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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에 의미가 있는가? -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 해석학
케빈 J. 밴후저 지음, 김재영 옮김, 강영안 교수 추천 / IVP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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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사에 강영안 교수는 데리다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이 책이 읽는데 매우 긴 호흡을 필요로 하며 데리다의 입문서로도 매우 훌륭하다고 썼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선 이 책에는 논증이 매우 빈약하게 소개되어 있다. 1부에서 벤후저는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는 데리다, 바르트, 로티, 드만 등의 입장들을 지루할 정도로 길게 소개하지만 단지 그들의 입장이 나열되어 있는 정도이고 그들이 그러한 입장을 표명하게 된 실질적인 논증적 근거들은 거의 설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어느 정도 귀를 열어본 사람이라면 익숙히 들었을 주장들이 다만 지루하게 반복되어 있을 뿐이다. 이 책에는 수없이 많은 철학자, 문학비평가들이 인용되어 있는데 차라리 데리다 한 사람만 가지고 깊이 있는 논의를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인용이 저자의 유치한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난 1부를 3분의 2정도 보다가 이 책을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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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신 공신 학습법 시리즈 7
강성태 외 지음 / 중앙M&B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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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공부 잘하는 애 중에 이런 거 보는 사람 본 적 없다.

이런 것 볼 시간에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것 살 돈 있으면 맛난 것이나 사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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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2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런 시원합니다.

다락방 2011-12-1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생뚱맞게 2011년 12월 15일에 이 글에 추천을 했습니다. ㅎㅎ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변증
정성욱 지음 / 홍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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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에 나누기도 아까운 이야기들.

 

본서의 저자는 옥스퍼드의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제자로 하버드-옥스퍼드를 졸업한 소장 신학자이다. 이 책의 뒤편에는 혼란의 시대를 시원하게 정리해 줄 해갈의 답변서라는 문구와 함께 장신대학교 총장 등 기독교계 저명인사들의 추천사가 실려있다. 난 이 책의 주요 논점들을 모조리 논박하려고 한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서 크게 쓰임 받을 발군의 실력 가진 귀한 인재(진홍)라는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고작 이 정도 뿐이라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먼저 챕터 2를 보자. 정성욱은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해 주는 주요 증거로써 40명의 저자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라고 말한다. 1600여 년에 걸친 세월의 기록이 모두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큰 증거가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왜 저자는 그 자신이 입증해 보여야 할 테제를 마치 자명한 사실인양 거론하고 있는가? 구약의 아가서를 보라, 그 책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으며 오로지 남녀 간의 짙은 사랑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신약을 보라. 거기에는 마르틴 루터가 쓰레기 복음이라고, 바울과 요한 등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 못한 야고보의 공로주의 문헌이라고, 따라서 정경에서 제거되어야 할 문서라고 지칭한 야고보서가 있다. 이런 실례들을 정성욱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설령 정경에 담긴 책들의 주제가 비슷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이것에 대한 다른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특정한 종교적 신념의 소유한 집단의 자기 검열의 결과라고 말이다. 이러한 검열의 결과가 바로 외경과 위경이 아닐까?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1600여 년이 흘렀고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적 입장이 담긴 문헌들이 수 많은 저자에 의해 계속 기독교회에서 끊임없이 출간되어 왔다는 예만으로도 어느 정도 다른 방식의 설명이 가능함을 보여주지 않을까? 한 가지 더, 이 챕터에서 정성욱 C.S. 루이스를 거론하면서 기독교 변증의 유용한 방법으로 자연법에 호소하고 있는데 요즘과 같은 공약 불가능성의 시대에 자연법을 믿는 철학자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버마스 같은 구닥다리 빼고.) 이런 한물간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이유가 뭔지 난 잘 모르겠다.(설마 현대 사상을 잘 이해 못하는 건가?)

