 그만큼의 폐기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일반 농가가 파산하는 와중에 축산 대기업의 주가는 올랐다. 그리고 ‘살처분 테마주‘가 인기 검색어로 올라왔다.

농촌에는 이제 마을community은 사라지고 농업industry만 남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싼 가격이 아니라 적정한 가격이다.

공장식 축산이 최악의 동물 학대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권이 아니라 인간 윤리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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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2021-07-2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에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책의 뒷부분 장 중 하나에,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산문을 인용해둔 부분도 좋았다. 도시에 살다보면 우리가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희생되는 동물들도, 그 동물들을 키우고 도축하는 사람들도 타자화되기 쉬워서, 굳이 인용까지 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존재와 그들의 태도같은 것을 상기시켜준 점이 좋았다. 나는 산업이 고도화될수록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 시키는 것이 걱정스럽다. 대상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