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가넷 > 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7)]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7)]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자살을 통해 본 '생명의 의지'

▲ 반 고흐,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성공하려면, 그리고 계속되는 행운을 즐기려면, 나와는 다른 기질을 타고나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소망하고 이루고 싶어한 일을 나는 이루지 못했고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삶이 숙명적으로 비극의 그림자 아래 있음을 고백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실패로 규정해야 하는 인생만큼 비참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는 그럼에도 자신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진정으로 감사했다.

“붓을 한 번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의 말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런 비극적인 인식과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이 묘한 긴장과 조화로 어우러진 그림이다. 평론가에 따라 그의 자살 의지를 시사하는 그림이라는 입장과 강한 생명 의지의 표현이라는 입장이 엇갈려 나오는 것도 작품의 이런 성격 탓이 크다.

▲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들판

그림의 무대가 되는 밀밭은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다.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오베르에는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의 무덤도 있는데, 그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뒤쪽으로 밀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옛날 한 절박했던 예술혼의 아픔과 슬픔은 모두 잊었는지 밀밭은 그저 여느 들판과 다를 바 없이 허허롭게 오가는 세월을 맞는다.

현장에 가 보면 반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길은 네 갈래로 갈린다. 하지만 한 평면 안에 세 갈래의 길이 모두 예각으로 모여 있는 반 고흐의 그림은 의도적인 왜곡이다. 직각으로 교차하는 갈래 길은 카메라의 광각 렌즈로도 반 고흐의 그림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반 고흐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세 갈래의 길을 화면에 그려 넣었다. 두 갈래의 길이 아닌, 세 갈래의 길. 삶과 죽음, 흑과 백을 가르는 ‘2’가 아니라, 삼발이 의자처럼 다양성과 조화, 존재의 완성을 지향하는 ‘3’. 그것은 반 고흐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언가 제 3의 길을 원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늘 저편이 어두워지고 까마귀 떼가 날아오는 모습에서 불길하고 어두운 기운의 엄습을 느낄 수 있으나, 지금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밀밭은 강렬한 노란색 희망으로 용틀임친다. 기껏 까마귀 몇 마리가 곡식 좀 훔쳐먹어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을 저 광활한 밀밭. 영원한 생명으로 요동치는 황금의 바다. 어두운 하늘의 운명에 대해 강렬한 저항의 몸짓을 보이고 있다.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표현한 이 무렵의 또 다른 인상적인 그림으로는 ‘나무 뿌리’가 있다.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들의 힘찬 투쟁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다. 땅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처럼 역동적인 노랑색과 고동색으로 파도친다. 뿌리들은 그 뜨거운 노랑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마음껏 빨아들이며 하늘을 향해 몸을 곧추세우고 팔을 뻗는다.

▲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 1890, 캔버스에 유채, 67X56cm, 개인 소장
하지만 이런 충일한 생명감도 끝내 하늘로부터의 어두운 기운을 다 물리칠 수 없었다. 땅은 하늘을 덮을 수 없지만, 하늘은 땅을 덮는다. 이 그림을 그린 며칠 뒤 반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쏴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삶과 예술을 향한 의지를 저리도 생생한 이미지로 남긴 채 말이다.

“법의학자의 오랜 경험에 비춰 반 고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하려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슴에 총을 쏘되 심장에서 떨어진 곳에 쏴 절명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는 것은 죽음보다 자살을 기도함으로써 주위의 관심을 끄는 데 더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로 법의학자 문국진 선생의 평가처럼 반 고흐는 자살보다 자신의 자살 기도가 주변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에 더 관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것도 결국 삶을 향한, 생명을 향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소통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을 하기를 원했다. 진정한 소통만 이뤄진다면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도 두렵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그의 예술에 이토록 가슴 저리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그런 소통 의지가 끝내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고뇌”

