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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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윤동주는 겨우 27년 2개월 정도의 삶을 이승에서 살아내고 죽었다. 비참한 죽음이었다. 식민지의 지식청년으로서 가졌던 꿈과 포부가 일제의 복강형무소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윤동주는 죽지 않았다. 청년 윤동주는 시인으로 한민족의 정신세계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일제에게 받았던 억압을 통해서 훼손된 영혼을 윤동주의 시와 정결한 삶을 통해서 정화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 송우혜는 이 책을 통해서 윤동주의 삶을 한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가의 관점과 소설가의 시각이 잘 어울려 있다. 거기다가 송우혜는 윤동주와 삶과 죽음을 함께한 송몽규의 조카라는 개인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절절함이 글의 행간 속에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윤동주 시의 비밀을 여는 열쇠들을 얻게 된다. 윤동주의 '동시'가 왜 특정 시기에 집중해서 씌어진 것이며, 그의 시 '자화상'이 어떤 배경하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게 된다. 이 책은 윤동주의 시를 분석한 평론집으로도 손색이 없다.

 

윤동주는 짧은 생애지만 다른 시인과는 다른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는 한반도가 아닌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지사들의 고장인 명동촌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강한 민족주의 정서와 아울러 기독교적 순결함에 대한 의식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다. 거기서 맺은 인연들이 그에게 참 소중하게 작용한다. 대동아전쟁시기에는 일본에 유학갔다가 '조선독립운동'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게 된다. 30년도 안되는 짧은 삶, 아내는 커녕 공인된 애인도 없었던 그는 소년이나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만큼 윤동주는 순수한 그림으로 남아있다. 윤동주는 이 책의 표지로도 나온 연희전문 졸업사진의 그 고요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

 

윤동주와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슴아프게 남는다. 그의 친구 송몽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 후배인 정병욱, 연희전문 스승이면서 윤동주 시의 최초 해설자가 된 대시인 정지용. 이 가운데 정병욱만 남한에서 살아남아서 윤동주 시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재다능했던 친구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이 복강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윤동주가 죽은 얼마 뒤에 옥사한다. 강처중은 해방 이후 경항신문 기자로서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남조선노동당 간부였던 그는 한국전쟁중에 체포되었다가 북으로 넘어가게 된다. 시인 정지용 또한 전쟁중에 납북된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다들 문단에서 교유하면 한국어의 활동공간을 넓혔을 그들이다. 마치 비극적인 소설이나 영화같은 것이 그들의 삶이다. 생각하면 아까운 이들이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1930년 이후 군국주의 일본이 전쟁의 광기에 미쳐 돌아갈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었다. 그 영향은 우선 교육에서 노골적인 황민화 교육, 조선 전통의 말살로 나타났다. 그 시절에는 한국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이 때 윤동주는 조선어와 시, 문학이라는 영역을 자기 삶의 중추로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안간힘에 가까운 노력이 들어갔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시기에 한국어로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 윤동주라는 개인은 자신의 정체와 미래에 대한 고뇌를 한국어로 된 시로 나타냈다. 이것이 나중에 해방된 우리 민족에게 얼마만한 영혼의 정화를 경험하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윤동주는 타락한 민족을 위한 희생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비록 독립투쟁의 대열에 총을 들고 뛰어들지는 않았어도 문화의 영역에서 주체를 지키려고 한 시인의 고투는 어떤 시대에 올바로 산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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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하고 있는데 작은 꼬맹이가 옆에 와서 얼쩡거리다가 엄마 지갑을 발견했다. 손에 쥐는 것을 보고 내가 얼른 지갑을 낚아 채니 이렇게 말한다.
 "아빠. 돈 좀 줘."
 "돈?"
 "응."
지갑을 뒤져보니 동전주머니가 있다. 거기서 10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다보탑 부분이 나와있는데 깨끗해 보였다.
 "자, 여기 있다."
주면서도 혹시 '이거 싫어. 100원짜리 줘' 할까봐 내심 걱정을 했다. 그런데 돈을 받자 마자 하는 말이 재미있다.
 "와. 황금 돈."
 "그렇네. 황금색이네."
두 말 없이 받아서 간다.
  이제 태어난지 3년하고 4개월이다.  요즘 돈이 무엇인지 알게 된 눈치다. 할머니하고 자주 인근 슈퍼마켓에 가다보니 돈으로 물건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돈돈'하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다. 그래도 아직 돈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돈이 편리한 물건이란 것을 깨달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얼마전에는 할머니들 경로당에 놀러갔다가 용돈을 얻어온 모양이다. 늘 매고 다니는 가방에서 돈을 꺼내면서 "할머니들이 돈 줬다. 여기" 하면서 자랑을 한다. 천원짜리 종이돈이 세장이나 된다. 내가 얼른 받아 챙기면서 "이건 아빠가 가지고 있다가 누리 맛있는 거 사 줄게" 했다. 두말 없이 "응" 한다. "응" 하는 소리는 얼마나 귀여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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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어둠에 덮인 산골짝 다락논 옆을 지나는데
개구리 소리 천지에 가득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시간 속에 잠기어 목만 내놓은 채
개구리들이 이렇게 울어대는 건
막막함 때문이이리라
너도 혼자지 너도 무섭지 이렇게 서로에게 물으며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대답하는 소리 가득하다
어둠 속에서 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외로움을
이기려는 소리 너도 아직 살아있구나
너도 그렇게 견디고 있구나
그래 그래 서로 대답하며 울음의 긴 끈으로
서로를 묶어놓는 소리 밤새도록 가득하다
                                                                       <슬픔의 뿌리>

