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스페이스
칼리 월리스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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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최근 한국인 최초로 정보라 작가의 '너의 유토피아'가 필립 K.딕 상 후보에 오르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뛰어난 SF 장편을 선정해 매년 수여하는 이 상은 세계 3대 SF 문학상인데, 이번에 읽은 칼리 월리스의 '데드 스페이스'는 필립 K.딕 상 수상작이다. 엄청난 상을 받은 만큼 소설의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평소 나는 책을 읽을 때 재즈나 팝을 주로 듣는 편인데, 이번에는 우주 과학 소설이라는 컨셉에 맞게 스포티파이에서 SF 영화의 OST를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들었다. 개인적으로 적절한 배경음악과 함께하니 헤스터의 여정에 더 몰입되어 좋았다. 추천!


  SF 소설은 세계관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와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빠져들기 때문이다. '데드 스페이스'는 축축하고 음울한 헤스터의 사이보그 팔다리에 얽힌 과거를 적절히 풀며 시작한다.


  마리사 마이어의 소설 '신더'의 주인공 신더가 생각나는 장면들이 많았다. 사람으로서가 아닌, 반짝이는 금속만 보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마다 헤스터의 내면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닳고 닳아버린 헤스터의 트라우마와 아픔이 독자에게도 전달되며, 강하지만 나약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한 사람처럼 다가왔다. 신체와 금속이 맞닿은 곳에서 생기는 고통과 낯섦을 생생히 묘사한 덕분에, 책을 읽으며 나도 몸 한구석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저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우주 기지를 영화처럼 그려냈다. 그저 줄줄 늘이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밀한 설명으로 헤스터의 눈으로 본 '히기에이아'와 '니무에'로 다가와 읽는 데에 어색함이 덜했다. 거기다가 계층별(화성인, 위에량 상류층 등) 말투, 소행성별 각기 다른 중력, 잘 수거된 떡밥(!) 등 사소한 디테일이 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런 요소는 SF 단편 소설보단 장편 소설에서 필요한데, 참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은 내게 좋으면서도 조금 힘들었다. 상세한 묘사와 낯선 이름으로 자꾸 소설 앞으로 돌아와 어떤 사람이었는지 표시하며 읽었다. 그런 면에서 단숨에 읽지 않고 조금씩 나눠 독서하는 사람에겐 읽기 힘들 수도 있다.



  헤스터가 사이보그가 된 원인이 '심포지엄 참사'라는 점에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도 최근 여러 참사를 겪으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구와 화성, 외행성 등지까지 인류가 살고 있고 여러 차례 전쟁을 겪은 냉혹한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에서는 추모는 커녕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인 헤스터와 데이비드는 치료비 등으로 파르테노페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며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마냥 낭만적인 사이보그 보안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이러한 불가항력의 사고가 끼치는 영향을 계속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헤스터의 모험에 마음이 붕 뜨다가도, 중력에 끌려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자본과 무력만이 사회의 주요 가치가 된 세계에서 사람의 목숨이란 얼마나 무가치하게 쓰이는지, 그렇게 희생된 사람의 인생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데 왜 그 생각을 하지 않는지. 그런 면에서 주된 스토리 전개는 스릴러·미스터리지만, 본질적으로 '데드 스페이스'는 디스토피아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데드 스페이스'에서 제일 재미있던 건 끝없는 반전이었다. 헤스터가 모르는 건 독자도 모르고, 헤스터가 오해한 건 우리도 오해한다. 그 과정에서 '뭐야?! 헤스터 너 틀렸었네!!?'라고 생각하며 혼란스럽지만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에 놀라기 바쁘다.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부터 읽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메리 핑이 정말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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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만드는 법 -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편집자의 모험 땅콩문고
이연실 지음 / 유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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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으로 에세이를 만든다는 건, 글을 쓰는 사람이 편집자이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현재 나는 편집자의 역할로서 1년 전의 내가 쓴 글을 요리조리 편집하는 중인데, 주변 지인에게 소정의 마음과 함께 피드백을 부탁하여 타인의 시선으로 본 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꽤나 충격적인 피드백을 받았고 에세이를 어떻게 잘 만들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리디 셀렉트의 에세이 카테고리를 35페이지까지 넘겨보며 좋은 책이 있을까 고민에 빠진 내게 '에세이 만드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한 건 천운이나 다름 없었다. 이 제목을 검색해볼 생각을 왜 안했을까? 지금이라도 마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여러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을 편집한 편집자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주저 없이 이북리더기에 다운로드했다.


