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방 한쪽에 놓여있는 피아노 건반에 손을 안 댄지 오래 되었다. 피아노 옆을 지날 때마다 15여 년 전, '음악'이라는 언어를 가르쳐 줬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게 들려줬던 클래식, 재즈 작곡가들의 기법, 함께 들었던 음반들, 썼다 지웠다 했던 음표 자국들. 그 당시의 장면들이 조각조각 떠올라 금방이라도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다.
주변에 놓인 사물이 말을 걸어 이야기의 실타래가 풀리기도 한다. 어느 날, 리베카 솔닛 앞에 살구가 가득담긴 세 개의 상자가 도착한다. 어머니가 더 이상 살지 않는 집 옆, 살구나무에서 따온 것들이다. 솔닛은 살구를 침실 바닥에 쏟아놓고 오며가며 살구의 변화를 살핀다. 초록색 살구는 익어가고 익었던 살구는 썩어가고. 솔닛은 살구 더미를 마치 인생의 여러 단계로의 이동 같음을 느낀다. " 문드러진다는 건 뭔가가 썩고 있음을 암시하는 과정이지만 그건 또한 무언가가 자라는 과정,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취한 다음 더 큰 환경으로 흩어질 준비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에 파묻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솔닛은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찼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녀는 그런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가 인생 목표였다. 하지만, 여러 해 전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게 되면서 솔닛은 이야기를 잃어가는 노모를 붙들고 싶어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특히 나에 관한 이야기를.”
어머니 이야기로 시작한 솔닛은 자신의 회고록을 써내려간다. 독서, 글쓰기, 친구들, 여행했던 장소에 얽힌 경험담을 담담하고도 깊은 성찰이 담긴 목소리로 들려준다. 극지방 관련 전시에 글을 쓰면서 어린 시절 읽었던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을 소환하고,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자살한 소방관이야기, 북극에서 사체를 먹는 이야기, 수술을 받으며 겪었던 두려움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삶의 단절과 죽음, 살아가는 일상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때 우리는 가끔 감정을 이입하여 마치 내 이야기인양 빠져 든다. 혁명가가 되기 전 체게바라가 만났던 나병 환자 이야기, 버마의 독재정권에 시위하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통해 솔닛은 ‘감정이입’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것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함께 아픔을 나누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연대의 첫 걸음이라고.
누가 말하느냐, 또 누가 듣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전하는 감정과 의미는 다를 것이다. 솔닛이 쓴 글로 인해 아이슬란드의 낯선 이들과 만남이 이어졌듯이, 그녀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가진 이야기는 무엇인가? 멀리 있는 누군가가 내 이야기로 인해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 한때 신선한 살구와도 같았던 우리의 과거는 이제 절여져서 유리병 안에 담겨졌다. 쓰지 않은 이야기는 사라지겠지만 당신이 글로 남긴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든, 누구와 연결될 수 있다.
“글쓰기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고 청중 앞에서 낭독할 때라도 여전히 부재하며 멀리 있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미지의,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