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정치에 몸을 바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천성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48쪽) 
 
메리 스튜어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정치가인 자기의 본질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정열이라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순간 그녀의 삶은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적대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는 불행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세에서 승리자가 되었고, 대영제국의 기틀을 놓는 역사적인 위업도 달성했다.  글쓴이인 스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통틀어서 시종일관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의 성격과 성장과정, 사고방식, 통치행태 등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가 중세시대의 이상을 물려받은 낭만주의자이며, 골수 가톨릭인데 비해서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상공업시대의 현실을 현실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현실주의자이며, 개신교도이다. 이 둘의 대결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대결이며, 중세와 근대의 대결이면서, 가톨릭와 개신교의 대결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1542년 스코틀랜드왕인 제임스5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에 30세였던 아버지는  메리가 태어난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메리는 9개월 뒤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정치는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청소년기에는 프랑스의 앙리2세의 아들인 프랑스아2세와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프랑스 왕이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결국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의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며 문화적 오지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이 부닥치는 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여왕으로서 다수의 개신교귀족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한 사람의 여자라로서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사람을 끄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또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여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런 메리스튜어트의 삶에 닥친 위기는 바로 '사랑'때문에 온다. 두번째 결혼 때 그녀는 겨우 스물세살이었다. 남편은 스코틀랜드의 귀족 단리였다.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여자를 끄는 매력이 있었던 단리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단번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애초에 두번째 남편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대상은 강력한 왕권의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사랑 때문에 그녀는 귀족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리와 결혼을 통해서 메리 스튜어트는 아들 제임스6세-나중에 통합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제임스1세-를 낳게 된다. 문제는 단리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했다는 사실이다. 

단리는 나중에 메리의 왕권에 지나친 간섭을 일삼게 되고, 메리는 단리의 정치적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메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메리가 보스웰 백작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스웰 백작은 강력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보스웰이야말로 진짜 사내였다. 츠바이크의 표현을 옮겨본다. " 그동안은 오직 애송이 같은 남자들만 겪어보았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남자들이었다." 애송이 같은 남자들이란 병사한 첫번째 남편인 프랑수아2세와 두번째 남편 단리를 말한다. 두번째 남편 단리는 폭사당한다. 여기에 가장 혐의가 많은 사람은 보스웰 백작이었다. 온 나라에 보스웰 백작과 메리가 합작하여 단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번졌다. 그런데도 메리는 보스웰 백작을 가장 신임하고, 권력은 보스웰이 쥐고 군사독재를 실시하게 된다. 메리는 보스웰과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다. 결국 둘은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되고(그 사이 내막이 복잡하다), 귀족들은 '단리의 살해자 보스웰 처단'을 깃발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 메리여왕은 보스웰과 같이 귀족들에 대항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결국 보스웰은 망명하고, 메리 여왕은 어느 섬에 유폐된다. 귀족들은 메리의 한살짜리 아들인 제임스6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백작이 전권을 쥐게 된다. 메리는 1년 뒤에 탈출하여 반란세력 타도를 목표로 봉기하지만, 결국 귀족연합군에 패배하여 도망가게 된다.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여왕은 엘리자베스1세였다. 둘 사이에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둘 다 헨리7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메리는 명시적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1세는 한 때 아버지인 헨리8세에 의해 '사생아'라는 선언을 당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1세로서는 왕권에 대한 알레르기 비슷한 감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 망명했으니 늑대의 소굴을 피해서 범의 소굴로 뛰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스튜어트를 사실상 감금상태로 18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에 잡아둔다. 메리는 잉글랜드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사실상 잉글랜드 가톨릭의 희망 비슷한 존재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제거되면 바로 메리는 왕위계승권자로서 가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에 살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감금되어있던 동안에도 메리는 끊임없이 스페인과 프랑스, 로마의 가톨릭 세력에게 구원과 반란을 요청하는 원격정치를 해나간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1세와 월싱엄(일종의 경찰총수?)이 펴놓은 그물에 걸려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하고 만다. 이른바 '배빙턴 모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가톨릭반란 세력인 배빙턴에게 엘리자베스 암살을 종용하는 편지에 확답을 써 보냄을 보써 반란세력의 수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87년 2월에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엘리자베스1세의 사후에 잉글랜드는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1세)가 통치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의 통합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메리는 근세유럽에서는 왕으로서는 최초로 참수형을 받은 존재였다. 메리 이후에 메리의 손자인 찰스1세는 청교도혁명으로 역시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참수형을 받은 왕과 왕비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메리는 유명하기도 하고, 또한 골수 가톨릭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유명하기도 하다. 그녀는 엘리자베스1세와 대비되면서 다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엘리자베스1세는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고난 속에서 보낸 것에 비해서 메리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타고난 여왕이요 왕비라고 할 수 있겠다. 외모와 교양도 당대 유럽에서는 비길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치가로서 지녀야할 냉혹하고 계산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다. 두번째 남편인 단리의 죽음 전후에 그녀는 정치가로서 계산적이지 못한 행태를 드러낸다. 이것이 결국 그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기가 되고 만다. 이에 반해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총애했던 더들리백작의 부인이 사고사로 죽는 일이 벌어지자, 역시 유언비어에 휩쓸리게 된다. 이 때 엘리자베스는 정치가로서 판단력을 잃지않고 더들리를 과감하게 멀리하는 결정을 단행한다. 이런 점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경쟁자인 엘리자베스에게 모자랐고, 결국에는 엘리자베스의 포로가 되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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