에세이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대로, 경험한 만큼 쓰이는 글이 에세이다.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저자는 에세이를 한 사람의 경험을 담은 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에세이의 타깃 독자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전한다. 이 책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어떻게 에세이를 잘 만들어서 읽게끔 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것이 잘 드러난다.

이후로 제목, 띠지, 표지 등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길지 않은 분량이니 하루 몇 시간이면 다 읽는다.) 원고를 어떻게 고치는지 설명한다. 내게 제일 필요한 이야기였기에 하마터면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을 뻔했다. 나와 친구들이 함께 작업하고 있는 원고에는 글이 매끄럽고 재미있게 읽히도록 표현을 보태는 '윤문'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과거에 모 연예인·인플루언서의 에세이를 읽을 때 '아, 이 부분은 편집자의 터치가 들어갔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집자의 윤문이 조금 티가 났던 것이 아닐까.

책의 내용은 마케터와의 관계, 보도자료, 편집자로서의 태도, 작가들과의 일화 등이 이어진다. '에세이 만드는 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씨앗부터 열매를 맺는 과정을 소상히 보여준다. 책의 독자인 나는 '독립출판'을 목적으로 책을 읽었기에 대형 출판사처럼 띠지를 두르고 몇만, 몇천 부를 찍는 상황에 100퍼센트 몰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를 재밌게 풀어내서인지 내용 자체가 술술 읽혔다. 그리고 일을 향한 애정이 느껴져서 글을 읽는 내게도 그의 진지한 고민이 따라붙는 듯했다.

아무리 내가 쓴 글이어도 '편집자 모드'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는데, 이 책을 1회독하니 조금은 편집자처럼 내 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 책의 저자가 편집한 책을 몇 권 읽어보고, 국내외의 좋은 에세이를 많이 탐독하며 '에세이 공부'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평소 에세이에 회의적인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한번쯤은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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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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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독서모임의 마지막 책,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로 굉장히 오랜만에 이북리더기를 꺼내들었다. 최근 들어 독서가 뜸해졌는데 워낙 세상이 시끄럽다보니…….

어찌 됐든 간만에 읽는 책이 이렇게 촉촉한 에세이라서 좋았다. 만약 어려운 비문학이었다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특이하게 이 책은 시작부터 모계 가계도를 보여준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보았던 걸 에세이에서 보다니, 흥미로우면서도 외서 특성상 이름 외우기가 힘들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북리더기의 느린 반응에 답답해 죽기 전에 가계도를 대충 외우고 독서를 시작했다.

작가의 가족사와 작가가 관찰한 자연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조금 울컥하려하면 새와 풀이 등장해 나를 다시 달래주고 가족사를 보며 다시 촉촉하게 차오르는 걸 반복했다. 가까운 이와 영원히 작별한 적은 없지만, 내 주변에는 슬프게도 이미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어느정도 알기에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건 당연했다.


"글쎄다, 그럼 다음 번을 위해 달력에 표시해 두렴." 아버지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서커스는 2년 뒤에 다시 올 거야. 그때 난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에 갈 거다."

다음 번.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에게 다음 번은 없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고, 내가 그걸 안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커스에 가기로 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울진 않았지만.

