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 순조실록 -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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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뜻밖에 순조의 치세는 길었다. 정조라는 임금의 역사적 중량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나는 늘 순조를 얼마 못 가 죽은 임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1790-1834)는 정조가 죽은 1800년 7월 4일에 즉위해서 1834년11월 13일에 승하했다. 치세는 무려 34년이었다. 정순대비가 수렴청정한 초반 3년 6개월을 빼더라도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정조는 1776년에서 1800년까지 25년을 왕으로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서 더 오랜 세월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도 순조는 우리 뇌리에 남는 게 없는 임금이다. 왜일까? 박시백은 순조가 내세운 정치적인 비전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대를 돌파하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조는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타협한 임금이었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그 위기를 더해가게 된다. 순조시대를 특징짓는 다른 인물은 정순대비, 김조순, 홍경래이다. 
 
정순대비는  순조의 즉위 초에 수렴청정을 3년 6개월 동안 하면서 신유박해를 통해서 남인을 도륙하고, 벽파독재정권을 수립한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정조나 정약용 같은 영웅에 대항하는 반영웅으로 묘사된다. 박시백은 그런 시각이 좀 과장되었다고 지적한다. 수렴청정을 오래하지 않고 물러난 일이나, 시파인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그대로 지속시킨 점, 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를 지시한 정조의 정치적 유지를 그대로 계승해서 6만여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킨 점 등을 들어서 정순대비가 반동의 화신처럼 묘사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은 좀 더 공부가 필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대비들의 수렴청정만 따로 다루어보는 책도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는 김조순을 신뢰했던 모양이다. 죽기 몇 년 전에 순조에게 김조순은 왕을 잘 보필할 수 있는 인재라고 적극 추천했던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정조가 오히려 세도정치의 길을 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시백은 김조순을 막후 김조순이라고 표현한다. 순조치세 30년의 막후실력자는 바로 김조순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의 원조라고 지칭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김조순은 그 자체로 보면 대단히 후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것은 그가 늘 겸양을 실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벼슬자리를 주면 그대로 받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늘 자신은 부족한 자이기 그 자리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면모를 보였다. 박시백은 이것을 김조순이 그 이전의 척신(외척출신 신하)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냉철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한다.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다른 실력자들과 연합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인 장수를 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치를 거의 손놓다시피 한 순조에게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영조나 정조처럼 신하를 다루는 영도력이 없었기에 순조년간에는 그렇게 세도정치가 기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순조치세는 당파의 소멸과 왕가의 허약함 위에 한 가문의 위세가 꼭대기에 올라서고, 그것이 곧바로 백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순조 11년 말에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의 반란이 일어났다. 6개월 정도를 끈 반란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반란의 지도자였던 홍경래는 평민출신이었다. 그를 따랐던 백성들도 평민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란의 원인이 된 것은 효율성을 잃어가는 조선의 통치체계였다. 더 이상 과거는 공정한 인재선발의 통로가 되지 못했고, 백성들은 각종 명목의 수탈에 짓눌렸다.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왕조의 힘도 없었다. 바야흐로 양반관료들에 의한 수탈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것이다. 홍경래의 반란은 조선왕조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홍경래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효과는 동학농민전쟁까지 이어진다. 이후 일어나는 많은 민란의 배경에는 홍경래라는 이름이 들어간다. 백성들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길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에 의한, 사대부를 위한,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 곧 양반은 나라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결코 국가에 의해서 수탈되는 법이 없었다. 죄를 지어도 얼마 안가서 사면되고 다시 양반행세를 한다. 양반은 모든 의무에서 열외다. 순조년간에는 이런 양반열외현상에 덕을 보기 위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돈이 없어서 평민으로 머무는 자들은 지방수령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수탈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안되면 도적이 되는 수밖에. 책에서는 '이여절의 나라'라는 장을 통해서 이것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여절은 정조 19년에 창원군수였고, 순조 22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나온다. 중간에 그는 온갖 명목으로 백성을 수탈하지만 잠시 유배나 강등을 겪고 나면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다. 이 장을 보면서 현대의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법률과 조세체계는 조선시대에 양반을 우대했던 그 시절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역사는 과연 얼마만큼 전진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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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2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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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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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등록금 연간 천만원, 청년 실업 백만명 시대다. 서민의 고통은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대는 길을 잃었다. 희망은 있는가? 이 책의 지은이들은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희망의 근거인가? 2008년의 광장에 모인 촛불이 바로 그것이다. 촛불의 민심은 꺼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2010년 6.2지방선거를 통해서 촛불은 부활했다. 조국 교수가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토론회에서 인용했다는 <정관정요>의 말을 입증해주는 사건이었다. “왕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엎을 수도 있다.” 우리 시대의 최고 지도자는 정치가가 아니라 기업대표처럼 생각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배가 엎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 못하는 모양이다. 
