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거릿 렌클 지음, 최정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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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독서모임의 마지막 책, '우리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로 굉장히 오랜만에 이북리더기를 꺼내들었다. 최근 들어 독서가 뜸해졌는데 워낙 세상이 시끄럽다보니…….

어찌 됐든 간만에 읽는 책이 이렇게 촉촉한 에세이라서 좋았다. 만약 어려운 비문학이었다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을 것이 뻔하다.

특이하게 이 책은 시작부터 모계 가계도를 보여준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보았던 걸 에세이에서 보다니, 흥미로우면서도 외서 특성상 이름 외우기가 힘들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이북리더기의 느린 반응에 답답해 죽기 전에 가계도를 대충 외우고 독서를 시작했다.

작가의 가족사와 작가가 관찰한 자연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조금 울컥하려하면 새와 풀이 등장해 나를 다시 달래주고 가족사를 보며 다시 촉촉하게 차오르는 걸 반복했다. 가까운 이와 영원히 작별한 적은 없지만, 내 주변에는 슬프게도 이미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어느정도 알기에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는 건 당연했다.


"글쎄다, 그럼 다음 번을 위해 달력에 표시해 두렴." 아버지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서커스는 2년 뒤에 다시 올 거야. 그때 난 아이들을 데리고 거기에 갈 거다."

다음 번.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에게 다음 번은 없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고, 내가 그걸 안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커스에 가기로 했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울진 않았지만.

가까운 가족이 최근 암을 앓았다. 늦지 않은 시기에 발견되어 빠르게 수술을 하고 재활하고, 건강을 어느정도 되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암으로 가정이 파탄나지 않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본인 부담금이 높은 암과 중증질환자, 희귀난치성 질환자의 본인 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우리 집안도 거리에 나앉을 만큼 어려워졌을 것이다. 혹은 '다음 번'을 기약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다행히 이번 고비에선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는데, 언젠간 찾아올 작별 인사를 최대한으로 미룬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지만 작가는 몇 챕터 후에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남긴다.


나는 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도 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나는 비통해하고 있어. 나는 죽어 가고 있지 않아. 아직은 아니야.


여기서 난 눈물을 눈 안으로 집어 삼킬 수 있었다. 그래, 아직 아니니까 괜찮아.

이렇듯 작가는 '이 세상은 죽음을 토대로 번성한다.(54페이지)'라고 말하면서도, 그 당연한 죽음과 작별 인사를 절절한 아픔으로 소화하고 있다. 만약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글을 썼더라면 눈물은 커녕 물음표만 나왔을 테지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당시 나는 목도리를 열심히 뜨면서 독서했는데, 작가가 묘사한 자연이 굉장히 생생하고 푸릇한 냄새가 나는 듯하여 미국 어느 볕 좋은 정원의 흔들의자 위에 있는 착각까지 들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풍경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가왔다. 하지만 번역의 한계인지 너무나 장황한 문단을 마주쳤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단점이라면 원어로 읽지 못하는 점이다.

독서모임 중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 역시 그려낸 듯한 묘사가 장점인데, 영미문화권에서 선호하는 이유가 이런 데에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어쩌면 영미문화권이 읽는 한강의 작품이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 묘사가 길어서 읽기 힘들다며. (농담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최근 읽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도 소챕터의 마지막 문단이 인상 깊었는데, 이 에세이 역시 그러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치며 세상과 사회를 향해 뻗어가는 생각들을 보고 있으면 놀라움과 기쁨이 동시에 든다. 1년 간 에세이를 내려고 준비 중인데 이렇게 잘 쓴 글을 보면 주눅이 든다. 과연 내 글에 사유가 담겨있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도 좋은 글을 읽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글을 전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크기에 괜찮다.

무엇보다 이 책은 작별 인사를 준비하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우리의 식탁 위엔 항상 죽음이 존재하지만 그걸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의 주변에 있는 작별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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