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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르투로 페레스 - 레베르테. 스페인의 유명한 소설가.
하지만 국내에서 열광적으로 유명한 작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한 10년쯤 전인데
제목만으로 구입해서 읽어봤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제목과 달리 체스로 얽혀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이후로 다시 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문장력은 깔끔하면서 가볍지 않은 작가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뒤마클럽'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얘기는 있었고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찬사와 유럽에서 200만부 이상
팔린 책의 작가이기도 해서 신인작가는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로, 여러 유럽 유수의 문학상들을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왠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제목인데
이 작가의 소설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목은 그 소설을 읽게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되지만,
반대로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도 작가의 필력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선택하게 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처럼 벽화로 전쟁화를 그리는 화가인 파울케스가 주인공입니다.
지중해가 보이는 푸에르토 움브리아 항구의 망루에서 그는 머뭅니다.
시니컬한 듯한 파울케스는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에 쫓기듯, 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명의 방문자가 찾아옵니다. 크로아티아인 이보 마르코비츠.
그는 파울케스가 찍어서 상을 받았던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파울케스를
죽이기 위해 그를 연구하고 뒷조사하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남의 이야기를 하듯, 3인칭으로 자신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합니다.
과거 유고슬로비아에서 일어난 인종청소. 세르비아인 부인을 갖은
이보 마르코비츠는 그것으로 부인과 아들이 잔인하게 살해 당하고
자신도 전쟁에, 포로로, 고문 당했던 일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파울케스가 찍은 사진으로 인해서, 그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인생이 파멸되어 버린.. 마치 나비효과와도 같은 그 일에
대해 담담히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살의를 품고 달려들어 지금 당장 죽이겠다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종군 사진 기자 파울케스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그토록 많은 상을 받았던 대단한 사진사가
사진을 그만두고 종적을 감춘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고 죽이기 전에
그에 대해 더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런 파울케스가 그리는 벽화는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왜 갑자기
벽화를 그리는지, 그것도 잔인한 전쟁화인지에 대해 파울케스의
회상과 이보 마르코비츠의 대화를 통해 점점 밝혀집니다.
단 두 사람의 대화로 작가는 전쟁과 사진과 그림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피력합니다. 너무 생생한 종군 기자의 삶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서술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이력을 보니 역시
종군 기자 출신이네요. 단순한 취재로는 그 정도로 써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진은 한 장면을 담아냅니다. 그림은 화가 자신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가지를 비교하자면, 사진은 진실한 것 같고 객관적이며
그림은 주관적이고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진과 그림에 대한 생각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과 파울케스의 삶을 통해서 사진은 진실하지 않고
예술가만이, 그림이 진실하다고 얘기합니다.
이는 사진과 그림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문자적인 진실은 아닙니다.
그들의 - 파울케스와 올비도의 삶에서 내려진 정의입니다.
올비도는 파울케스의 회상을 통해서 등장하는 예전 여자친구입니다.
모델도 했었고 집안이 유명한 예술 관련 집안이라 그녀 또한 그림에
대한 안목이 탁월합니다. 그녀는 사진, 특히 인물 사진을 싫어합니다.
모델로써 꾸며진 사진을 찍어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직 흑백으로 사물만을 찍어댑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폐허가 가득한 사진만을 담아냅니다. 어떤 조작도 하지 않은 그저
그곳에 있는 그 흔적만을 찍습니다.
올비도의 이야기보다 이보 마르코비츠와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사진에 관한 정의를 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찍는 인물 사진.
파울케스가 어느 사진을 찍기 위해 군인에게 협조를 부탁합니다. 그 때
그 군인은 사진에 찍히기 위해 지금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마저 죽인
것은 아니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러나 파울케스는 이 모든 것이 나의 개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거대한 체스 판에 놓여진 체스 말처럼 움직여지는 것 뿐이라 이야기
합니다. 한 군인은 자신에게 사진을 찍게 해주고 나서 며칠 전에 지나갔던
기자가 아니냐는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아는 이유는 당신을
죽일지 말지 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저 죽이느냐 마느냐가 어떤 순간적인 감정이나 생각에
좌우되는 것 뿐이라고, 그 모든 것이 논리적인 누군가의 개입의 문제가
아니라 마치 결정지어졌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파울케스는 이야기
합니다.
그의 말은 이보 마르코비츠의 인생을 파멸시킨 것이 자신의 사진으로부터
였을지라도 자신에게 그 책임이 없다는 회피가 아님을 이보 마르코비츠도,
글을 읽어온 독자도 알게됩니다.
인간은, 자연은 잔인하다. 전쟁은 그것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어떻게 보면 파울케스는 전쟁은 절대적으로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의 모습들을 한데얽혀놓고
그림으로써 화산이 강하게 용암을 분출시켜 그것이 모든 것을 덮듯
인생은 그러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원래대로 악한 인간은 그 화산처럼 악하고 그것이 얽히고 설켜서
인생을, 역사를 만들고 벽의 균열이 그 그림을 덮고 있듯 그렇게
인생에 균열이 덮어져 점점 암흑을 만들고 무너져간다는 것이 이
전쟁화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사진사로써 전쟁을 찍어왔던 파울케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알게되고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마지막으로 올비도의 이야기처럼
그림을 그립니다. 자신이 사진으로써 완성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의
진실을 그림으로 완성해냅니다.
인간은 악한가, 전쟁은 잔인한가 그런 처절하게도 추악한 것에 대해
그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기를 들여다보고 그 순간을 찍었던
것처럼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을 써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존재해왔던 23개의 전쟁화와 자신이 전쟁터에서 찍어왔던 사람들의
모습을 벽화로 담아냈습니다.
누군가를 잃고, 자신을 잃고, 누군가를 잃게 했던 것에 오열하고 절망하는 것
대신에 자신 또한 그 잔인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어떤 잔인한 체스판의 말임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벽화가 아니라, 자신은 이것을
그렸고 이 망루가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며 그것으로 되었다는.. 그 모습이
그의 그런 인생이 더더욱 슬퍼서 아무것도 아닌, 슬프지 않은 문장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쉽는 않은 소설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소설도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별 5개 매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