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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ㅣ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0
유리 슐레비츠 지음, 강무환 옮김 / 시공주니어 / 1994년 4월
구판절판
고요하다. 싸늘하고, 촉촉하다
촉촉하면서도 따스함이 감도는 그림과 정갈한 글로 구성되어 있는 유리 슐레비츠의 <비오는 날>을 접하고 그 느낌에 반하여 이 책을 찾게 되었다. 마치 망원경으로 살펴보듯, 눈동자를 표현한 듯 둥그런 프레임 속에 가둔 새벽 정경은 그대로 액자속의 풍경인양 고요하다. 틀이 주어져 있어 보는 이의 위치는 외부에서 관찰하는 시선으로 그림을 들여다 보게 하고, 그림 세상은 마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그림도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는 가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호숫가 나무에 시선을 두는가 싶더니 이내 나무 아래의 할아버지와 손자로 이동한다. 각각의 프레임은 그 크기를 달리하여 그림 안의 세상도 시시각각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새벽 그 푸른 어스름 속에서 달빛은 바위와 나뭇가지를 비추고, 이따금 나뭇잎 위로 부서진다. 산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지키고 있다. 새벽이란 시간은 빛과 어둠이 서로 공존하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
달빛은 그대로 호수에 반사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듯 하지만 실바람에 그만 호수는 몸을 떤다. 느릿하게, 나른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새벽은 고요한 듯 싶지만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을.. 다만 소리가 잠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외로운 박쥐 한마리, 소리없이 허공을 맴돌고, 개구리 한 마리는 물로 뛰어든다. 개구리 입수 소리마저 조용히 삼키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 소리에 잠이 깬 할아버지는 손자를 깨운다.
이 책에서 가장 주의를 끈 점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표정이다.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조용한 미소를 띄고 있으며 정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손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다.아마도 잠이 없는 할아버지와 잠이 덜 깬 손자의 모습을 그려낸 것도 같다.
호수에서 물을 길어와 조그만 모닥불을 피운다.
산과 호수는 초록이 된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프레임을 벗어난 순간이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순간, 독자들과 그림 세계도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같다.
동양적인 정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리 슐레비츠가 중국의 한시에서 영감을 얻어 이 그림책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들이 낯설지가 않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새벽의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는 그림들과 군더더기 하나 없는 글은 정갈한 느낌을 준다. 새벽을 물러나게 하는 빛은 또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