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에는 인장이 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다다르고 싶어하는 자신만의 무언가, 한 번 보면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작가 자신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다이앤 아버스는 성취해냈다. 그녀의 사진은 보는 이에게 왜곡과 비슷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다이앤 자신이 피사체를 속이고 얼르면서 찍어낸 수없이 많은 필름들의 실험을 거친 끝에 뽑아낸 영역이다. 그 결과물이 온전히 피사체가 품고 있던 자연스러운 원형의 이미지라고 단언하긴 힘들다. 말했듯 그녀의 사진 작업에는 속임수와 진한 노동강도와 시간과 필름의 낭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소곳해서 되려 기괴하게 보이게 만드는 직사각형 안에 인화된 광경이 그 누구도 뽑아내기 힘든, 다이앤 아버스만이 뽑아낼 수 있었던 이미지라는 것을 증명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것은 결국 피사체가 갖고 있던 어둠, 감추고자 했던 영역의 직설적인 현현이다. 그래서 그 성과, 모종의 비밀마저 가지고 있는 듯한 그녀의 어두운 사진들은 우리에게 그녀가 수행한 작업의 비의스러운 면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만든다.

여기서 전기의 역할이 등장하게 된다. 전기란 기본적으로 완전체로 삼아진 대상에 다다르려 하는 한계를 안고 있는 끊임없는 복원의 서술이다. 그것은 1차적으로 매혹을 근거로 하며 2차적으론 집요한 의지와 노동에 바탕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다이앤 아버스를 다룬 이 책은 양쪽 모두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다이앤 아버스에 대한 집착을 그려낸다. 물론 아직 다이앤 아버스와 관련된 많은 중요한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며 그녀의 작품 또한 전부 공개가 안 된 상황에서 이 전기가 다다르려 하는 곳은 아직 멀찍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드물다고 할 정도로 완고했으며 삶과 사람 또한 흔치않은 고통과 경험으로 채워진(그것을 예술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예술가였던 한 여성이 창조해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초석을 치뤄내는데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그녀의 사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한 예술가의 삶과 사고에 대한 방대하고도 촘촘한 추적의 결과다.

스스로 다이앤 아버스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경험을 겪어내야 했던 당사자인 퍼트리샤 보스워스가 쓴 이 집요한 전기에 따르자면 다이앤 아버스는 사실상 타고난 로맨티스트였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쾌락주의자였고 그 순수를 가능케한 감각의 모든 극단적인 민감함은 그녀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걸 알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민감함은 동시에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해준다. 그녀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을수록 역으로 스스로의 세계로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타인과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독한 소심함과 카메라만 들고 있으면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까지 파고 들어갔다는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녀를 본 이가 그녀에 대한 묘사로 하는 말들 중 줄기차게 이어지는 것은 '소녀 같지만 놀라울 정도의 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감각의 천국에서 그녀는 판단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그것은 그녀가 자라온 부유층으로서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느껴야했던 죄의식, 그녀가 견지했던 예술가와 돈은 상극이라는 입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가지게 된 경계의 소거는 그녀의 감정의 양면성과 어두운 미학의 법칙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상인의 모습이나 장애인의 모습은 다를 게 없었다. 경계를 붕괴시키고 양면성, 혹은 다면성들이 가진 각자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 순간 그녀는 예술로써 본질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한 시점에 있어서 본질에서의 차이없음을 발견한 그녀가 흥미롭게 여겼던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반응들이었다. 즉, 그녀는 구경꾼들의 음험한 시선도 포착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 시선은 또한 자신의 시선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의심에 시달렸으며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예술이 성립된다고 믿었던, 자학적이면서도 도피적인 예술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자신의 피사체들을 이해한 만큼 피사체들이 그녀를 이해해줬을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본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써 버려지고 저주받은 세계로 편입해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이 이 낯설고 아름다운(다이앤 아버스는 확실히 그랬다) 이방인을 대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욕망이거나 호기심 차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녀의 전기는 다시 중요해진다. 이해의 문제에서, 그녀의 작품을 대할 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모종의 우울과 공감이다. 마치 포티쉐드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우울증에의 공모가 놀라울 정도의 흡착감과 광범위한 지지를 불러온 것처럼, 어둠은 보편적인 우리 안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이해받지 못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녀가 포착해낸 비틀린 이들의 세계란 소위 보통사람들의 어둠이 체화된 영역이기도 했다. 그녀의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화학효과는 그만큼이나 모든 이들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진정으로 이해를 갈구했던 이가 아니었는지. 그저 말이나 닿지 않을 몸이 아닌 분명한 이미지로써, 그녀가 찾고자 했던 것은 우회해서 드러난 공감과 이해에의 갈망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그녀의 정신적 쌍둥이로 얘기되며 이제는 다이앤 아버스의 오빠로 더 유명해져버린(아이러니한 예언처럼) 하워드 네메로브가 이 기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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