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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을 살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의 기억이나 억눌렸던 감정이 하나쯤은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런 감정들은 마치 잔잔한 바다처럼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대로 몸 속에 감춰져 있다가 어느날 폭풍이 휘몰아치면 그 거센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바다처럼 흔들리고 울부짖게 된다. 한 차례 그러고 나면 몸 속에 담겨져 있던 감정의 찌꺼기는 해소가 되고 감정은 사라진 채 기억만을 간직하게 되는 것 같다.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이 소설집은 표제작인 <환상의 빛>을 비롯하여 <밤 벚꽃>, <박쥐>, <침대차> 이렇게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읽다보니 공통점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죽음이다. 요즘에 많이 출판되는 일본 소설들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비해 이 책은 참 서정적이면서 생각하게 되고, 불현듯 여러가지 과거가 내 몸을 훓고 지나가기도 했다. 이 가운데 <환상의 빛>이 가장 좋았는데 주인공 유미코가 감정을 쏟아내는 소소기 바닷가에서의 모습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었던 한 친구를 떠올리게 했고, 그 친구의 자살 소식에 힘들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서 유미코와 같이 감정을 쏟았던 것 같다.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는 <환상의 빛>은 서른두 살이 된 유미코의 이야기다. 효고 현 아마가사키에서 소소기라는 해변 마을로 시집 온 지 만 삼년이 된 유미코는 전남편과 사별한 지 칠 년이나 되었다. 유미코의 전남편은 아내인 유미코와 태어난 지 세 달된 아들 유이치를 남겨 놓고 이유가 불분명한 자살을 한다. 일을 끝내고 집 근처의 찻집에서 차 한잔을 마신 남편은 집으로 오지 않고 전차 선로 한가운데를 전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경적소리, 엄청난 브레이크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걷다가 치인다. 갑작스런 남편의 자살 앞에서 유미코는 습관적으로 남편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책감 등을 쏟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같다.
시간이 흘러 유미코는 바닷가 소소기에 사는 남자와 결혼한다. 바람이 유난히 거센 날 보건소에 민박에 관한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화지마에 나간 유미코는 찻집에서 서른 전후의 남자를 본다. 전 남편처럼 사팔뜨기인 그 남자를 쫓아 가와라에서 내린 유미코는 그 남자의 뒤를 쫓으면서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를 걷던 전 남편의 뒷모습을 생각한다. 그제서야 유미코는 전 남편이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전남편이 죽음을 인식하게 된다. 시커면 바다, 머플러도 코트도 찢겨버릴 것 같은 바다 앞에서 유미코는 꽁꽁 감춰둔 울음을 모두 쏟아낸다. 그러다 문득 옆을 보니 재혼한 남편 다미오가 곁에 서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렇게 유미코는 전남편의 죽음을 두고 원인을 찾다가 결국 원인을 깨닫게 되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남편이지만 죽음을 통해서 남편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었듯이 재혼을 통해 잘 몰랐던 다미오였지만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면서 하나씩 알아가는 모습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 우리는 자신에 관해서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누군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만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중간에 유미코의 유년시절 발견되지 않은 할머니의 죽음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밤 벚꽃>은 아들의 죽음을 겪은 중년부인이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하룻밤 아들의 방을 내준다. 오랫동안 늘 정원에 있었지만 신혼부부의 대화를 몰래 들으면서 비로소 바라본 벚꽃은 다른 때와는 달리 보이고, 그 속에서 분명히 알기는 어렵지만 뭔가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겪었던 주변의 죽음들에 관해 떠올리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 친구의 자살, 전날 저녁 같이 술을 마셨는데 다음날 새벽 죽음이 되어 버린 선배,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했던 사촌오빠의 죽음 등등... 모두들 소멸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대로 내 마음 속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도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겠지. 이왕이면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이 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