가까운 가족이 최근 암을 앓았다. 늦지 않은 시기에 발견되어 빠르게 수술을 하고 재활하고, 건강을 어느정도 되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암으로 가정이 파탄나지 않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본인 부담금이 높은 암과 중증질환자,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 집안도 거리에 나앉을 만큼 어려워졌을 것이다. 혹은 '다음 번'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다행히 이번 고비에선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는데, 언젠간 찾아올 작별 인사를 최대한으로 미룬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지만 작가는 몇 챕터 후에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도 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나는 비통해하고 있어.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아직은 아니야.


여기서 난 눈물을 눈 안으로 집어 삼킬 수 있었다. 그래, 아직 아니니까 괜찮아.

이렇듯 작가는 '이 세상은 죽음을 토대로 번성한다.(54페이지)'라고 말하면서도, 그 당연한 죽음과 작별 인사를 절절한 아픔으로 소화하고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글을 썼더라면 눈물은 커녕 물음표만 나왔을 테지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당시 나는 목도리를 열심히 뜨면서 독서했는데, 작가가 묘사한 자연이 굉장히 생생하고 푸릇한 냄새가 나는 듯하여 미국 어느 볕 좋은 정원의 흔들의자 위에 있는 착각까지 들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풍경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가왔다. 하지만 번역의 한계인지 너무나 장황한 문단을 마주쳤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단점이라면 원어로 읽지 못하는 점이다.

독서모임 중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 역시 그려낸 듯한 묘사가 장점인데, 영미문화권에서 선호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어쩌면 영미문화권이 읽는 한강의 작품이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묘사가 길어서 읽기 힘들다며. (농담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최근 읽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도 소챕터의 마지막 문단이 인상 깊었는데, 이 에세이 역시 그러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치며 세상과 사회를 향해 뻗어가는 생각들을 보고 있으면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든다. 1년 간 에세이를 내려고 준비 중인데 이렇게 잘 쓴 글을 보면 주눅이 든다. 과연 내 글에 사유가 담겨있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도 좋은 글을 읽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글을 전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크기에 괜찮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작별 인사를 준비하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의 식탁 위엔 항상 죽음이 존재하지만 그걸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의 주변에 있는 작별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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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세트] 내 아버지의 아들을 찾아서 (총7권/완결)
안경원숭이 / CL프로덕션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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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핵심 키워드

#여주판타지 #엉뚱발랄녀 #남주찾기


1세대 정통 판타지 소설〈하얀 늑대들〉의 주인공 카셀은 기사가 된 건달이 좋아하던 여자와 함께 있게 되자 홧김에 전쟁에 병사로 지원하고, 온갖 모험을 거쳐 세계를 구원한다. 〈내 아버지의 아들을 찾아서〉의 제리코도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친부를 찾아갔고, 아버지의 아들도 찾고 용도 해치우며 성장한다.

작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같지만, 〈내 아버지의 아들을 찾아서〉는 안경원숭이 작가 특유의 재치 있는 서술과 발랄한 캐릭터성에 더불어 ‘남주 찾기’ 설정 덕분에 이 작품은 웃으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작가의 개그 코드와 맞지 않는다면 읽는 데 힘겨울 수 있으나, 이후 출간된 화제작 〈요한은 티테를 사랑한다〉를 먼저 읽고 구매를 결정지어도 좋을 것이다.

