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논 갓 리틀 - 제35회 부커상 수상작
DBC 피에르 지음, 양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생각해보면 컬럼바인은 너무도 많이 얘기되서, 달리 이야기할 거리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렇게만 바라보면 이 책에서 보여주는 10대들의 세계는 너무 반복되서 회자되던 것이기에 썩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 있겠다. 우리는 래리 클락의 선견지명적인 작업을 통해서 생생하게 찍어낸 미국 십대들의 삭막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래리 클락이 <키드>와 <켄파크>에서 만들어낸 인상적인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컬럼바인에 만들어진 지옥의 배경을 장식한다. 1995년에 <키드>를 접한 몇몇 사람들은 <키드>에서 묘사되는 세계가 환타지와 센세이셔널리즘이 결합된 영역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다. 도덕주의자들에게 10대는 괴물이 됐다. 


매 구절마다 욕설이 튀어나오는 <버논 갓 리틀>에서 우리는 래리 클락이 응시한 세계가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약, 폭력, 왕따, 탈선 등의 친숙한 소재들과 매스미디어의 지저분한 생리와 인간의 이기심, '오늘과 별 다를 바 없는' 내일에 중독된 나른한 중년의 삶과 같은 구조화된 폭력과 실존적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화자 버논의 지저분한 욕설에 실려서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읊어진다. 잠깐, 랩이라고? 우린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하, 에미넴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인간만상의 추태란 추태는 다 보여주는 제리 스프링거쇼도 언급해야겠다.


에미넴의 메인스트림 습격과 제리 스프링거 쇼의 인기가 컬럼바인 시즌인 1999년에 겹쳐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미넴은 자신의 삶을 말그대로 쇼로 만들어서 이슈를 재생산해내고 그 쇼의 내용은 제리 스프링거쇼가 보여주는 노골적인 자기폭로와 일치한다. 이걸 누가 바라느냐고? 물론 돈벌기에 환장한 매스컴과 관련산업이다. 그럼 누가 그 돈을 내는데? OJ 심슨이라는 전례가 매스컴의 기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줬지만 결국 그것을 소비하는 것은 일반 대중이었다. 이것은 고대시대 때부터 인간 사회에 음침하게 존재했던 희생양 의식의 장엄한 패스트푸드화다.


OJ 심슨 사건의 카타르시스는 뻔뻔한 살인자가 벌건 대낮의 심판에서 해방된다는 이야기에 있다. 심슨은 파산 상태에 이르면서까지 최고급의 변호사들을 선임했고 그들이 한 일은 사건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사건 바깥에 대한 딴소리를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과연, 재판은 심슨이 살인을 했느냐 말았느냐가 아니라 그가 흑인으로서 백인경관에게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고 그것은 보다 확대되어 심슨 주변의 가족관계에서부터 애완견의 혈통에까지 이르는 온갖 주변부적인 것들을 스캔들화시키는데 몰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말그대로 뭉개져버렸다. 이 결과는 말그대로 사회에 대한, 정확히는 시선에 대한 조롱이었다. 거대한 조롱. 그러니, 우리는 에미넴이 씹어대는 인물들에 대해서, 자기 엄마와 전처까지 아우르는 그 노출증에 대해서 굳이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에미넴은 신나고, 대신 욕도 뱉어주지 않는가. 우린 그에게 욕 잘 한다고 돈까지 준다. 그래서 에미넴을 시인으로 생각하는 버논 리틀 또한 씹고 또 씹는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이 익숙한 컨셉으로 조롱 당하는 걸 진지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지루해보인다면 여기서 보여지는 악의 축인 매스컴의 지랄 맞은 본성이란 게 이미 007에서조차 악역으로 써먹을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소재이기 때문이리라.


미국 10대의 일상에 대한 집중도와 흐름을 풀어나가는 유머감각을 생각해볼 때, 작가는 래리 클락의 영화들보다 소설적인 강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묘사는 센스있고 유머감각이 넘치며 그러면서도 디테일을 잃지 않는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잘 만든 헐리우드 영화를 보듯 균형있는 흥미를 지속하며 스무스하게 흘러간다. 그것은 분명히 이 이야기의 판권이 팔릴 곳을 계산하고 그것이 어떻게 운용될 것인가를 예감한 작가가 집어넣은 의도적인 개그들이다. 대놓고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한마디로 동화다. 비록 욕설이 쏟아지긴 하지만 그 구조는 신물이 날 정도로 성장소설의 전례를 차곡차곡 밟아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부적인 측면에서 이야기의 흥미성과 묘사에서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쾌감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 자체는 지겨워죽겠다.


그러나 질릴 정도로 뻔한 구조나 결말에 대한 논란(소설이 소년의 통과제의라는 신화적 의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화라는 본분의 성깔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련했을 이 결말은 명백하게 조롱이다. 막판에 쏟아지는 똥shit으로 인한 숭고한 기적들)이 어떻게보면 뻔뻔스러운 작가에 의해서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건 이 이야기의 시선이 욕지거리로 뒤덮여서는 미국사회의 단면들을 대놓고 욕하는 것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 모든 사건의 원인과 과정, 바로 암흑의 핵심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컬럼바인 사건은 파악이 안되는 부조리의 상징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 우리는 시체와 죄만 보고 있다. 그래서 버논이 정작 중요한 것은 얘기하지 않으면서 오직 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부분에서만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정작 암흑의 핵심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세상은(특히 부시의 미국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동원해서 희생양을 만들고 죄를 쌓는다. 그리고 마치 OJ 심슨처럼 빠져나간다. 우리의 버논 갓 리틀께서 지지리 재수가 없었던 것처럼, 그의 죄가 끊임없이 가공된 것처럼 세상은 죄를 만들고 희생양을 찾아낸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로 책임져야 할 이들을 고발하고 그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동화다. 왜냐하면 그네들은 그들의 죄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