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이 읽고 가장 오랜 시간 내 옆에 친구처럼 있던 시집이다. 개인의 성찰과 더불어 그 자신이 해직교사로서 겪은 이야기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아픔인 분단의 현실에 대해 시인은 큰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시인의 성품과 닮아 있는 듯하다. 이 시집은 4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에서 개인적으론 1부와 2부가 가장 좋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자연스런 감정들, 언제까지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감정도 틈이 생기고, 서운함이 쌓이면서 헤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 그 시간 뿐만 아니라 헤어지는 것까지도 사랑해야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작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삶 역시 계절의 순환에 맞게 살아가듯이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우리의 삶 자체를 시어로 아름답게 표현하기도 했다.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니기에 때론 누군가를 사랑해도 그 사람에게 선뜻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 쉽지가 않고, 그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무수한 감정들로 인해 내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감정들을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거듭 나기도 한다. <혼자 사랑> 그대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대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요 크고 작은 일들을 바쁘게 섞어 하며 그대의 작은 손을 잡아보고 싶어요 여럿 속에 섞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다 슬그머니 생각을 거두며 나는 이것이 사랑임을 알아요 꽃이 피기 전 단내로 벋어오르는 찔레순 같은 오월 아침 첫 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 같은 이것이 사랑임을 알아요 그러나 나의 사랑이 그대에게 상처가 될까봐 오늘도 말 안하고 달빛 아래 돌아와요 어쩌면 두고두고 한번도 말 안하고 이렇게 살게 되지 생각하며 혼자서 돌아와요 가끔 정말 누군가와 즐겁게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 말이라도 들어 줄 수 있는 친구, 어떤 모습이라도 어떤 말이라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친구, 그런 친구가 있다면... 아니 내가 그런 친구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시들은 때론 상처받는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같다. 그 중에서 미시령이란 시로 인해 바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미시령> 바람이 분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오라 바람이 분다 가난한 모습으로 돌아오라 찬란했던 잎새들의 푸른 박수소리도 잎잎마다 쏟아지던 반짝이는 햇살도 모두 다 버리고 빈 몸으로 돌아오라 말을 많이 했거든 말을 버리고 돌아오라 큰 몸짓 많았거든 몸짓들을 빼내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들을 건너 돌아오라 두려워 말라 미시령을 넘는 늦가을 나무처럼 모든 것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라 많은 이름으로 둘러싸여 사는 그대여 갈잎이 무수히 가고 있다 가벼워져 돌아오라. 바람이 부는 맑은 날엔 내 몸이 가벼워져 내 마음이 가벼워져 미시령 고개를 넘어가는 상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줄 벗같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