 

이 책의 부제는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이다. 오연호는 64년 전남 태생이다. 연세대 83학번이다. <말>지 기자를 지냈으며, 지금은 <오마이뉴스>대표를 맡고 있다. 조국은 65년 부산에서 태어나 82년에 서울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서울대 법대 교수를 맡고 있다. 사실상 둘은 동갑이면서 불의 시대였던 80년대의 시대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은 2012년이나 늦어도 2017년에는 진보개혁세력이 반드시 정권을 다시 찾아 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 상황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어디서부터 파열구를 내야 할까요?”라는 오연호의 질문이 그 문제의식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오연호와 조국은 이 문제에 대한 탐색을 위해서 7개월 동안 만나서 이야기를 계속해 왔다. 이 책은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6장에 걸쳐 보여준다. 제1장은 성찰이다. 왜 진보가 집권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제2장은 사회경제 민주화다. 특권과 불공정의 시대를 어떻게 넘어설지를 이야기한다. 제3장은 교육을 이야기한다. 제4장은 남북문제를 이야기한다. 통일이 밥 먹여준다는 구호로 집약된다. 제5장은 권력이다. 검찰의 문제를 집중해서 다룬다. 제6장은 사람이다. 유력한 대권후보들을 거명하면서 비평을 한다. 진보집권플랜은 ‘진보가 밥 먹여준다’이다. 그렇게 해서 집권하면 진보적인 정책을 집행해서 진보의 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우리 사회를 확연히 바꾸자는 것이 이들의 포부이다.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집권 계획이다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그만큼 이야깃거리도 많다. 그래도 두루뭉술하지 않고 핵심을 짚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중에서도 나는 세 가지 측면을 재미있게 보았다. 첫째는 경제사회적 민주화의 전략에 대한 것이다. 우리사회의 정치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비교적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이에 견주면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는 아직 한참 멀었다. 우리의 비교대상인 OECD의 평균에 비추어도 우리는 너무도 후진적인 경제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OECD평균 고등교육예산은 GDP의 1.2%다. 한국은 0.6%다. 절반 수준이다. OECD에서도 사회적 구조가 평등한 축에 속하는 프랑스는 대학등록금이 한 해에 10만원이란다. 놀랄 노자로다. 우리하고 백배 정도나 차이가 난다. 부동산 정책도 최후진국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장기임대주택이 전체주택의 3%수준이다. 싱가포르는 80%다. 이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임대주택은 빈민들의 주거로만 인식된다. 집에 뒷덜미가 잡힌 중산층과 서민이 한둘인가. 