‘남주 찾기’는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사람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소재다. 독자들은 여자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남자들을 비교하며 ‘이 주식에 전부 투자하겠다’라며 자신이 응원하는 남주가 잘 되길 바란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아들을 찾아서〉는 쉽사리 남주 후보로 올리기 어려운데,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주 후보가 바로 여주의 이복오빠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자는 두근거리며 각 캐릭터와 제리코의 관계성을 유심히 살펴보고 응원한다. 이런 류는 작가가 정해둔 메인 남주의 분량이 훨씬 많은 경우가 많은데, 세 명의 분량과 비중이 비슷하여 자신이 응원하는 캐릭터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제리코를 둘러싼 따뜻한 관계성에 있다. 친딸이 아니지만 진심으로 대하는 계부 존과 아버지의 친구 같은 존재로 성심성의껏 챙겨주는 드슬이, 최종 남주로서 제리코를 힘껏 사랑하는 샌시까지 흔한 라이벌 구도 하나 없음에도 이야기가 탄탄하게 진행된다. 제리코의 모험과 성장을 따라가다 보면,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제리코의 미래를 바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러 웹소설 플랫폼 인기 검색어 부동의 1위인 ‘19세 완전판’처럼 자극적이고 농염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방면으로 사랑과 애정이 가득한 이야기로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든다. 깔깔 웃으며 읽다보면 7권은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제리코의 웃음은 에라프가 남기고 간 것 중 최고였다. 드래곤 슬레이어 소드는 그렇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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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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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이북리더기를 들고 나온 김에 다운로드 해둔 책들 중 하나를 읽기로 결심했다. 무얼 읽을까 고심하던 내 눈에 들어온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언젠간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하여 구매했는데, 정작 책도 안 읽고 모임날에도 안 나갔던 기억이 있어 표지만 봐도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래, 지금 읽어보자.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이북을 열었다.

제목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 책은 여행 에세이였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은 '시선으로부터,'만 읽어보고,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보다가 잠들어버렸다. 지금 확인해보니 '시선으로부터,'에 별점 5점을 주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의 나에게 큰 감동이 남아있질 않다. 그래서인가 이 책도 조금의 편견을 가지고 읽었다. 특히 나는 에세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깐깐한 기준을 가지고 보겠다는 이상한 고집을 장착한 채 이 에세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왠걸,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잠깐 보려고 했던 것이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는 순간까지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글이 어찌나 술술 읽히던지 눈 깜짝할 새에 정세랑의 글에 빠졌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가의 웃음 포인트에선 나도 같이 웃었다. 책의 첫 문단에서 ''작가의 말'이 재밌다는 말을 들어서 에세이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니'라는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평을 들었을지 추측이 되는 글이었다.

단순히 재미만 있었더라면 단숨에 빠져들 수 없었을 것이다. 몇몇 소챕터의 마지막 단락을 죽죽 밑줄 그어가며 읽었다. 작가의 사유를 여행과 연결지어 물 흐르듯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를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9.11 메모리얼파크를 이야기하며, 현재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가까이는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 더 거슬러 올라가선 삼풍백화점, 한국전쟁, 일제강점기 등... 우리는 과연 죽은 자를 모욕하지 않고 있는가 생각하며 숙연해졌다. 분명 나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있는데도, 과거의 정세랑과 현재의 내가 연결되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계속해서 언급된다. 여성의 안전을 걱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은 망가진 세상을 안타까워하고, 예술과 자본의 균형을 고민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여행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다채로운 풍경이 된다. 하나의 주제가 일단락이 될 때마다 색다르고 멋진 풍경과 더불어 현재 사회를 고민케하는 한두 마디가 마음에 남아 좋았다.

서평 워크숍의 강사님은 '독서란 책과 나 사이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이 책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간 끝에, 나는 앞으로 다녀올 무수한 여행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다짐했다. 물론 매 순간 눈앞의 풍경과 세상의 문제점을 연결 지을 순 없을 테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정세랑 작가의 다정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찾아보니 여행을 갈 수 없던 코로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그 시기에 읽었더라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책을 들여다보았을 듯하다. 그러나 코로나가 완화된 후, 해외 여행을 네 번이나 (많이도 갔다) 다녀온 입장에서 지난 시간이 조금 아깝다. 오히려 이 글을 읽지 않고 가서 그저 즐기기만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후로 떠나는 여행에선 오만가지 사유를 하다가 내 곁의 사람을 놓칠까 걱정이 되지만, 그마저도 새로운 사유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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