 

성경의 해석과 적용의 관계에서 정성욱은 해체주의 문학 이론을 언급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전혀 그 이론의 도전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해체론의 입장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텍스트의 진위를 결정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앞서 과연 텍스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마련할 수 없다. 해체론의 작업으로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를 집어낼 수 있는 토대가 모조리 제거된 것이다. 저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면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자만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고 불신자는 근원적으로 텍스트 의미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의 의미를 통한 불신자에 대한 전도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자면 정성욱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는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의도한 뜻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신약 기자들의 구약 인용, 예컨대 마태복음 기자의 호세아서 인용 등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음으로 나는 챕터 5 9를 함께 묶어 논의하겠다. 이 두 챕터에서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악의 문제이다.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자신의 의도로 주관하는 이가 신이라면 이 세계의 악마저, 아담과 하와의 타락마저 신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선악과를 주었을 때 이미 신은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취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닌가? 정성욱은 죄의 원인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고 신은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라 함으로써) 이 문제를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라 하여도 이단이고 원인자가 아니라고 하여도 이단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성욱은 이단인가?) 정성욱은 신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방도로 신이 죄의 원인자가 아니라 주장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궁지에 몰고 있다. 이런 식의 해결책은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낄낄.

 

그 다음은 챕터 8이다. 이 챕터의 앞 부분은 사실상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변증론 부분을 간략히 추린 것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다.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부분은 불신자와 신자의 접촉점 파트다. 첫째, 둘째는 언급할 가치마저 없으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만약 니체에게 이런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그는 ‘당나귀라 비난하지 않을까?) 내가 겨냥하는 것은 3번째,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의 보편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의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기원이 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성욱은 남편의 간음을 장려하는 문화권은 없으며 살인과 절도를 권유하는 문화권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웬걸? 나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다윈주의가 가장 멋지게 설명해낼 수 있는 모범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생각한다. 진화 심리학의 기본 테제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은 진화의 산물이다 는 것이다. 살인과 절도를 장려하는 도덕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러한 개체가 존재한다면 그 개체가 담지하고 있는 유전자는 종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자연 선택을 통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챕터 11에서 정성욱은 성경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어떠한 과학적 실례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내가 인정하는 것은 생물철학자 마이클 루즈가 인정하였듯이 다윈주의 역시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전제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여기서 도킨스의 완고한 입장은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으로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더 많은 내용을 썼으나 사이트의 성격 상 몇가지 부분을 삭제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은 티타임에 나누기도 시간이 아까운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맥그래스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신학도들 사이에 상당한 추종자를 가지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의 신학적 사유가 이토록 저급한 것인지 나는 당황스럽기까지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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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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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진화생물학계의 슈퍼스타 스티븐 제이 굴드는 하버드대학교의 고생물학자로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옥스퍼드의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진화생물학계를 양분하고 있다. 그는 1972년 닐스 엘드리지와 단속평형설(종은 대부분의 시간을 정체하고 있으며 급격히 짧은 지질학적 기간 동안 급격한 진화를 겪는다는 주장)을 제창하여 전통적인 다윈의 점진설을 고수하는 도킨스와 일대 논쟁을 일으켰다.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유려한 문장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진화와 연관된 다양한 그을 저술하였으며 인문적 소양도 출중해 인간의 문화에 대한 진화론의 함축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이번에 서평하는 <풀하우스>도 그러한 성격을 지닌 저술로서 진화의 참된 성격에 대해 논증한다. 굴드는 도킨스와의 논쟁 외에도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인 하버드대 동료 리처드 르원틴과 함께 사회생물학의 주요 테제인 적응주의를 비판하는 <성 마르코 성당의 스팬드럴과 팡글로스적 패러다임>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사회생물학에 대한 논쟁의 화살을 당긴 것 등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2년에 지병인 암으로 61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풀하우스>에서 굴드는 크게 3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째는 일반 대중과 학계에 만연되어 있는 다윈주의 진화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야구에 관한 것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의 4할 타자의 소멸을 다룬다. 굴드는 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주제가 사실은 다양한 변이의 시스템 전체풀하우스- 를 단일한 값으로 추상화 시키는 오류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논증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주제는 박테리아의 위대함이다. 굴드는 박테리아야 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방대한 생명의 형태라 찬사를 보낸다.