둘째, 검찰권력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다. 조국은 검찰의 생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검찰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다른 권력기관에 비해 ‘문민통치’를 받지 않고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227쪽). 검찰은 보수적 세계관과 엘리트주의를 체현하고 수사권과 공소권을 독점한 권력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당도 아닌데 정치결사체 같은 조직같이 굴러간다(235쪽). 검찰개혁의 핵심은 그 힘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서 검찰이 독점하는 공소권을 나누고, 수사권은 경찰과 나눠갖도록 해야 한다.(242쪽) 조국은 검찰과 비슷한 조직이 하나 더 있다고 한다. 뭘까? 삼성이다. 어찌보면 진보개혁세력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면 이와 같은 경제권력, 국가권력의 독점적 지배현상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핵심에 검찰과 삼성이 버티고 있는 셈이다. 진보가 집권하면 이 부분에서 대회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노무현 집권 기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특히 2004년 탄핵이후 진보개혁세력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던 1년 동안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하여 심도깊게 조명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민심은 무서운 것이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정치인들을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가도 자기들의 운명을 걸어볼 만한 세력이나 인물이 나타나면 무섭게 밀어준다. 이른바 신명이고 바람이다. 민중들이 깨어나면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어나면서 기존의 정치판을 부수어버릴 정도록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만 해도 여러 번 그런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민중이라는 거대한 생물을 깨우고 그 등에 올라타는 탁월한 지도자나 조직이 나타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체현한 존재로서 대통령이 되었지만, 관료에 의지하고, 재벌들과 타협함으로써 스스로 민중에게서 멀어지는 존재가 되었다. 민중들은 그런 노무현과 노무현의 정당을 버리고,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 순간 노무현의 정치적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무현을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명박 정권의 지나친 시도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정신이 가진 순수함을 모멸함으로써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다. ‘선비는 죽게 할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다’는 논어의 말을 노무현의 죽음은 실례로 보여주었다. 노무현은 스스로를 버림으로써 민중 속에서 자기를 따르던 세력이 부활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진보의 집권과 우리사회의 진보적 재편은 노무현 시대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진보의 혁신을 가리키는 열쇳말로 나오는 것이 바로 ‘김상곤 효과’다. 진보개혁세력은 ‘밥먹여주는 정치’와 상관없는 집단이라는 것이 민중들의 상식이었다. 무상급식은 말 그대로 나라가 돈 안 받고 밥을 먹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그 동안 우리는 꿈도 꾸지 않았다. 나라에서 무엇인가를 공짜로 받아간다는 것은 빈민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우리는 배워왔다. 부의 양극화, 사교육비 폭등, 저출산과 고령화쇼크를 겪어가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의 양태를 어떻게 바꿀지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희망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없었던 탓이다. 김상곤 효과는 그 급격한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촛불 만으로는 부족했다. 광장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근원적인 힘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34쪽) 것이다. 새시대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인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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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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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몸을 바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천성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48쪽) 
 
메리 스튜어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정치가인 자기의 본질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정열이라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순간 그녀의 삶은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적대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는 불행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세에서 승리자가 되었고, 대영제국의 기틀을 놓는 역사적인 위업도 달성했다.  글쓴이인 스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통틀어서 시종일관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의 성격과 성장과정, 사고방식, 통치행태 등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가 중세시대의 이상을 물려받은 낭만주의자이며, 골수 가톨릭인데 비해서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상공업시대의 현실을 현실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현실주의자이며, 개신교도이다. 이 둘의 대결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대결이며, 중세와 근대의 대결이면서, 가톨릭와 개신교의 대결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1542년 스코틀랜드왕인 제임스5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에 30세였던 아버지는  메리가 태어난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메리는 9개월 뒤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정치는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청소년기에는 프랑스의 앙리2세의 아들인 프랑스아2세와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프랑스 왕이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결국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의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며 문화적 오지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이 부닥치는 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여왕으로서 다수의 개신교귀족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한 사람의 여자라로서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사람을 끄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또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여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런 메리스튜어트의 삶에 닥친 위기는 바로 '사랑'때문에 온다. 두번째 결혼 때 그녀는 겨우 스물세살이었다. 남편은 스코틀랜드의 귀족 단리였다.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여자를 끄는 매력이 있었던 단리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단번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애초에 두번째 남편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대상은 강력한 왕권의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사랑 때문에 그녀는 귀족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리와 결혼을 통해서 메리 스튜어트는 아들 제임스6세-나중에 통합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제임스1세-를 낳게 된다. 문제는 단리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했다는 사실이다. 