오베르(Aubers sur Oise)는 파리에서 35km쯤 떨어져 있다. ‘반 고흐의 집(Maison de Van Gogh)’이라 불리는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 빈센트 반 고흐가 이 여인숙에 온 것은 1890년 5월 20일이다. 당시 오베르에는 라부 여인숙보다 못한, 혹은 그보다 나은 숙박시설이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러우면서도 손질이 잘된 이 여인숙을 보고 반 고흐는 이곳에 묵기로 결정했다. 하루 방값은 3프랑50전. 식사는 그가 좋아하는 시골풍으로, 고기와 야채, 샐러드, 빵이 제공되는 조건이었다. 반 고흐는 이 건물의 3층에 묵었다. 반 고흐의 방은 아주 작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도 매우 불편한 곳이다. 현재 그곳에는 작은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작고 가난한 공간을 바라보노라면 빈센트의 영혼이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창백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것만 같다. 먼지를 맞으며, 그가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그 비좁은 공간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동생 테오에게 한 말을 끝내 포기하지 않고 품어 안고 있었으리라.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이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이 말 위로 “다 이루었다”고 한 십자가상의 예수의 언급이 ‘오버 랩’돼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연상인 것 같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화가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한 성인처럼 모든 것을 이룬 뒤 이렇게 까마귀가 나는 밀밭 위로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미술평론가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지상에 버려진 천사’로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죽어서 신화가 된 미술사의 대표적인 천재 화가이다. 네덜란드 개신교 목사의 아들인 그는 화랑 직원으로 출발해 학교 교사, 선교사 등을 지냈으나 그 타고난 예술적 천재에 이끌려 결국 화가가 됐다.

▲ 반 고흐가 투숙했던 라부 여인숙

마우베 등의 화가로부터 그림을 배우기는 했으나 원칙적으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천재로 평가된다. 1886년 동생이 화상으로 두각을 나타내던 파리로 가 베르나르, 드가, 고갱 등 인상파, 신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한 뒤 곧 아를로 내려가 독자적인 창조의 세계에 몰입했다. 고갱과의 다툼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그의 정신병적, 폭력적 스캔들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정신병이 심해져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베르로 이주했다. 인상파, 신인상파뿐 아니라 들라크루아의 색채, 일본 판화의 색채 및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팔리는 등 오늘날 최고가 거래 화가의 한 사람이다.



http://weekly.chosun.com/wdata/html/news/200408/200408110000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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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3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입니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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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7-1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인거 같아요. 알다가도 모를 것이 바로 사람 마음.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어쩜 이리도 다른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이 적응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해리포터7 2006-07-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그렇죠? 세실님..저도 그게 늘 모르겠답니다.

sooninara 2006-07-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도 까먹는 진실이네요.
저는 싫어하는 사람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살자주의예요.

달콤한책 2006-07-1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멋진 한 마디 할래요.
부부가 돌아누워 자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마주할 수 있답니다^^
등 대고 자지 마세요~~~

해리포터7 2006-07-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책님.ㅋㅋㅋ 울 남푠이 한번 코골기 시작하면 전 돌아눕다못해 거꾸로 자야 해요.ㅋㅋㅋ

해리포터7 2006-07-1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님의 생각을 저도 본받고 살고싶어요.^^

또또유스또 2006-07-15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해리포터님의 생각을 본받고 싶어요 ...하하하하하~

해리포터7 2006-07-15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또유스또님 우리모두 본받으며 살아요.하하하하하!ㅋㅋㅋ

똘이맘, 또또맘 2006-07-15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저도 늘 마음따로... 머리따로...

해리포터7 2006-07-16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똘이맘님 그렇죠^^
 
 전출처 : 水巖 > 많이 놀아줄수록 창의성 높아져


<멋진 아빠되기>
많이 놀아줄수록 창의성 높아져
며칠 전, 방송국에서 촬영을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 모 연구소의 ‘아빠가 아이와 많이 놀아주면 창의성이 높아진다’는 발표 후 샘플 가족으로 선정된 것이다. 그동안 아이와 놀았지만 창의성도 높여준다니 보너스를 받은 듯하다. 그래서 팔불출 아빠로서 중간결산을 한다. 3학년 기범이는 그동안 1분놀이를 100개 이상 개발했다.

놀이 하나를 가르쳐주면 두 개를 개발했고 그것은 필자가 저서를 쓰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작년 9월에는 2년만에 바둑 1급이 되었다. 그동안 힘들면 그만두라고 여러번 말을 했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지금까지의 주요 경험은 경비행기 탑승체험 8번, 무인도에서 탈출하기 4번, 카누타기 3번, 연어잡이 3번, 서바이벌 게임 20번, 승마 10번, 양털깎기 3회 등이다.