이 세 가지의 주제를 다룸에 앞서 굴드는 우선 한 시스템의 특성을 어떤 통계적 수치로 바르게 나타낼 수 있을지를 고찰한다. 굴드에 따르면 평균값, 중간값 등은 모두 한 시스템의 총체적인 변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소수의 극단적 값이 평균을 움직일 수 있고, 평균은 유지되지만 집단의 양쪽 꼬리의 값이 끊임없이 변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값이 시스템 전체를 표상할 수는 없다. 시스템 전체의 변이를 종합적으로 읽는 것만이 한 시스템의 특성을 올바로 표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82년 걸두는 복부중피종 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그 병에 걸린 환자들의 수명의 중간값은 약 8개월이었다. 그러나 굴드는 책을 출간한 96년 까지 살아있었고 2002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이는 중간값 이라는 한 특정 값이 한 집단을 대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고 굴드는 주장한다.

굴드는 그가 다루려는 주제들이 모두 이와 같이 한 시스템의 특성을 하나의 값으로 표상하려는 잘못된 시도에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진화란 생물계가 점점 더 복잡성이 증가되어 가는 과정, 단세포생물에서 인간으로,이라는 주장이나 메이저리그의 4할탈자의 소멸이 타자의 질이 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바로 그런 오류에 빠진 결과라는 것이다.

진화를 논함에 있어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주장한다. 박물관이나 생물 교과서에 흔히 개제되어 있는 자연사 그림을 보자. 단세포 생물이 첫 장에 등장하고 그 후에 무척추 동물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다음 다시 어류가 지면 전체를 가득 매우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유인원을 지나서 드디어 인간이 마침내 진화의 정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얼마나 고등한 인간이란 말인가! 그러나 굴드는 이러한 그림이야 말로 진화에 대한 편견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류에서 양서류가 진화한 것은 맞다. 그러나 고생대 말기에 양서류가 어류의 한 종에서 종분화를 한 후에도 여전히 어류는 자신의 바다에서 진화를 거듭해 나갔으며 종의 가짓수를 늘려 나갔다. 어떻게 수 많은 진화의 나뭇가지 중 하나만을 진화의 경로라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진화는 높은 곳으로의 사다리가 아니라 수 없이 많은 가지를 뻗어나가는 나무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복잡성이 증가해나간 생물들이 출현해 오지 않았는가? 분명히 단세포보다 무척추 생물은. 파충류는, 포유류는 더욱 더 복잡하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굴드는 <술 주정뱅이의 모델>을 통해 답해 나간다. 술에 만취한 한 남자가 술집에서 나와 도보에서 양 옆으로 계속 비틀거린다. 한 쪽에는 닫힌 술집 문이 있고 도보의 다른 한 쪽 끝에는 도랑이 있다고 하자. 술집에서 나온 취객이 양 옆으로 1/2의 확률로 비틀거린다고 가정하면 언젠가는 결국 그는 도랑에 빠지게 된다. 한 쪽은 길이 막혀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지만 도랑으로 열린 다른 쪽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역사에서 나타난 복잡성도 이와 같이 무작위적인 자연선택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잡성 시작점에 최소값을 가진 박테리아가 가로막고 있기에 무작위적인 방향으로의 진화 과정을 통해서 결국 필연적으로 소수의 종은 고도의 복잡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4할 타자의 소멸 문제도 같은 원리로 설명된다. 종래의 이해로는 4할 타자란 어떠한 실체로서 그것의 소멸은 타자 집단의 실력이 저하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히려 굴드는 이렇나 현상이 야구 전반의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선수들의 신체적 조건이나 외적 환경 모두가 이전에 비하여 증진되었고 무엇보다도 평균 타율이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타자들의 실력이 저하되었다는 주장은 수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4할 타자의 소멸이 야구의 향상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좋은 타자란 높은 타율의 타자를 의미하는데 4할 타자의 소멸은 곧 강타자의 소멸과 동의어가 아닌가? 그러나 아하 굴드처럼 다르게 생각해 보자. 타율이란 마라톤 종단 기록이나 높이 뛰기 기록과 같은 절대적 기록이 아니다. 타율은 늘 타자가 투수와 수비수들과의 대결에서의 이뤄낸 기록인 것이다. 인간의 경기 능력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굴드가 오른 쪽 벽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 사람은 절대 마이너스의 시간에 100미터를 주파할 수 없다. 0초는 인간 달리기 기록의 오른쪽 벽이다. 2-30년대, 오른 쪽 벽 근처에 서 있던 강타자들이 상대했던 선수들은 벽에서 멀리 떨어진 평균값의 투수 집단이었다. 투수 중에서 오른 쪽에 다다른 선수들은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수였다. 그래서 소수의 강타자들은 낮은 평균의 투수들을 상대로 4할의 타율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타자나 투수나 평균은 벽 근처로 가까이 다가서 있다. 전체적으로 실력이 향상되었고 분포의 양쪽 꼬리 역시 줄어들었다. 따라서 지금 오른쪽 벽에 가까이 선 타자들은 높은 평균의 투수를 상대로 낮은 타율을 뽑아낼 수 밖에 없는 노릇인 것이다.