단리는 나중에 메리의 왕권에 지나친 간섭을 일삼게 되고, 메리는 단리의 정치적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메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메리가 보스웰 백작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스웰 백작은 강력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보스웰이야말로 진짜 사내였다. 츠바이크의 표현을 옮겨본다. " 그동안은 오직 애송이 같은 남자들만 겪어보았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남자들이었다." 애송이 같은 남자들이란 병사한 첫번째 남편인 프랑수아2세와 두번째 남편 단리를 말한다. 두번째 남편 단리는 폭사당한다. 여기에 가장 혐의가 많은 사람은 보스웰 백작이었다. 온 나라에 보스웰 백작과 메리가 합작하여 단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번졌다. 그런데도 메리는 보스웰 백작을 가장 신임하고, 권력은 보스웰이 쥐고 군사독재를 실시하게 된다. 메리는 보스웰과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다. 결국 둘은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되고(그 사이 내막이 복잡하다), 귀족들은 '단리의 살해자 보스웰 처단'을 깃발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 메리여왕은 보스웰과 같이 귀족들에 대항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결국 보스웰은 망명하고, 메리 여왕은 어느 섬에 유폐된다. 귀족들은 메리의 한살짜리 아들인 제임스6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백작이 전권을 쥐게 된다. 메리는 1년 뒤에 탈출하여 반란세력 타도를 목표로 봉기하지만, 결국 귀족연합군에 패배하여 도망가게 된다.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여왕은 엘리자베스1세였다. 둘 사이에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둘 다 헨리7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메리는 명시적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1세는 한 때 아버지인 헨리8세에 의해 '사생아'라는 선언을 당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1세로서는 왕권에 대한 알레르기 비슷한 감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 망명했으니 늑대의 소굴을 피해서 범의 소굴로 뛰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스튜어트를 사실상 감금상태로 18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에 잡아둔다. 메리는 잉글랜드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사실상 잉글랜드 가톨릭의 희망 비슷한 존재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제거되면 바로 메리는 왕위계승권자로서 가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에 살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감금되어있던 동안에도 메리는 끊임없이 스페인과 프랑스, 로마의 가톨릭 세력에게 구원과 반란을 요청하는 원격정치를 해나간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1세와 월싱엄(일종의 경찰총수?)이 펴놓은 그물에 걸려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하고 만다. 이른바 '배빙턴 모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가톨릭반란 세력인 배빙턴에게 엘리자베스 암살을 종용하는 편지에 확답을 써 보냄을 보써 반란세력의 수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87년 2월에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엘리자베스1세의 사후에 잉글랜드는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1세)가 통치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의 통합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메리는 근세유럽에서는 왕으로서는 최초로 참수형을 받은 존재였다. 메리 이후에 메리의 손자인 찰스1세는 청교도혁명으로 역시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참수형을 받은 왕과 왕비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메리는 유명하기도 하고, 또한 골수 가톨릭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유명하기도 하다. 그녀는 엘리자베스1세와 대비되면서 다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엘리자베스1세는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고난 속에서 보낸 것에 비해서 메리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타고난 여왕이요 왕비라고 할 수 있겠다. 외모와 교양도 당대 유럽에서는 비길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치가로서 지녀야할 냉혹하고 계산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다. 두번째 남편인 단리의 죽음 전후에 그녀는 정치가로서 계산적이지 못한 행태를 드러낸다. 이것이 결국 그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기가 되고 만다. 이에 반해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총애했던 더들리백작의 부인이 사고사로 죽는 일이 벌어지자, 역시 유언비어에 휩쓸리게 된다. 이 때 엘리자베스는 정치가로서 판단력을 잃지않고 더들리를 과감하게 멀리하는 결정을 단행한다. 이런 점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경쟁자인 엘리자베스에게 모자랐고, 결국에는 엘리자베스의 포로가 되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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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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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모텐슨은 평범한 미국인은 아니다. 여러모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지만,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 미국에 가서 40대 후반에 죽었다.아버지 탓에 그레그는 어린 시절을 탄자니아의 밀림에서 다양한 흑인부족들과 같이 지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레그에게는 평생 불치병에 시달리가 아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그가 파키스탄의 산골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학교를 지어주는 별난 사업을 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그레그 모텐슨은 군인경력도 있고, 간호사 경력도 가지고 있는 산악인이었다. 여동생이 어느날 죽게 되면서 그레그는 여동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K2 등반대에 비상간호 담당으로 참가한다. K2봉우리에 여동생의 유품을 묻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등반은 실패하고, 내려오는 길에 그는 길을 잘못 접어들게 된다.힘든 하산길에 우연히 그레그는 코르페 마을에서 쉬게된다. 거기서 그는 하지 알리라는 마을 촌장을 만난다. 촌장의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여 촌장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자, 하지알리는 그 대신 학교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는 지식의 빛을 안겨주고싶었던 것이다. 하지 알리는 쿠란을 암송하면서도 쿠란을 읽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쿠란에는 '순교자의 피보다 학자의 잉크가 더 귀하다'는 문구가 있다.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이슬람에는 있다.

