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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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신분증을 발급받은 사람에게 '아직 잉크도 안 말랐네'라는 말을 쓴다. 이 책 안에는 '아직 잉크도 안 마른 듯'한 싱싱한 소설들이 가득하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와 사람이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6인의 소설 중 가장 마음이 저릿한 이야기는 이지연의 '아이리시커피'였다. 평범한 하루가 누군가의 악의 때문에 끔찍한 죽음으로 이어지고,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밤잠을 뒤척이고, 피해자의 가족과 그 아픔을 승화하는 결말까지 울적한 마음으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 곁에서 살고 있다. 여러 이유로 죽음을 목격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살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있다. 그럴 때 기사 한 줄, 뉴스 한 컷보다 소설은 우리에게 더 가깝게 다가와 생생한 이야기를 펼친다. 소설은 안타까운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교회에 떡을 돌리겠다는 희수 어머니의 입을 통해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정까지 드러나며 훨씬 실감나고 공감된다.


  이와 비슷하게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 전은서의 '경유지'도 인상적이었다. 연인이었던 상민의 시신 인계를 위해 떠난 뉴질랜드와 그의 종착지인 장례식까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제각각이었"고, "어떤 것이 상민의 진짜 모습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서로를 경유하고 다른 곳으로 나아갔다 하더라도" '나'는 "그냥 그대로 그를 기억하기로" 하며 마무리한다.

  꼭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경유지'가 된다. 서로의 삶에 거쳐 지나가며 자취를 남긴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심시선을 각기 다르게 기억하는 딸과 손녀처럼, 그 사람의 모습과 의미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중 진짜와 가짜를 가를 수 있는가.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서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의 조언을 언급하며 사랑과 죽음을 바라본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個人)'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分人)'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략)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전은서의 '경유지'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상민의 여러 분인과 마주한 '나'는 잠시 혼란스럽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각자의 삶을 거쳐 지나가며 잠시 쉬었다는 걸 알게 된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을까 하다가 살짝 고백해본다. 나는 지금껏 '지영'의 화자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변명의 소지가 있는데 바로 앞선 김혜수의 '여름방학'에서 은진과 세희의 묘한 관계에 집중하기도 했고, 요즘 한국소설에서 우정과 사랑 그 어딘가를 표현하는 GL 요소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더욱 독자인 내가 여성이기도 하고...

  그런데 서평을 쓰려고 다시 훑어보다 '이성적인 호감'이라는 단어에서 흐름이 탁 멈췄다. "이 둘이 이성이었어?"라는 생각과 함께 이 소설의 감상이 180도 바뀌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날 속인 적이 없지만, 나 혼자 속은 것이다. 아 황당해...


  아무튼, 이서희의 '지영'은 호감보다 앞선 신념의 차이로 만날 수 없는 관계라고 읽었다. 불교 신자인 내게 구원은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랫말에 자주 등장하는 '구원 서사'일 뿐이지 큰 의미도, 깊은 울림도 없다. 불교에서 구원은 믿는다고 저절로 뿅 되는 게 아닌 내가 나의 업을 지우고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구원5'은 두 가지 의미이다.

「1」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2」 『기독교』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는 일.

  지영은 '나'에게 선택받지 못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에 공감할 수 없던 '나'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 통보한다. 그러나 지영 덕분에 구원을 생각하게 된 '나'는 지영의 행복을 빈다. 지영은 현실에서 종교집단에게 '구원5' 1번을 몸소 느꼈다. 어려움에 빠진 자신이 구해진 후, 사랑하게 된 '나'를 꿈으로 향하는 힘든 여정에서 구하고 싶었던 걸까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고 싶었던 걸까. 잘 모르겠지만 지영과 '나' 모두 진심으로 서로를 대했다는 건 느껴졌다.

  서로를 아끼고 애정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신념으로 갈라선 '위키드' 속 엘파바와 글린다처럼 "어떤 마음이 완전히 녹아버릴 때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생각"하는 건,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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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도 축구를 좋아하는 애인에게 이 단어가 무엇인지 물어가며 읽은 양현모의 '호날두의 눈물'

  K-장녀라면 느낄 수 밖에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드러난 김혜수의 '여름방학'

  읽는 내게 주인공의 지긋지긋함과 수치심 등의 감정이 그대로 와 닿은 김현민의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까지 각각의 매력이 넘치는 소설을 읽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책을 읽을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소설을 쓰는 꿈은 많은 사람이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불특정다수가 보는 게시판에 올리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게 중에서도 유형의 책으로 작품을 내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렇기에 《셋셋 2025》는 신인 작가 6인의 귀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지금 여기, 가장 빠르게 도착한 내일의 문학들'이라는 카피라이트에 어울리는 작품을 읽게 되어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


[하니포터 10기로서 한겨레출판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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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수록 선명해진다 - 내 안의 답을 찾아 종이 위로 꺼내는 탐험하는 글쓰기의 힘
앨리슨 존스 지음, 진정성 옮김 / 프런트페이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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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런트페이지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급하게 휘갈겨쓴 메모나 예산 확보를 위한 기획안, 회사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 블로그나 다이어리에 쓰는 일기까지 모두 같은 글이다.
  그러나 효과적인 글쓰기를 위한 '준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쓸수록 선명해진다'에서는 머릿속의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탐험쓰기'의 목적과 목표, 방법, 효과를 알려주고 있다.

