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크럼의 아메리카 미친 세계와 그 적들 1
로버트 크럼 지음, 김제민 옮김, 김수박 글씨쓴이 / 새만화책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67년부터 95년까지의 작업들 중 미국에 대한 것을 골라서 수록한 크럼의 노골적인 구토물인 [아메리카]에 실린 이야기들 중 1970년대에 만들어진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현대 미국에 대한 비판이 2000년대인 오늘날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은 보는 이를 흥미롭게 만든다. 미국인들의 과소비 성향, 환경오염 문제, 비대해진 매스미디어와 생각 없는 군중, 나태와 폭력성, 인종차별과 배금주의 등등은 30여년이 지난 2005년의 미국이 겪고 있는 문제들과 일맥상통한다. 변한 게 없다.

크럼의 만화는 비틀려진 미국과 그 안의 인간성들에 대한 노골적인 환부절개를 그림에서부터 필설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보여준다. 왜소한 중년들, 과장된 세미드레스의 청년들, 멍청한 마초들, 지나치게 비대하거나 거대한 여자들과 [재즈싱어] 포스터를 옮겨온 것 같은 희화화된 아프로 아메리칸들, 머릿 속에 돈 생각만 하는 유태인 등등. 이것은 그의 직설적인 화법과 결부되어 노골적인 캐리커쳐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분명 이런 접근법을 섬세하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비록 세련되진 못하더라도 그의 만화의 목소리는 작가가 위치한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토를 이용하여 소위 풍자적 '이죽거리기'의 기법이 자극적으로 발현된 근간의 성과들의 원류가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불안과 혐오, 적대감은 과장법을 통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또한 그 망상 자체로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그의 만화의 시의성은 그가 보여준 정치적 의도성과 표현상의 방법론에서도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으며 크럼의 개성적인 작화로 빚어진 복잡미묘한 캐릭터들(을 이루는 선들)과 묘사로 인해 묵직한 방점을 찍어놓는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크럼만의 독특한 작화는 천박하고 지저분하며 자신이 경멸하는 요소들을 입자단위로 확장시킨 결과물이다. 혐오감을 미학적인 경지로 끌어올린 성과인('카프카적'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의 만화 속 인물들은 멍청하다고 표현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거나 절망밖에 안 보이는 내일을 안고 불안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군상들뿐이다. 모순이 생활화 되어 있으며 그 사실에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하는 현대 미국의 인간들은 그의 눈엔 일종의 미치광이들이다. 물론 여자의 무릎 장딴지에 환장을 하는 크럼이란 작가도 그에 못지 않은 미치광이라, 그의 만화는 미치광이가 미치광이들을 욕하는, 스스로도 모순의 굴레에 잡혀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자기비하적 잔인함의 경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간 히피문화의 상징으로 대접받아왔으며 실상 그자신도 60년대의 히피붐과 함께 올라 온 작가인 줄로만 알려져 있던 크럼은 이 작품에서 그 '히피'들도 여지 없이 '까'버린다. 사실 사회주의자에서부터 액티비스트, 기업가와 자유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측면에서 그의 비판대상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거의 없는데 이것은 그의 정치적좌표가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그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죽이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 부분이다)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해보자면 그에게 있어선 소위 정치적 의지라는 것 자체가 불순한 것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대안은? 크럼은 스스로 오들오들 떠는데도 바쁜 사람일지 모른다. 그의 정치적 희망은 인간의 자발적인 공동체 수립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꿈에 가까운지는 그의 만화들이 줄기차게 보여주는 폭력적 절망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마치 자신의 우툴두툴한 그림처럼 타고난 원죄를 씻어내려고 계속해서 떨고 있는 그에게(그래서 계속 죄를 짓게 되는) '그럼 넌 어쩔 건데?' 라고 묻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잔인한 일일 수도 있다. 커트 보네것이 그를 좋아하는 게 이상할 거 하나 없다.

 

- 일전에 김수박의 만화를 소개한 포스트를 올릴 때, [아날로그맨]의 그래피티적 성향을 생각하면서 떠올리려고 했던 작가가 마츠모토 타이요와 바로 이 크럼이었다. 김수박의 만화가 보여주는 연출과 작화들은 크럼의 무덤덤함이 보다 매끈해진 그림을 타고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마침 그는 이 작품집에서 글씨쓴이로 참여하고 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관련 포스트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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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1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알찬 리뷰군요.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들도 많구요. 김수박, 이라니 첨 듣는 만화가인데, 궁금합니다. 땡스투도 못 하고 산 <하나오>를 오늘 받았는데, 애니북스에서 나온 표지 중에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캣츠비> 표지 보고 홀랑 깼거든요. 갑자기 마츠모토 타이요, 하시니 생각나서. <새만화책> 잡지도 보셨어요?

hallonin 2006-02-17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오는 결국 오늘, 저도 샀습니다. 문화상품권 받은 걸로-_- 좀 더 숙고해보고 리뷰 지를까 생각중. 핑퐁만큼의 박력과 충격은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뒤로 갈수록 즐거워지더군요. 컷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만화책은 아직 못봤고.... 지금 확인해봤는데, 위에 얘기한 김수박도 작가로 참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마츠모토 타이요가 새만화책에서 언급이라도 됐나요?

blowup 2006-02-17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오. 위의 글에서 마츠모토 타이요 이야기 하셔서, <하나오> 샀단 걸 말씀드린 거구요. 새만화책은 로버트 크럼 책 나온 출판사라서. 연결고리가 모호했군요. ㅋㅋ
타이요의 다른 책들도 다 출판되면 좋겠어요.

hallonin 2006-02-17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그런 거군요.
음, 마츠모토 타이요 만화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내줄텐데.... 하나오도 뭐, 그리 썩-_- 팔리는 것 같진 않더군요. 철콘근크리트가 정식판으로 나올 날은 요원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