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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이야기
러셀 셔먼 지음, 김용주 옮김, 변화경 감수 / 이레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에 대해 별다른 서평은 필요없다. 일류 피아니스트가 일류 에세이스트일 수도 있음을, 그 황홀경은 책을 펼쳐 내키는 대로 골라 읽으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내가 내키는 대로 고른 문장들이다.
피아노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피아노를 마스터하려면 우주를 마스터해야 한다.(22-23쪽)
피아노의 아름다움은 변화무쌍한 유연성에 있다. 피아노는 뭐든지 할 수 있으며 뭐든지 될 수 있다. 불한당, 성자,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 물의 요정 옹딘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도 있고, 티티새, 벌새, 착암기, 어릿광대, 요부나 나폴레옹의 목소리도 흉내 낼 수 있다. 하지만 피아노의 중심음이 색깔의 어머니인 흰색이 아니라면 이런 목소리를 하나도 횽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순백색(또는 수수한 회색)만이 그런 도발적이고 난폭한 빛깔들을 감추고 억제할 수 있다. 소리가 너무 아름다우면 우리는 그 포로가 된다.(50-51쪽)
긴장은 불안에서 비롯되고, 불안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 음표가 확실하게 지시되어 있고 전체적인 체계가 질서정연할 경우에는 긴장의 제거가 아니라 긴장의 분배에 해답이 있다. 긴장은 음악의 칼이자 접착제이기 때문이다.(64-65쪽)
그(러셀 셔먼의 선생이었던 쇤베르크의 제자 에드워드 스토이어만)는 당대의 유명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은그의 커피 탁자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연주한 베토벤의 7아파시오나타> 음반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 뜯지 않은 것이었는데, 6주 뒤에도 여전히 그대로 탁자에 놓여 있었다. 누가 물었다. "왜 들어보지 않으셨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장난끼와 빈정거림이 섞인 그 특유의 말투로 이렇게 대꾸했다. "마음에 들까 봐."(116-117쪽)
언젠가 한 학생이 선생님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D단조>를 클리포드 커즌이 연주한 것이 좋은지 루돌프 제르킨이 연주한 것이 좋은지 물었을 때 선생님은 무뚝뚝하게 이렇게 대꾸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 음악을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데."(118쪽)
베토벤은 숭고하고 순수하며 장엄한 독일 이상주의의 황태자가 된다. 그러나 괴짜이자 과격파이며 모험가인 베토벤은 마약처럼 파괴적이며 중독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종의 치료로서의 도피주의에서 경건한 위안을 얻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133쪽)
(현대 스포츠의 환멸적 변화를 비난하고 난 뒤) 야구는 지명타자 규칙이 있긴 하지만, 기술과 전략, 행동과 생각이 이상적으로 조화된 스포츠로 남아 있다. 야구가 건재하는 한 이 나라(미국)는 구제될 수 있다. 핫도그의 기름기가 너무 많고 설익은 것이 탈이지만.(189쪽)
"당신의 편견을 고수해라. 편견은 당신의 유일한 취향이다 - 아나톨리 보로이어드(268쪽)
취향과 지식은 상상력을 연마하고, 상상력은 취향과 지식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하면 어떨까. 간단한 진리다(실천하기는 간단하지 않지만). 자유분망한 상상력이 분별없는 포괄성에 이를 수 있고, 지식은 갖춘 취향은 확실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상상력 없는 취향은 단순한 멋으로 전락한다. (272쪽)
냉혈한 베토벤. 그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지시를 한다. 열정은 농축된 결심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가르쳐준다. (323쪽)
왼손(반주로서의)은 청지요, 집사요, 시종이요, 가정교사요, 유모요, 완벽한 신사이다. 또한 외손은 배의 선장이요, 심판이요, 자선가이다. 오른손(멜로디로서의)은 저돌적이고, 변덕스럽고, 조울증적이고, 까다로우며, 자비의 천사다. 이 둘은 공존하며 때로는 사이좋게 지낸다. (341쪽)
멜로디는 여전히 여왕벌이다. 다른 목소리들은 열심히 여왕을 보좌함으로써 집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여왕의 건강과 안녕과 광채가 없으면 집단 전체 - 그리고 곡 -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349쪽)
내키지는 않지만 로큰롤에 대해 우호적인 말을 한마디 하자면, 그 음과 가사 속에 줄기찬 힘이 들어 있다. 평등한 기회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종과 종교의 사람들이 출발선에 소환된다. 하지만 메시지가 조악하게 만들어져서 내가 먼저라는 욕망과 집착의 케케묵은 유아독존론으로 타락해버렸다. 방종한 선동과 파괴는 명분 없는 반역이 된다. (3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