중1 딸은 아들과 비슷하고 ‘행복쿠폰’을 개발하여 필자의 저서에 6쪽 분량의 그림을 그렸으며 현재 그것을 회원들에게 무료로 보내주고 있다. 요즘은 이 난에 삽화를 그리며 전문가용 마카로 그림을 창작하는데 푹 빠져있다. 하루에 3~4시간을 그린다. 어느 날, 그린 그림 20여장을 코팅하여 벽면에 디스플레이를 해주었다.

창의성의 핵심은 체험과 놀이다. 우선 체험은 능동적인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이 때문에 사물에 대한 탐구력과 조화능력이 발달하여 창의성을 키워준다. 놀이는 하면 할수록 교감과 친화력이 높아진다. 물론 놀이는 쉽게 접근해야한다. 힘들면 힘이 안 들면서 하는 놀이, 힘이 넘치면 활달한 놀이를 하면 된다.

그런데 놀이 속에는 비밀코드가 있다. 놀다보면 희로애락이 발생한다. 그것은 블랙홀과 같이 아이의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마음이 저절로 읽혀지며, 소질과 재능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 때, 이정표를 제시하여 스스로 갈수 있게 도우미 역할을 하면 효과적이다. 그동안 아이의 두뇌를 평가하는 기준이 IQ에서 요즘은 감성지수인 EQ로 바뀌었다.

이제 미래는 놀이지수인 PQ의 전성시대로 진화할 것이다. 어찌 보면 필자는 잘 놀아주고, 웃음으로 대하는 예스맨 아빠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격한 아빠다. TV시청과 취침시간도 철저하게 규제한다. 어기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스스로 판단하고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엄격함은 당연히 필요하다.

이제 21세기는 창의성의 시대이다. 그것은 미래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글로벌 경쟁에 생존하기 위해 나이와 학력을 파괴하고 창의성을 우선순위로 삼아 다양한 방법으로 인재를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과외 공화국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외선생님이 없으면 공부가 안되는 티처보이로 변하고 있다. 강요에 의한 지식쌓기란 당장은 만족할 수 있어도 결국, 경직된 사고를 하게 되어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모든 아빠의 소망은 아이가 잘 되는 것인데 창의성이야말로 아이의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다. 이제 돈을 버는 것과 창의성을 높이는 것에 동등한 가중치를 두어야 한다. 아이의 소질을 찾아주고, 마음에 품게 해주고, 키워주는 역할은 아빠가 발견하기가 가장 쉽고 빠르다. 놀이와 체험은 생명과의 교감이기에 아이의 성장과정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있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이 아빠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권오진(‘아빠의 놀이혁명’ 저자·www.swdad.com)
 
출처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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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마늘빵 >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고종석)

2006. 7. 12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7/h2006071117464985150.htm

 

[말들의 풍경] <19>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
가시내… 서리서리… 내 영혼 적시는 울림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은 세대와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서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김수영 시인

누구에게나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그 심판관의 편견에 깊숙이 연루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먼저 깊이 알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라서 외국어로 배운 언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문화적 허영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기 쉽다. 프랑스 바깥에서 프랑스 문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제 몸뚱어리에도 이물감을 주는 프랑스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는 것 따위가 그 예다. 마흔일곱 해 동안 한국어를 써온 한 남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를 벌여놓는다.

하나, 가시내.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가시내’에는 붉은 밑금이 그어져 있다. 그것은 이 낱말이 규범 한국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한국어 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그것이 표준어 ‘계집애’의 서남 방언이기 때문이다. ‘가시내’라는 말에 깊은 울림을 입힌 이로 서남 출신의 시인 서정주가 있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입마춤’)이나, “눈물이 나서 눈물이 나서/ 머리깜어 느리여도 능금만 먹?杵底? 어쩌나… 하늬바람 울타리한 달밤에/ 한 집웅 박아지꽃 허이여케 피었네”(‘가시내’) 같은 시행에서, 가시내는 순애와 애욕을 동시에 체현하고 있다. 사랑과 관련된 정서적 소구력의 크기에서, 표준어 ‘계집애’는 도저히 ‘가시내’에 다다를 수 없다.

