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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평점 :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읽으면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가 떠올랐다. 유대인이었던 리게티는 전쟁 중에 가족을 아우슈비츠에서 잃었고 헝가리 혁명 이후에는 작품을 검열받았다.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고 자신과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고자 그는 <진혼곡>을 썼다. 리게티가 흐느끼는 울음소리 가득한 곡으로 전쟁의 참상과 학살을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다면, 작가 서보 머그더는 제 2차 세계대전과 혁명 시기를 살아온 한 여성, 에메렌츠를 등장시켜 굴곡진 헝가리의 역사를 들려준다.

전업 작가인 화자 ‘나’는 글쓰기에 집중하기 위해 집안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13살 때부터 가정부로 일을 했던 에메렌츠는 지역의 많은 일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환자들에게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동네 집집마다 쌓인 눈을 매일같이 쓴다.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면 곧장 달려가는 그녀지만, 정작 자신은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질색한다. 정치, 예술,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일기 예보만을 챙겨보는 특이한 성격을 가진 에메렌츠. 그녀가 돈을 모으는 목적은 가족의 석조무덤을 만드는 데 있다.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지만 고집불퉁이고 비밀이 많은 에메렌츠. 그녀는 집의 모든 문을 잠그고 창문을 나무판으로 가려 놓고 집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도대체 문 뒤에 그녀는 무엇을 숨겨놓았을까, 라는 궁금증이 독자를 이끌어가는 축이 된다. 어릴 적, 에메렌츠의 쌍둥이 동생은 번개에 맞아 죽고 그녀의 엄마는 우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전쟁 중에 약혼자는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게 되는 등. 에메렌츠의 삶은 불행으로 가득하다. 여러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오로지 노동으로 삶을 살아온 에메렌는 화자인 ‘나’와 대립에 서있다. 에메렌츠가 빗자루질을 하는 여자였다면 ‘나’는 헝가리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나’는 지역 사람들과 왕래는 거의 없고 오로지 에메렌츠와 소통을 한다. 그런 그녀를 에메렌츠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않고 타인이 그 일을 대신하는 인텔리겐차”로 비꼰다.
성격과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둘이지만 점점 사이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에메렌츠는 '나'에게 문을 열고 방안을 보여준다. 전쟁의 잔해가 남아있는 방. 젊은이들을 피신시키고 청산가리를 마셨던 유대인 그로스만씨의 조부가 쓰러졌던 소파, 유대인의 가족에게 받은 식기와 가구, 그리고 아홉 마리의 고양이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고, 숨겨주고 싶어하는 전쟁의 과거. 에메렌츠는 자신의 물건을 작가에게 유산으로 남기고자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에메렌츠는 바이러스성 감기에 심하게 걸린다. 에메렌츠를 집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나'는 그녀 몰래 의사와 작전을 짠다. 에메렌츠가 밖으로 나오면 따스하게 맞아주고 병원에 데려가 줘야 했지만. 유명한 작가가 된 '나'는 에메렌츠를 뒤로한 채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달려간다.
작가 서보 머그더는 제 2차 세계대전과 헝가리 혁명의 참화를 보며 이성 중심의 세상과 책임을 회피한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오롯이 자신의 노동으로 삶을 살아온 에메렌츠의 생애를 통해 작가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헝가리인들에게는 필요했던 사람은 지성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성녀가 아니었을까.
에메렌츠가 문 뒤에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전쟁의 희생자들의 유산였다. 화자는 에메렌츠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졌으나, 결국 에메렌츠의 마음을 끝까지 헤아려 주지 못했다. 그래서 밤마다 구급차가 서있는 그녀의 집으로 달려가지 못한 채 철문에 갇힌 자신이 등장하는 악몽을 꾼다. 에메렌츠가 작가에게 물려주려 했던 가구는 너무 오래되어, 덮었던 천을 올리자마자 부서져 버린다. 에메렌츠가 남긴 유산이 가루로 변하여 없어졌듯이, 전쟁이 남긴 참상과 책임의식은 이제 우리에게도 사라져 버린걸까. 비참한 역사는 단지 매일 밤 우리를 괴롭히는 환영으로만 남게 되는 걸까. 서보 머그더는 과연 우리가 죄의식 없이 역사 앞에 설 수 있는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