개구리 소리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시인이지. 참 재미있다. 이 시를 보니까 떠오르는 것이 이오덕의 <개구리 소리>와 권태응의 <맹꽁이>다.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친구들이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를 들어보아야 여름이 왔구나 하고 느끼는데. '그래 그래 그래 그래'가 인상적이다. '개굴 개굴 개굴 개굴'이겠지. 앞으로는 나도 이렇게 대답해봐야 겠다. "밥 먹었니"하면 "개굴"하고 말이다. 이 도시라는 정글 속에서 무서움을 이기고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런 청개구리짓도 필요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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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는 김치가 매워서 물에 씻어서 먹는다. 고추가루가 다 없어진 백김치를 참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할머니가 늘 집에서 아침이나 점심을 먹이는 까닭에 안 좋은 버릇이 하나 생겼다. 할머니는 김치를 손으로 찟는 것을 예사롭게 한다. 옛날 할머니들은 원래 손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누리가 이 버릇을 배웠다.

오늘도 저녁을 먹이는데 김치를 빨아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 주었다. 그것을 밥에 얹어 먹는데, 젓가락이 아니라 손을 쓴다. 아무래도 네살짜리 꼬맹이에게는 젓가락 사용이 어려운 법이지. 손을 뻗쳐서 김치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한마디 했다.
"김치를 그렇게 손으로 집어먹으면 안 돼지.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그 손으로 눈 만지거나 하면 눈이 아파서 울 거잖아. 그리고 냄새도 나고 말이야. 네가 할머니야 응?"
그랬더니 눈치를 슬슬 살핀다. 아빠 목소리가 제법 엄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무의식중에 한번 더 김치를 손으로 집으려는 것을 제지했다. 그랬더니 이제는 알겠다는 투로 젓가락을 사용한다. 그렇게 몇번을 먹었더니 씻어놓은 김치를 다 먹었다. 또 김치를 더 달라고 해서 새로 몇 가닥을 씼어서 작은 접시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데 김치에 손가락이 뻗치고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또 손으로 김치를 만지지."하고 좀 큰소리를 쳤다.
그 순간에 녀석이 얼마나 놀란 눈치던지. 잠시 몇 초를 꼼짝 안하고 얼어있더니 금새 "으아앙"하고 울어버린다. 황당했다. 울 거까지야 있나 싶은데, 딴에는 심각했던 모양이다.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진다. 갑자기 수도꼭지가 열린 듯 하다. 참 감수성도 좋다. 이렇게 쉽게 울다니 말이야. 부럽다. 아이들은 심각한 것은 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모양이다. 바로 이렇게 풀어야한다. 우는 품이 귀여워서 좀 보고 있다가 달랬다.
"아빠가 혼내니까 무서웠구나."하니 더 크게 운다.
눈물을 닦아 주고 나서
"아빠가 혼내니까 많이 무서웠구나"하니까 그제서야 "으응"한다.
"이제 아빠가 혼내지 않을께. 자, 김치먹자. 아 해봐"하면서 김치를 밥숟갈에 얹어서 떠 먹였다. 그랬더니 받아 먹는다. 그렇게 두번 정도 했다. 1분도 안 되어서 또 신나게 밥을 떠 먹는다.