둘, 서리서리. 부사 ‘서리서리’는 동사 ‘서리다’에서 나왔다. 서린다는 것은 (국수나 새끼 따위를) 헝클어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포개 감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리서리’는 포개어 감기는 모양과 관련 있는 부사다. 국수 뭉치를 세는 단위 ‘사리’가 ‘서리서리’와 동원어(同源語)임은 물론이다. ‘서리서리’는 사랑의 부사다. 이 낱말을 사랑의 부사로 만든 사람은 황진이라는 여자다. 이 여자의 유명한 시조 한 수는 이렇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애인과 떨어져 있는 황진이에게 겨울 밤은 한없이 길다. 그런데 그 밤은 애인과 함께라면 너무나 빨리 새버릴 밤이다. 시간의 빠르기는 각자의 심리 상태에 달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시인은 이 밤을 여투어두기로 한다. 그녀는 밤을 한 토막 잘라내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놓기로 한다. 애인이 온 날 밤에 굽이굽이 펴기 위해서. 황진이의 놀라운 상상력은 시간을 공간으로, 물질로 바꿔놓고 있다.

셋, 그리움. 그리움은 결핍의 정서적 효과다. 프랑스어 화자들은 “나는 네가 그리워”를 “너는 내게 결핍돼 있어”(Tu me manques)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랑의 시는 그리움의 시다. 사랑은 결핍과 부재의 상태에서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김영랑의 ‘내 마음을 아실 이’)나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서정주의 ‘아지랑이’)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사사로운 감정이지만,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 묻은 그리움”(이성부의 ‘벼’)이나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김정환의 ‘지울 수 없는 노래’) 같은 시행에서 그리움은 정치적 사랑과 이어져 있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둘 다 빈 데를 채우려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좀더 객관적으로는 ‘기다림’이라 부른다.

넷, 저절로. ‘저절로’는 인텔리전트빌딩이나 하이테크파크의 작동 원리다. 그것은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또는 노동에서 배제하는 새로운 사회의 부사다. 다시 말해 ‘저절로’의 공간은 ‘인간이 거세된 인공’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자연의 공간이기도 하다.

16세기 문신 김인후(金麟厚)는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 노래한 바 있다. ‘저절로’는 애씀이나 집착을 넘어선, 마음과 몸의 가장 높은 단계이기도 하다. 인위와 자연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 ‘저절로’의 매력 또는 마력이다.

다섯, 설레다. 설렘은 마음의 나풀거림이다. 그것은 정서적 정신적 미숙의 증상일 수도 있다. 부동심(不動心)은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이 다다르려 애쓴 이상적 마음상태였다. 그러나 설렘이 없다면 생은 얼마나 권태로울 것인가. 소풍 전날의, 정인(情人)을 기다리는 찻집에서의, 설날 해돋이 직전의 설렘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생의 정당한 사치다. 그것은 생의 밋밋함을 눅이는 와사비다.

여섯, 짠하다. 내가 늘 펼치는 한국어 사전에는 ‘짠하다’가 “지난 일이 뉘우쳐져 못내 마음이 언짢고 아프다”로 풀이돼 있다. 내가 굳이 사전을 펼쳐본 것은 컴퓨터 모니터 속 활자 ‘짠하다’에 붉은 밑금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연히 밑금이 그어지리라 지레짐작했다. 이 말을 서남 방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전의 설명이 표준어 ‘짠하다’의 올바른 정의일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짠하다’는 사전의 정의와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그 뉘앙스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어 화자 가운데서도 서남 지방 사람들일 것이다. 서남 사람들이 잘 쓰는 ‘짠하다’는 표준어 ‘안쓰럽다’와 뜻이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고스란히 겹치지는 않는 것 같다. ‘짠하다’에는 안쓰러움과 애틋함이 버무려져 있다. ‘짠하다’는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형용사다.

일곱, 아내. ‘아내’라는 말이 내게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일 테다. 요즘엔 젊은 세대고 나이든 세대고 할 것 없이 ‘아내’ 대신 ‘와이프’라는 말을 즐겨 쓰는 듯하다. 힘센 언어에서 차용된 외래어는 그 비릿한 사용 맥락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게 들리게 마련이지만, 이 ‘와이프’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국어 속에 끼여든 ‘와이프’는 그 본적지에서와 달리 천박하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여덟, 가을. 지방에 따라 ‘가을’이라는 말이 ‘가을걷이’ 곧 ‘추수’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 걸 보면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서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을은 또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다. 미국 사람들의 ‘가을’(fall)에는 그 조락의 상상력이 또렷하다. 성함의 끝과 쇠함의 시작이 맞닿아 있는 때가 가을이다.