다시 진화로 돌아와 보자. 인간은 더 이상 진화의 정점에 서 있는 종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변이의 전체적 시스템의 오른쪽 꼬리에 불과한 미미한 수의 종일 뿐이다. 의식이라는 복잡성의 극한이 진보의 유일한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사고를 할 수는 있지만 날 수는 없으며, 심해 용혈수에서 살아있을 수도 없다. 자연 선택은 개별적 환경에 적응하는 특정의 종을 진화시켜 나갈 뿐이다. 굴드는 박테리아 만세!를 부른다. 박테리아는 생명계의 최빈값이다. 개체 수나 생물량에서나 모두 그렇다. 박테리아는 땅 밑 수천 미터에서도 살고 있으며 심지어 우주에 만약 생명이 있다면 그곳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종은 아마도 박테리아일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전달한 유전자가 가장 탁월한 종이라 할 때 박테리아야 말로 가장 우수한 종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 <풀하우스>에서 굴드가 말하고자 한 것들은 어느 정도 정리한 듯 싶다. 그러나 모든 책에는 딴지가 있나니 좌파 삐딱이 굴드 역시도 삐딱하게 보기에서는 빗겨갈 수가 없도다. 굴드의 적수 도킨스는 책이 출간된 지 1년 후 <뉴욕 서평>에 서평을 실었다. (이 서평은 한글로도 번역 된 도킨스의 글 모음집 <악마의 사도>에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서평에 실린 논점들을 참고하여 나의 관점들을 밝혀 나가고자 한다.

