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18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18
변병준 지음 / 길찾기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프린세스 안나'의 래핑을 뜯고 안을 펼쳐보았을 때, 놀랐다. 그 안에는 따뜻한 색감으로 칠해진 눈 크고 보들보들하게 생긴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지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모노톤의 어두움을 간직한 채로 황량하고 쓸쓸하며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의 향연인 도시가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이미지-소녀. 소녀는 표지의 그 따스함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녀는 말라 있었고 죽 찢어진 눈에는 힘이 없었으며 움직임은 내내 정적이었다. 소녀의 얼굴은 그 몸뚱아리처럼 삐뚤빼뚤하게 그려지고 있었고 거기서 가장 티 나고, 동시에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눈, 그 눈은 제 자리에서 내내 공허한 빛을 내고 있으면서 소녀에게 괴기스러운 아우라를 부여하고 있었다. 배수아의 원작만큼이나 바싹 말라있었던 이 작품은 그 모든 형상들이 말라붙은 도시를 상징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소녀의 이미지가 항상 서 있었다.

'프린세스 안나'가 도시의 소녀에 대한 쓸쓸한 초상이었던 것처럼 표지에서부터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청록색 공간의 소녀가 그려진 단편집 '미정' 또한 그 중심에는 도시의 소녀에 대한 작가의 매혹이 서려있다. 모든 단편에서 여전히 쭉 찢어지고 공허한 눈을 한 채 표정이 없는 소녀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묘사가 드러나고 있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소녀들은 파멸과 복수, 혹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매혹을 상징하고 있고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거나 보통 사람들의 인식 위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단편들 속에서 그녀들은 언제나 문제의 시작과 끝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서다. 도시의 딸들인 소녀들은 바싹 마른 도시의 이미지의 한 축인 바, 그 황량하고 말라 비틀어진 도시라는 형상은 소녀를 통해 구체화된다. 변병준 작품의 이미지의 매혹은 바로 그 지점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지점의 자장권 안에선 변병준은 완성의 지점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수록된 '연두, 열 일곱'은 57페이지의 분량으로 전작인 '프린세스 안나'를 뛰어넘는다. 이미지로 완성되는 공간에 비해 너무 말이 많았던 전작보다 훨씬 간결해진 표현으로 우리는 소녀가 매개가 되어 드러내는 무수한 상처와 도시인의 고독에 대한 연민 어린 응시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발전 가능성은 다른 단편들, '너의 노래'에서의 보다 효과적인 동어반복, 'Utility', '신일맨션 202호'에서의 유머 감각을 동반한 냉소적 시선의 이미지화로 확인할 수 있다.

단편의 모음으로 보다 풍성해진 모습을 보여준 '미정'의 감수성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던 '프린세스 안나'라는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데뷔한지 벌써 9년째이지만 그는 언제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 작가였다. 그것은 '미정'을 본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얘기지만 다음 작품에선 그의 스타일의 완성을 보고 싶은 것 또한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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