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8. 이슬비(3)
오늘도 학교에 빨리 간다. 늘 똑같은 길에, 늘 똑같은 풍경. 하지만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이 공기는 평소에 내가 마시던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아니었다. 어둡지만 달짝지근한 공기, 그래서 더욱 더 힘이 나는 공기였다. 이 공기와 함께라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 가서 책상에 잘 봉해진 봉투를 올려놓았다. 봉투의 입에 깜찍한 스티커가 인상적인 꽃무늬 봉투였다. 나는 그 봉투 속 넣어진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했다.
슬비에게
하이! 니 짝꿍 선우야.
저번에 내가 너무 집요하게 물어본 거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난 정말로 니가 걱정돼서 웃겨줄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정말 미안해!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
근데, 슬비. 미안한데 네가 어떤 고민으로 마음고생 하는 지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으면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는데.. 말하기 힘들다면 안 말해도 돼.
네가 이걸 보고 화 풀었으면 좋겠어!
선우가
어젯밤에 정성들여 쓴 악필의 문장들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문장을 쓰기 위하여 무한 반복하던 지우개 질도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아, 이 문장들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쥐어짰는지.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조심히 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였구나,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다.
슬비의 책상 속에 편지를 재워두고, 엠피쓰리를 들으며 잘 가지도 않는 시간을 보냈다. 내가 그동안 슬비 책상을 열 번 이상 쳐다 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길 줄 알았으면 적당히 늦게 올 것을 뭐 이리 빨리 왔을꼬. 슬비 책상을 살짝 훔쳐 본 횟수만큼 후회하다 나도 모르게 잤다. 수업 종소리에 그때서야 잠을 깼는데, 슬비는 늦잠을 잤는지 헉헉 대며 소보로 빵을 반쯤 입에 끼고 있었다.
꼬박 하루를 아무 일 없이 지냈다. 아무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 안도 깨끗했다. 슬비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
할 수 없지. 이건 슬비가 결정해야 되는 문제니 나는 입 다물 수밖에. 슬비가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하지만 내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루를 지내려하면 오히려 욕도, 쓴 웃음도 평소 때보다 많아졌다. 걔가 나를 버린 거야! 걔가 나를 버렸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편지를 보내고 나서 이틀이 지났다. 나는 학교에 가 내 책상에 앉았다. 책상 속, 준비해두었던 교과서를 펼치고 예습을 시작했다. 예습한 지 얼마 안 되어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은 기계적으로 흘러갔다. 슬쩍 책상 속을 뒤져보기는 했지만 편지는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전부 짝을 지어 밥을 먹으러 갔고 나는 잠시 책상위에 드러누워 쉬고 있었다. 수업시간엔 공부하랴 쉬는 시간엔 종이쪽지 하나 없는 책상 뒤지랴 완전히 지쳐버렸다. 정말 오지도 않을 편지에 이렇게 미련이 남을 줄이야. 징하다, 징해.
그래도 공부는 해야 되니 밥은 제때 먹어야지. 밥을 먹으러 학교식당에 가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또 책상이 나를 끌어당겼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책상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군. 나는 그 목소리를 떨쳐버리지 못해 이끌려갔다. 그래, 딱 한번만 더. 이번에 정말 뒤져서 안 나오면 나 이 짓 그만둘 거야. 비장한 각오로 책상을 뒤졌다. 책상 깊숙한 곳에 종이쪽지가 만져졌다.
어?
바로 꺼내 확인해보았다. 예쁘게 접혀진 종이쪽지의 꼬리에 ‘선우에게’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몸 전체에 떨림이 전해왔다. 으왓!!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To. 선우
편지 잘 받았어. 읽느라 좀 고생했다ㅋㅋ(뜨끔. 나름 잘 쓴다고 쓴 건데.)
아, 내 걱정해준 건 고마워.
근데 니가 그때 갑자기 부담스럽게 나오니까 내가 다 부끄럽드라. 그래서 니 눈도 당분간 못 쳐다봤잖아ㅋ 부끄러워서. 그래도 내 걱정해주는 사람은 너 밖에 없네.
그래서 말인데, 나 선우 니방에 놀러가도 되남?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얘기 좀 하자. 사실 요즘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잘됐네! 오늘 저녁 먹고 쉬는 시간에 내가 맛있는 거 사가지고 니방에 갈게. 나중에 방 번호만 알려주라. OK?
너 그때까지 니방에 꼼짝말고 있어라!
슬비가
희망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산골짝에 걸린 빛나는 해 조각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곧장 달려가 슬비를 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쪽지를 내 가방에 넣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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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짧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