 고등학생 때 나는 대입을 위한 자소서를 써야 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려니 나오지 않아, 무작정 타이핑을 하며 글의 소재를 찾아나갔다.


스스로가 다 성장해서 사리판단을 옳게 할 수 없기도 했고... 확실히 자만감은 무서운 놈입니다 사람을 개로 만들어요


 이런 말도 안되는 내용이 자소서의 초안이었다. 휘갈긴 글 안에서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고, 나만의 이야기를 발견해서 자기소개서로 잘 다듬었다. 그 덕분에 목표하던 대학에 진학하였다.
  마구 쓴 글을 통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경험이 있다보니, '초안은 무조건 아무렇게나 갈겨쓰자!'라는 생각이 내게 깊게 있었다. 이 책에서 체계적인 방법과 자유로운 탐험가의 마음가짐으로 '탐험쓰기'를 해야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지금껏 썼던 초안이 탐험쓰기의 전 단계인 '자유쓰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서와 동시에 출판사에서 마련한 '열흘 간의 탐험쓰기 챌린지'에 참여하며 탐험쓰기의 순기능을 제대로 맛보고 있다. 우선 책에서 제안하는 탐험쓰기의 마인드나 여러 방법(비유, 시각적 자료 등)을 생각하며 탐험쓰기를 진행할 수 있다.

호기심을 갖고 탐험쓰기 중인가?
지금 드는 생각에 적절하게 비유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도표나 화살표 등을 사용해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낙서처럼 쓰는 게 아닌 머릿속의 생각을 종이 위로 옮긴다는 마음가짐으로 탐험쓰기에 돌입하니 효과적이었다.


 탐험쓰기를 진행하며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바로 침프(chimp)를 관리한 것이다.


  침프란 감정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비교적 원시적인 변연계 부위이자, 반응적이고 욕심 많으며 게으르다.(책 38쪽) 10장에서는 침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부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이 탐험쓰기의 순기능 중 하나이다.

  '만일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면 나는...'이라는 첫마디로 시작한 탐험쓰기에서 나는 과거의 게으른 모습,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점,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은 것 등 여러 가지를 후회했다. 그런 후회의 마음을 쏟아내자 내면의 변호사가 등장해 '그렇지만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배운 것이 이만큼이나 있습니다!'라며 자기 토론의 시간으로 변했다.



탐험쓰기는 내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고 시험해 볼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준다.(책 75쪽)

부정적인 생각 이면의 긍정적인 생각도 끌어올 수 있으며, 여러 의견과 가정을 내놓아도 누구도 뭐라하지 않는다. '쓸수록 선명해진다'는 나의 미래와 삶을 바꾸는 해결책이 내 안에 있고, 자신은 그걸 찾아내게끔 하는 길라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진면목을 깨닫기 위해선 직접 탐험쓰기를 해보아야 한다. 6분은 내 생각을 손으로, 펜으로, 종이 위로 풀어내기 적당한 시간이다. 자신과의 소통,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탐험쓰기를 시작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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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스페이스
칼리 월리스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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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에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한 서평을 작성하였습니다




  최근 한국인 최초로 정보라 작가의 '너의 유토피아'가 필립 K.딕 상 후보에 오르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뛰어난 SF 장편을 선정해 매년 수여하는 이 상은 세계 3대 SF 문학상인데, 이번에 읽은 칼리 월리스의 '데드 스페이스'는 필립 K.딕 상 수상작이다. 엄청난 상을 받은 만큼 소설의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평소 나는 책을 읽을 때 재즈나 팝을 주로 듣는 편인데, 이번에는 우주 과학 소설이라는 컨셉에 맞게 스포티파이에서 SF 영화의 OST를 모아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들었다. 개인적으로 적절한 배경음악과 함께하니 헤스터의 여정에 더 몰입되어 좋았다. 추천!


  SF 소설은 세계관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우리와 동떨어져있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빠져들기 때문이다. '데드 스페이스'는 축축하고 음울한 헤스터의 사이보그 팔다리에 얽힌 과거를 적절히 풀며 시작한다.