아홉, 넋. 넋에 대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은 공식 통계와 상관없이 인류의 종교적 심성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는 뜻일 테다. 넋이 과학의 까탈스러운 눈 앞에 제 모습을 번듯하게 드러내지 못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넋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얼마나 납작할 것인가.

열,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술은 뇌세포에 상처를 낼 정도로, 또는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각이 흐릿해져 서로 악다구니를 써대거나, 과장된, 또는 가장된 애상의 몸짓이 펄럭일 정도로 마실 일이 아니다. 이 말을 해 놓고 보니 쑥스럽긴 하다. 나 자신 ‘음주인’의 직업윤리를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시인 김수영이 꼽은 말은?
마수걸이·에누리·은근짜·총채… 상인집안 내력에 장사 용어 많아

시인 김수영(金洙暎ㆍ1921~1968)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수필에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로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꼽은 바 있다. 시인 자신이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에 들은 말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상인이라 나는 어려서 서울 아래대의 장사꾼 말들을 자연히 많이 배웠다”고도 고백하고 있거니와, 이 말들 가운데는 ‘시장 언어’가 꽤 있다. 장사꾼의 공간이라는 ‘아래대’란 동대문에서 광희문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 맞은편의 서울 서북 지역은 ‘우대’라 불렀다.

젊은 독자들 귀에 설지도 모를 말들을 설명하자면 ‘마수걸이’는 하루나 한 해 중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일을 뜻하고, ‘은근짜’는 몸을 파는 여자를 뜻하며, ‘서산대’는 옛날 글방에서 학동들이 책의 글자를 짚는 데 사용하던 막대기다. 먼지떨이라는 뜻의 ‘총채’도 요즘은 많이 쓰지 않는 듯하다.

김수영이 꼽은 이 말들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 세대(와 출신지역과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젊은 세대라면, 설령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포착해야 할 뉘앙스를 도무지 잡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의 뉘앙스)이 변하는 것은, 그래서 아름다운 말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수영은 이 수필에서 자신이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다며 “‘얄밉다’ ‘야속하다’ ‘섭섭하다’ ‘방정맞다’ 정도의 낱말이 퇴색한 말로 생각되고 선뜻 쓰여지지 않는 반면에, ‘쉼표’ ‘숨표’ ‘마침표’ ‘다슬기’ ‘망초’ ‘메꽃’ 같은 말들을 실감 있게 쓸 수 없는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가 우리의 세대”라고 푸념하고 있다. 그렇지만 김수영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는 언어의 생태학 속에서 ‘매우 엉거주춤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어중간한 비극적 세대’일 수밖에 없다. KBS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 ‘상상플러스’의 ‘세대 공감 OLD & NEW’라는 코너는 한 세대의 말이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각자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꼽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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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화가의 집을 찾아서> 서평단 모집!

안녕하세요,
알라딘 편집팀 박하영입니다.

샘터사에서 출간 예정인 <화가의 집을 찾아서>를 읽고 리뷰를 써주실 독자 5분을 찾습니다.
이전에 진행된 <초밥>, <아시아 Volume 1>,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 서평단에 뽑히신 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기회를 양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가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책이다. 스무 명의 작고한 우리나라 근현대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다루는데, 이들을 '지역'이라는 테마로 묶어서 분류하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화가의 육체와 정신을 배태해낸 그 고장의 지역색을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한젬마의 한반도 미술 창고 뒤지기'란 부제를 달고 있는 시리즈(전3권)의 첫 두 권,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는 각각 서울 경기 이남에서 태어나 활동한 화가를 다룬다. 2007년 상반기에 출간될 나머지 한 권에서는 서울 경기 지방에서 태어난 화가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화가의 유족을 만나 인터뷰하고, 화가의 생가를 직접 찾아가고, 화가를 기념하는 각 지방의 미술관을 취재해서 상세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런 과정에서 취득된 화가에 대한 정보를 각주나 미주 형식으로 달아놓았다. 또한 화가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장소를 지도와 함께 소개해 독자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말미에는 책에서 다룬 화가들의 생가와 기념관이나 박물관 유무를 간단한 표로 작성해 실었다.

*  서평단에 참여하길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신청합니다"라고 써주시면 됩니다.
*  신청해주신 분들 가운데 10분께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신청은 7월 18일 화요일 오전 10시까지 받습니다.

서평단 모집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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