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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갓 신분증을 발급받은 사람에게 '아직 잉크도 안 말랐네'라는 말을 쓴다. 이 책 안에는 '아직 잉크도 안 마른 듯'한 싱싱한 소설들이 가득하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와 사람이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6인의 소설 중 가장 마음이 저릿한 이야기는 이지연의 '아이리시커피'였다.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의 악의 때문에 끔찍한 죽음으로 이어지고,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밤잠을 뒤척이고, 피해자의 가족과 그 아픔을 승화하는 결말까지 울적한 마음으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 곁에서 살고 있다. 여러 이유로 죽음을 목격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살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 그럴 때 기사 한 줄, 뉴스 한 컷보다 소설은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와 생생한 이야기를 펼친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교회에 떡을 돌리겠다는 희수 어머니의 입을 통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정까지 드러나며 훨씬 실감나고 공감된다.
이와 비슷하게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 전은서의 '경유지'도 인상적이었다. 연인이었던 상민의 시신 인계를 위해 떠난 뉴질랜드와 그의 종착지인 장례식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제각각이었"고, "어떤 것이 상민의 진짜 모습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서로를 경유하고 다른 곳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나'는 "그냥 그대로 그를 기억하기로" 하며 마무리한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경유지'가 된다. 서로의 삶에 거쳐 지나가며 자취를 남긴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심시선을 각기 다르게 기억하는 딸과 손녀처럼, 그 사람의 모습과 의미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중 진짜와 가짜를 가를 수 있는가.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서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의 조언을 언급하며 사랑과 죽음을 바라본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個人)'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分人)'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략)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전은서의 '경유지'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상민의 여러 분인과 마주한 '나'는 잠시 혼란스럽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각자의 삶을 거쳐 지나가며 잠시 쉬었다는 걸 알게 된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을까 하다가 살짝 고백해본다. 나는 지금껏 '지영'의 화자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변명의 소지가 있는데 바로 앞선 김혜수의 '여름방학'에서 은진과 세희의 묘한 관계에 집중하기도 했고, 요즘 한국소설에서 우정과 사랑 그 어딘가를 표현하는 GL 요소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더욱 독자인 내가 여성이기도 하고...
그런데 서평을 쓰려고 다시 훑어보다 '이성적인 호감'이라는 단어에서 흐름이 탁 멈췄다. "이 둘이 이성이었어?"라는 생각과 함께 이 소설의 감상이 180도 바뀌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날 속인 적이 없지만, 나 혼자 속은 것이다. 아 황당해...
아무튼, 이서희의 '지영'은 호감보다 앞선 신념의 차이로 만날 수 없는 관계라고 읽었다. 불교 신자인 내게 구원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랫말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 서사'일 뿐이지 큰 의미도, 깊은 울림도 없다. 불교에서 구원은 믿는다고 저절로 뿅 되는 게 아닌 내가 나의 업을 지우고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구원5'은 두 가지 의미이다.
「1」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2」 『기독교』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
지영은 '나'에게 선택받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에 공감할 수 없던 '나'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 통보한다. 그러나 지영 덕분에 구원을 생각하게 된 '나'는 지영의 행복을 빈다. 지영은 현실에서 종교집단에게 '구원5' 1번을 몸소 느꼈다. 어려움에 빠진 자신이 구해진 후, 사랑하게 된 '나'를 꿈으로 향하는 힘든 여정에서 구하고 싶었던 걸까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지만 지영과 '나' 모두 진심으로 서로를 대했다는 건 느껴졌다.
서로를 아끼고 애정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신념으로 갈라선 '위키드' 속 엘파바와 글린다처럼 "어떤 마음이 완전히 녹아버릴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생각"하는 건,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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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축구를 좋아하는 애인에게 이 단어가 무엇인지 물어가며 읽은 양현모의 '호날두의 눈물'
K-장녀라면 느낄 수 밖에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드러난 김혜수의 '여름방학'
읽는 내게 주인공의 지긋지긋함과 수치심 등의 감정이 그대로 와 닿은 김현민의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까지 각각의 매력이 넘치는 소설을 읽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책을 읽을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소설을 쓰는 꿈은 많은 사람이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불특정다수가 보는 게시판에 올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게 중에서도 유형의 책으로 작품을 내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렇기에 《셋셋 2025》는 신인 작가 6인의 귀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지금 여기, 가장 빠르게 도착한 내일의 문학들'이라는 카피라이트에 어울리는 작품을 읽게 되어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하니포터 10기로서 한겨레출판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