  마리사 마이어의 소설 '신더'의 주인공 신더가 생각나는 장면들이 많았다. 사람으로서가 아닌, 반짝이는 금속만 보는 사람들이 등장할 때마다 헤스터의 내면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닳고 닳아버린 헤스터의 트라우마와 아픔이 독자에게도 전달되며, 강하지만 나약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한 사람처럼 다가왔다. 신체와 금속이 맞닿은 곳에서 생기는 고통과 낯섦을 생생히 묘사한 덕분에, 책을 읽으며 나도 몸 한구석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저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우주 기지를 영화처럼 그려냈다. 그저 줄줄 늘이는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밀한 설명으로 헤스터의 눈으로 본 '히기에이아'와 '니무에'로 다가와 읽는 데에 어색함이 덜했다. 거기다가 계층별(화성인, 위에량 상류층 등) 말투, 소행성별 각기 다른 중력, 잘 수거된 떡밥(!) 등 사소한 디테일이 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런 요소는 SF 단편 소설보단 장편 소설에서 필요한데, 참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은 내게 좋으면서도 조금 힘들었다. 상세한 묘사와 낯선 이름으로 자꾸 소설 앞으로 돌아와 어떤 사람이었는지 표시하며 읽었다. 그런 면에서 단숨에 읽지 않고 조금씩 나눠 독서하는 사람에겐 읽기 힘들 수도 있다.



  헤스터가 사이보그가 된 원인이 '심포지엄 참사'라는 점에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도 최근 여러 참사를 겪으며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구와 화성, 외행성 등지까지 인류가 살고 있고 여러 차례 전쟁을 겪은 냉혹한 '데드 스페이스'의 세계에서는 추모는 커녕 가해자에게 합당한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피해자인 헤스터와 데이비드는 치료비 등으로 파르테노페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며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한다.


  이 소설에서는 마냥 낭만적인 사이보그 보안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이러한 불가항력의 사고가 끼치는 영향을 계속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헤스터의 모험에 마음이 붕 뜨다가도, 중력에 끌려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자본과 무력만이 사회의 주요 가치가 된 세계에서 사람의 목숨이란 얼마나 무가치하게 쓰이는지, 그렇게 희생된 사람의 인생은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데 왜 그 생각을 하지 않는지. 그런 면에서 주된 스토리 전개는 스릴러·미스터리지만, 본질적으로 '데드 스페이스'는 디스토피아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데드 스페이스'에서 제일 재미있던 건 끝없는 반전이었다. 헤스터가 모르는 건 독자도 모르고, 헤스터가 오해한 건 우리도 오해한다. 그 과정에서 '뭐야?! 헤스터 너 틀렸었네!!?'라고 생각하며 혼란스럽지만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에 놀라기 바쁘다.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부터 읽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메리 핑이 정말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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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만드는 법 - 더 많은 독자를 상상하는 편집자의 모험 땅콩문고
이연실 지음 / 유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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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으로 에세이를 만든다는 건, 글을 쓰는 사람이 편집자이자 디자이너, 마케터 등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현재 나는 편집자의 역할로서 1년 전의 내가 쓴 글을 요리조리 편집하는 중인데, 주변 지인에게 소정의 마음과 함께 피드백을 부탁하여 타인의 시선으로 본 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꽤나 충격적인 피드백을 받았고 에세이를 어떻게 잘 만들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리디 셀렉트의 에세이 카테고리를 35페이지까지 넘겨보며 좋은 책이 있을까 고민에 빠진 내게 '에세이 만드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한 건 천운이나 다름 없었다. 이 제목을 검색해볼 생각을 왜 안했을까? 지금이라도 마주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여러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을 편집한 편집자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주저 없이 이북리더기에 다운로드했다.


에세이는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대로, 경험한 만큼 쓰이는 글이 에세이다.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저자는 에세이를 한 사람의 경험을 담은 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에세이의 타깃 독자는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을 전한다. 이 책에서는 대중을 상대로 어떻게 에세이를 잘 만들어서 읽게끔 할 것인지 고민하고, 그것이 잘 드러난다.

이후로 제목, 띠지, 표지 등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길지 않은 분량이니 하루 몇 시간이면 다 읽는다.) 원고를 어떻게 고치는지 설명한다. 내게 제일 필요한 이야기였기에 하마터면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을 뻔했다. 나와 친구들이 함께 작업하고 있는 원고에는 글이 매끄럽고 재미있게 읽히도록 표현을 보태는 '윤문'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이야기지만, 과거에 모 연예인·인플루언서의 에세이를 읽을 때 '아, 이 부분은 편집자의 터치가 들어갔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집자의 윤문이 조금 티가 났던 것이 아닐까.

