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 순조실록 - 가문이 당파를 삼키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뜻밖에 순조의 치세는 길었다. 정조라는 임금의 역사적 중량이 너무 무거웠던 탓인지 나는 늘 순조를 얼마 못 가 죽은 임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 (1790-1834)는 정조가 죽은 1800년 7월 4일에 즉위해서 1834년11월 13일에 승하했다. 치세는 무려 34년이었다. 정순대비가 수렴청정한 초반 3년 6개월을 빼더라도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정조는 1776년에서 1800년까지 25년을 왕으로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서 더 오랜 세월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도 순조는 우리 뇌리에 남는 게 없는 임금이다. 왜일까? 박시백은 순조가 내세운 정치적인 비전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대를 돌파하는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조는 당대의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타협한 임금이었다. 덕분에 조선왕조는 그 위기를 더해가게 된다. 순조시대를 특징짓는 다른 인물은 정순대비, 김조순, 홍경래이다. 
 
정순대비는  순조의 즉위 초에 수렴청정을 3년 6개월 동안 하면서 신유박해를 통해서 남인을 도륙하고, 벽파독재정권을 수립한다. 드라마 같은 데서는 정조나 정약용 같은 영웅에 대항하는 반영웅으로 묘사된다. 박시백은 그런 시각이 좀 과장되었다고 지적한다. 수렴청정을 오래하지 않고 물러난 일이나, 시파인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을 그대로 지속시킨 점, 내노비와 시노비의 혁파를 지시한 정조의 정치적 유지를 그대로 계승해서 6만여명의 공노비를 해방시킨 점 등을 들어서 정순대비가 반동의 화신처럼 묘사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은 좀 더 공부가 필요한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 대비들의 수렴청정만 따로 다루어보는 책도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다. 정조는 김조순을 신뢰했던 모양이다. 죽기 몇 년 전에 순조에게 김조순은 왕을 잘 보필할 수 있는 인재라고 적극 추천했던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정조가 오히려 세도정치의 길을 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박시백은 김조순을 막후 김조순이라고 표현한다. 순조치세 30년의 막후실력자는 바로 김조순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조순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의 원조라고 지칭되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김조순은 그 자체로 보면 대단히 후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것은 그가 늘 겸양을 실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벼슬자리를 주면 그대로 받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늘 자신은 부족한 자이기 그 자리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는 면모를 보였다. 박시백은 이것을 김조순이 그 이전의 척신(외척출신 신하)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냉철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한다.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다른 실력자들과 연합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인 장수를 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치를 거의 손놓다시피 한 순조에게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영조나 정조처럼 신하를 다루는 영도력이 없었기에 순조년간에는 그렇게 세도정치가 기세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순조치세는 당파의 소멸과 왕가의 허약함 위에 한 가문의 위세가 꼭대기에 올라서고, 그것이 곧바로 백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순조 11년 말에 평안도 지방에서 홍경래의 반란이 일어났다. 6개월 정도를 끈 반란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반란의 지도자였던 홍경래는 평민출신이었다. 그를 따랐던 백성들도 평민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란의 원인이 된 것은 효율성을 잃어가는 조선의 통치체계였다. 더 이상 과거는 공정한 인재선발의 통로가 되지 못했고, 백성들은 각종 명목의 수탈에 짓눌렸다.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왕조의 힘도 없었다. 바야흐로 양반관료들에 의한 수탈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것이다. 홍경래의 반란은 조선왕조의 기반이 되는 백성들의 정신세계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홍경래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효과는 동학농민전쟁까지 이어진다. 이후 일어나는 많은 민란의 배경에는 홍경래라는 이름이 들어간다. 백성들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길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에 의한, 사대부를 위한,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 곧 양반은 나라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결코 국가에 의해서 수탈되는 법이 없었다. 죄를 지어도 얼마 안가서 사면되고 다시 양반행세를 한다. 양반은 모든 의무에서 열외다. 순조년간에는 이런 양반열외현상에 덕을 보기 위해서 양반을 돈으로 사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돈이 없어서 평민으로 머무는 자들은 지방수령으로 대표되는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수탈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도 안되면 도적이 되는 수밖에. 책에서는 '이여절의 나라'라는 장을 통해서 이것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여절은 정조 19년에 창원군수였고, 순조 22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라는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나온다. 중간에 그는 온갖 명목으로 백성을 수탈하지만 잠시 유배나 강등을 겪고 나면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다. 이 장을 보면서 현대의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법률과 조세체계는 조선시대에 양반을 우대했던 그 시절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역사는 과연 얼마만큼 전진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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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2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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