이 책이 함축하고 싶어하는 윤리적 목표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다양성의 옹호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종은 없으며 각각의 종은 각각의 환경에 맞춰 진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금의 시대적 조류인 차이 그 자체의 긍정과도 맞아 떨어져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 책은 곳곳에서 반 플라톤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말 이것이 차이 그 자체의 긍정인가? 굴드는 끊임없이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스템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에는 이러한 주장은 일견 수긍이 갈 수 있다. 그러나 도킨스가 그의 서평에서 논증하듯 특정 계통을 떼어서 볼 때에는 여전히 진보를 말할 수 있다. 적응론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특정 계통 위에 서 있는 종은 자신이 속해 있는 환경에 맞추어 적응해 가면서 진보해 나감을 관찰할 수 있다. 즉 적자 생존인 것이다. 이는 대표적인 반 플라톤주의 철학자 질 들뢰즈 등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환경에 적응치 못하는 존재자의 차이도 들뢰즈에게는 긍정되어야 할 다양체의 구성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나는 결국 진화론이 허버트 스펜서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적자 생존의 우생학이라는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화론자들은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은 존재에서 당위를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이고 다양성의 보존은 생명계 전체를 위해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지가 뒤틀리고 자신의 앞 가림도 못하는 지능을 소유한 사람이 무슨 유익을 지니고 있는가? 물론 존재에서 당위가 나올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자연에서의 적자 생존처럼 인간 사회에서도 우월한 종이 번영하도록 하는 우생학이야 말로 더욱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나는 이 책이 플라톤적이란 어휘에 부과하는 의미에도 불만을 갖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을 타고 플라톤은 데카르트와 함께 매 맞는 상갓집 개와 같은 처지에 처한 듯이 보인다. 굴드 역시도 이 책에서 플라톤에 대한 조소를 보내고 있다.

 

< 4부 전체를 통해 복잡성의 최소값을 의미하는 왼쪽 벽에서 기원한 생명은 다양성의 증가에 따라 오른쪽 방향으로 수동적인 경향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한계성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전개했다. 이 책의 다른 모든 예들과 마찬가지로, 시스템 전체의 변이(풀하우스)를 상세히 고려하면 적절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전체를 하나의 추상적인 숫자로 환원하고 시간에 따라 이 숫자의 변화를 추적해가는 플라톤적 전략으로는 오류와 혼란에 이를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평균을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이나 사람들에 경이감이나 공포를 주기위해 극단적인 예를 사용하는 것 모두 플라톤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식의 플라톤 이해는 과연 정당한가? 나는 이러한 굴드의 공격이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즉 엉터리로 플라톤의 상을 만든 후에 공격한다는 것이다.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내내 과연 굴드가 공격하는 플라톤이 과연 어떤 플라톤인지가 궁금했다. 나 또한 플라톤의 대화편 4-5편과 개설서 두 세 권을 보았을 뿐이지만 도무지 내가 이해하고 있는 플라톤이 이 책에서는 발견되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학자와의 이메일 교환을 통해서 더욱 확고해져 갔다. 전체를 하나의 추상적인 숫자로 환원한다는 소리는 플라톤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플라톤의 형상은 기본적으로 질이지 양이 아니다. 추상(abstraction)은 현상에서 특수한 것을 빼버리고(사상해버리고) 공통점만 묶는 사유 방식이다. 플라톤의 형상이론은 그 같은 추상에 근거한 형이상학이 <절대로> 아니다. 플라톤은 또한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역사를 점차 질서가 약화되어가는 과정으로 볼 뿐이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최초로 역사의 진보라는 사유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반 아우구스티누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차라리 더 합당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하는 부분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과연 이런 생각이 굴드 같은 자연주의자에게 적합한 것인가? 토마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에 비추어 진행되는 과학 탐구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비한 것>, <기이한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대상의 탐구는 기본적으로 패러다임의 내용 속에 예측되어 있다. 따라서 일견 경이로워 보이는 현상도 얼마든지 궁극적으로는 이해 가능한 것으로 주장되며 과학자들의 작업이란 단지 퍼즐 풀이일 따름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신비는 자연의 현상에 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자연주의자들이 종종 내보이고는 하는 이런 생명에 대한 외경심의 표현이 가끔 식 우스워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이 서평을 몇 가지 생각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진화냐 창조냐 아니면 근자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지적 설계냐 하는 물음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진화가 맞다고 가정한 후에 우리에게 그것이 갖고 있을 의의를 생각해 보려고 하였다. 우리가 있다는 것, 우리가 생존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 생명의 기원이란 너무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나는 이 서평을 통해서 더욱 많은 이들이 교과서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 진화의 이해를 넘어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의문에 답하는 더욱 큰 모험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한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 이는 100여년 전 고갱의 질문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던져야 하는 물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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