책의 내용은 마케터와의 관계, 보도자료, 편집자로서의 태도, 작가들과의 일화 등이 이어진다. '에세이 만드는 법'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씨앗부터 열매를 맺는 과정을 소상히 보여준다. 책의 독자인 나는 '독립출판'을 목적으로 책을 읽었기에 대형 출판사처럼 띠지를 두르고 몇만, 몇천 부를 찍는 상황에 100퍼센트 몰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례를 재밌게 풀어내서인지 내용 자체가 술술 읽혔다. 그리고 일을 향한 애정이 느껴져서 글을 읽는 내게도 그의 진지한 고민이 따라붙는 듯했다.

아무리 내가 쓴 글이어도 '편집자 모드'로 전환하는 건 쉽지 않는데, 이 책을 1회독하니 조금은 편집자처럼 내 글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싶어졌다. 이 책의 저자가 편집한 책을 몇 권 읽어보고, 국내외의 좋은 에세이를 많이 탐독하며 '에세이 공부'를 하겠노라 다짐했다.

평소 에세이에 회의적인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니, 한번쯤은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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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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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독서모임의 마지막 책,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로 굉장히 오랜만에 이북리더기를 꺼내들었다. 최근 들어 독서가 뜸해졌는데 워낙 세상이 시끄럽다보니…….

어찌 됐든 간만에 읽는 책이 이렇게 촉촉한 에세이라서 좋았다. 만약 어려운 비문학이었다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특이하게 이 책은 시작부터 모계 가계도를 보여준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보았던 걸 에세이에서 보다니, 흥미로우면서도 외서 특성상 이름 외우기가 힘들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북리더기의 느린 반응에 답답해 죽기 전에 가계도를 대충 외우고 독서를 시작했다.

작가의 가족사와 작가가 관찰한 자연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조금 울컥하려하면 새와 풀이 등장해 나를 다시 달래주고 가족사를 보며 다시 촉촉하게 차오르는 걸 반복했다. 가까운 이와 영원히 작별한 적은 없지만, 내 주변에는 슬프게도 이미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어느정도 알기에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건 당연했다.


"글쎄다, 그럼 다음 번을 위해 달력에 표시해 두렴." 아버지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서커스는 2년 뒤에 다시 올 거야. 그때 난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에 갈 거다."

다음 번.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에게 다음 번은 없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고, 내가 그걸 안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커스에 가기로 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울진 않았지만.

가까운 가족이 최근 암을 앓았다. 늦지 않은 시기에 발견되어 빠르게 수술을 하고 재활하고, 건강을 어느정도 되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암으로 가정이 파탄나지 않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본인 부담금이 높은 암과 중증질환자,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 집안도 거리에 나앉을 만큼 어려워졌을 것이다. 혹은 '다음 번'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다행히 이번 고비에선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는데, 언젠간 찾아올 작별 인사를 최대한으로 미룬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지만 작가는 몇 챕터 후에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도 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나는 비통해하고 있어.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아직은 아니야.


여기서 난 눈물을 눈 안으로 집어 삼킬 수 있었다. 그래, 아직 아니니까 괜찮아.

이렇듯 작가는 '이 세상은 죽음을 토대로 번성한다.(54페이지)'라고 말하면서도, 그 당연한 죽음과 작별 인사를 절절한 아픔으로 소화하고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글을 썼더라면 눈물은 커녕 물음표만 나왔을 테지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당시 나는 목도리를 열심히 뜨면서 독서했는데, 작가가 묘사한 자연이 굉장히 생생하고 푸릇한 냄새가 나는 듯하여 미국 어느 볕 좋은 정원의 흔들의자 위에 있는 착각까지 들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풍경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가왔다. 하지만 번역의 한계인지 너무나 장황한 문단을 마주쳤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단점이라면 원어로 읽지 못하는 점이다.

독서모임 중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 역시 그려낸 듯한 묘사가 장점인데, 영미문화권에서 선호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어쩌면 영미문화권이 읽는 한강의 작품이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묘사가 길어서 읽기 힘들다며. (농담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최근 읽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도 소챕터의 마지막 문단이 인상 깊었는데, 이 에세이 역시 그러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치며 세상과 사회를 향해 뻗어가는 생각들을 보고 있으면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든다. 1년 간 에세이를 내려고 준비 중인데 이렇게 잘 쓴 글을 보면 주눅이 든다. 과연 내 글에 사유가 담겨있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도 좋은 글을 읽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글을 전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크기에 괜찮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작별 인사를 준비하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의 식탁 위엔 항상 죽음이 존재하지만 그걸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의 주변에 있는 작별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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