이렇게 해서 그레그가 파키스칸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려는 사업은 궤도에 오른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유명인사들에게 500여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중에 답장이 돌아온 것은 단 한통. 장회르니라는 사람이었다. 정보통신업계의 거물이면서 엄청난 부자였다. 그에게 회르니는 몇만 달러의 기부를 약속하고 학교를 지은 뒤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레그는 학교를 지어주기 위해서 마을로 간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그는 좋은 사람도 만나지만, 눈치빠른 사람도 만난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을에 갔더니, 마을 촌장을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학교보다 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회르니에게 말하니 회르니는 다리를 지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레그는 계곡에 다리를 건설한다. 이 다리는 그 계곡의 마을을 문명세계에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다리였다.  

코르페에 학교를 지은 뒤에 그는 파키스탄 계곡에 수십개의 학교를 짓게 된다. 이것은 장 회르니가 유산으로 남긴 100만 달러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회르니는 그레그를 '중앙아시아협회' 대표로 임명하고, 협회를 통해서 학교짓는 사업을 하게 한다. 그 동안에 그는 산악인을 아버지로 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된다. 그 와중에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파키스탄 변경지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에 대한 공격의 거점이 된다. 운명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연결된 그는 아프칸에 대한 침략과 복수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순식간에 엄청난 후원금을 모은 그는 새롭게 아프카니스탄의 오지에 새로운 학교를 짓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에 학교를 짓는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그레그 모텐슨의 평생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필생의 사명을 찾아낸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그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장 회르니와 파키스탄의 하지 알리라는 두 현인의 도움으로 그레그 모텐슨의 삶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사람의 삶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는 보여준다.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레그가 하지 알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묻는다. 문맹이지만 그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하지 알리를 끌어안고 한 가지만 더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다음에는 그를 만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묻는다. 
"먼 훗날에 그 날이 오면 그 때는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 알리는 코르페 K2의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할 말을 진중히 골랐다.
"바람을 말을 듣게."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고지대에서 사는 어느 늙은이의 지혜는 현대도시의 최고 지식인 못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 지혜란 책속에, 혹은 학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하지 알리는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그레그 모텐슨이 지은 이 학교들이 히밀라야 오지에 지식의 단비를 퍼붓기도 하겠지만, 문명의 해악도 가져오지 않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정답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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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좀 설렁설렁 읽었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게 흠일 정도로 잘 넘어갔다. 유시민도 어쩌면 그렇게 쉽게 쓴 책인 것 같았다. 글이 논리적인 짜임새를 가진 책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소개한 대부분의 책과 글쓴이를 나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좀 긴장해서 읽었던 곳은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소개한 꼭지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책을 소개한 곳이었다. 내 느낌에도 유시민의 글발이 제일 살아있는 곳이 여기였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카나리나 블룸은 황색언론에 의해서 자기의 명예를 잃어버리고 거기에 분노해서 기자를 권총으로 죽여버린다. 우리의 전직대통령은 잃어버린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 차이점은 있지만 공통점은 있다. 정도를 잃어버린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검찰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에 인해서 명예를 잃었다는 점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미디어법이 현실화되면 대한민국의 언론환경은 지금보다 더 강자숭배, 시장친화, 경쟁찬양의 경향이 노골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시민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소개하는 까닭도 그 사실을 알리기위해서일 것 같다. 하인리히 뵐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다. 그런 작가도 당대 독일의 유력신문-거기도 일등신문이다-에게 좌파,빨갱이 딱지를 받고 괴로웠던 모양이다. 언론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 책속에서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좋은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책보다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달리 또 있겠는가?"  책은 기적같은 일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적인가? 지혜와 소통. 하인리히 뵐의 책에 이런 구절도 있단다. "폭력은 무지에서 발생한다.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과연 옳은 말씀이다. 우리를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벌컥 화를 내거나 폭력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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