나중에 내가 또 김치를 빨아서 가져왔다가 너무 큰 가닥이 있어서 자르다가 무심결에 손으로 반을 찢었다. 그랬더니 우리 작은 녀석이 하는 말에 내 가슴이 뜨끔했다.
"아빠. 김치를 손으로 먹으면 안 되잖아."
"으응? 그렇네. 아빠가 깜빡 실수했네. 우리 누리 말이 맞다. 김치를 손으로 먹으면 안 되는데 그렇지?"
"그래."
꼬맹이라고 얕보면 큰 코 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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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4-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가끔 어쩌다 날 잡아서 한번씩은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도 좋은데.........
아이가 김치먹는 법을 더 잘 아는군요..호호호~~~!고 녀석 귀여워라..

민달팽이 2006-04-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가만히 보고 있으면 30년은 더 나이먹은 나보다 더 고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좋은 날 잡아서 손으로 먹는 자유도 다 같이 만끽하는 기회를 만들어보아야겠습니다.
 
약산 김원봉 역사 인물 찾기 18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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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은 예로부터 선비와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떨친 이로는 유가의 김종직, 불가의 사명대사가 있다. 그 맥은 끊이지 않아서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시기와 전체주의 정권 시절에도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산 김원봉은 특출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불세출의 독립투사였지만 해방 이후에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낸 고위인사였기에 남쪽에서는 이름조차 입에 담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정지용을 빼놓고서는 시문학사를 논할 수 없듯이, 독립투쟁사에서 약산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반쪽도 못되는 역사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그래왔다.  

약산의 삶은 한편의 독립운동사 드라마이다.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뒤에 십대에 망국인이 되었고, 1919년에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제에 대항하여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과 투쟁은 치열했다.

1919년 11월 11일은 약산이 21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의백(단장)이 된 날이다. 이후 10여년 가까이 진행된 의열단의 각종 암살, 폭탄투척 같은 의열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조선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밀양경찰서 폭파, 부산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일본인 대장 암살 기도 등 수많은 사건목록이 보여주듯이 의열단의 투쟁은 그 차제가 무장독립투쟁사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약산은 1920년대의 빈 라덴이었다. 

약산은 의열투쟁에 머물지 않고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 꿈은 '조선 의용대'의 창설로 이어졌고, 나중에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부대로 맥을 이어갔다. 그들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견결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독립투쟁사의 마지막은 찬란할 수 있었다.

 약산은 해방 전 중국땅에서나 해방 후 조선땅에서나 좌우합작에 충실했다. 이미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한 '국공합작'의 진행을 보아왔던 약산이기에 독립투쟁의 좌우합작을 위해서 일관되게 노력했다. 그 결과 민족혁명당이라는 통합정당의 건설이 가능했고, 말년의 대한임시정부를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과 약산의 이 좌우통합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같은 좌우통합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관되게 좌파를 배척하는 입장에 섰던 이승만의 노선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약산이 해방 이후에 좌파운동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하는 등 친좌파적인 경향으로 흐른 것을 원래 약산은 좌파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약산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의 고위직을 거쳤기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취급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곡해라고 본다. 약산은 해방이전이나 이후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좌우통합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보고 일관되게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결국 해방정국에서 약산(48년월북)이나 몽양 여운형(47년암살), 백범 김구(49년암살), 우사 김규식(50년 납북)같은 통합론자들의 실패는 곧 해방이후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잉태한 씨앗이 되었다. 약산의 실패는 이승만이나 김일성 같은 일방주의자들의 성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약산의 최후는 숙청과 음독자살로 나온다. 지은이 이원규가 정확히 알고 쓴 것인지, 추측인지 모를 일이다. 관련 자료를 더 읽어보아야겠다.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약산의 처지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비김일성계들이 모두 숙청된 상황에서 그가 북쪽에서 건재하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약산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 약산은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창건하고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걸었던 통합론자로서 치열한 평생을 살았다. 약산은 분단과 반목을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는 우리 시대에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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